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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星州) 한개마을
사드 배치로 성주산 참외를 외면할 듯 난리를 치더니 지금 이곳 성주 들판은 하얀 비닐을 뒤집어쓰고 참외밭으로 돌변 한지 오래 되었다. 한개마을을 소개한 엽서사진에는 어두운 밤에 번져 나오는 불빛은 따사롭고 은은하다. 안개에 덮인 서쪽 안길엔 진사댁이나 교리댁의 택호는 바깥어른들의 품계를 말함이고, 응와종택, 한주종택은 입항조 다음 아랫대부터 맏집으로 종가의 위상을 품었고, 월곡댁, 하회댁, 도동댁 택호는 그 집 안어른들의 친정마을 이름이다. 마을은 이제 얼마나 손질을 했는지 토석담도 일률적이고 고샅도 서로 닮게 치장해 옛 풍광을 잃는지 오래 되냐 보다. 마을을 꾸며도 특색을 살려야 한다. 전국의 고택이나 종가도 더욱이 전통마을의 기와도 담장도 헛간도 견본처럼 빼닮아 일색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오래된 마을들을 거울삼아 보존할 일이다.
진사댁과 교리댁, 응와종택과 월곡댁은 언덕바지에 있어 우선 대문채의 위세가 대단하다. 진사댁 마당은 정갈하다. 사랑채 뒷벽에 걸린 소쿠리, 바구니, 광주리, 채반, 키, 술구기 들은 5.60년 전 생활용기로 그집 안어른들의 손때가 묻은 흔적들이역력하다. 진사댁은 사랑채 뒤쪽, 안채 서쪽으로 원두막 같은 초가에 문짝의 큼직한 만자 문양이 여유가 넉넉해 갈 때마다 찾는다.
교리댁은 영조(1760년)때 지었다는 집이다. 그 댁 후손인 이귀상이 홍문관 교리(정5품)를 지내 교리댁으로 불린다. 대문채에 방 3칸이 붙었다. 첫째 방이 서당이란다 아마 학동들이 드나들기 편하게 지은 모양인데 방문을 열어보니 서너사람이 앉아도 비좁을 것 같다. 대문짝에 두문 첩에 눈길을 둔다 울첩(鬱疊), 신도(神茶)란 두문 첩은 이집만의 특색이다. 울첩(鬱疊)은 우리나라의 다른 이름이라 하고 신다(神茶)라는 첩은 악귀나 잡귀는 아예 대문에서부터 쫓아 버리니 범접하지 말라는 뜻이다.
교리댁 마당은 빗물로 흥건하다. 바깥양반이 계셨더라면 물길을 잡아 놓았을 텐데… 겨우 디딤돌을 찾아 딛고 마당에 들면 집은 온통 기둥과 방문마다 명언가구(名言佳句)로 도배를 했다. 방문 위쪽에 걸린 ‘根道’ ‘核침’이란 편액이 이 집의 위상을 높인듯하다. 核침이란데 ‘침’자는 초두艹아래 나락 禾변에 几 책상 궤로. 기쁠 침이라는 데 옥편을 수십 번 뒤적거려도 찾지를 못했다.
댓돌 앞으로 두세 그루의 파초가 예전보다는 위세가 작아졌다. 좁은 마당에 파초라니 하고 생각 없어 스치겠지만 파초는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희귀한 수종이라 오래전부터 구해 가꾼 모양이다. 파초의 잎은 종이가 귀한 시절에 그 잎을 따서 건조해 종이로 대신 했다고 한다.
파초 옆으로 사당으로 가는 비좁은 마당에 작은 나무 아래에 사각 진 돌이 놓여 있다 이 돌은 말을 타고 내릴 때 디딤돌로 섰다는 상마석이다. 이 돌에 ‘雲西迎月臺’라는 글씨를 음각해 놓았다. 뜻인즉 ‘친구 보게. 서쪽 하늘의 구름을 보니 비가 올 듯하니 이 사람아, 오늘 하루 더 유하고 달뜨면 떠나시게. 이게 이집 양반 댁의 접빈의 범절인가 싶다.
중문 옆으로 키 큰 탱자나무는 추녀 쪽으로 응석을 부리며 기울어 졌다. 5.6미터가 넘을 듯한 이 나무는 응와 대감이 제주에서 얻어온 세 그루 중의 하나인 감귤나무다. 본가와 두 아들 집에 심었지만 교리댁 것만 살아남은 유일한 감귤나무요 탱자나무인 셈이다. 감귤도 내지로 오면 탱자로 된다더니 이 나무가 그러하다
객들은 사랑채 뒤쪽에 있는 사당으로 몰려가더니 금방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사당만 보고도 모두들 식겁한 모양이다. 중문은 닫아걸어 안채를 볼 수 없어 아쉽다. 중문으로 들면 정원과 채전이 있고 쪽문으로 나서면 하회댁과 한주 종택으로 갈수 있는 고샅인데 말이다. 한가한 정원 풍경을 그리며 언제 적에 와서 정원을 스케치한 북을 보면서 돌아섰다.
응와종택, 북비고택
솟을대문에 걸렸던 ‘定憲公凝窩李判書舊宅’ 현판이 이번 길에 와보니 ‘응와고택’으로 바뀌었다. 대문간에는 대감이 외출할 때 가마나 말을 타고 나설 때 드나들게 편하도록 문지방이 없다. 안으로 들어서면 왼편에 농서(農棲)란 현판이 걸린 정침이 있고 오른쪽 작은 쪽문 위로 ‘北扉‘란 작은 문패가 걸렸다. 북비란 북쪽으로 난 작은 싸리문을 말함이다. 이 문으로 들면 이 집의 뒤편 마당으로 북비고택(北扉古宅)이다.
종손이 외출하다 반갑게 나를 반겨준다. 자혜당과 독서종자실의 서책과 문집들을 열람하지 못하고 안부만 서로 묻고 헤어졌다. 사랑채 뒤편에 걸렸던 독서종자실 ‘讀書種子室’ 편액이 보이지 않아 종손에게 물었더니 북비가 쓰인 아래채 건물로 옮겨 놓았다 한다. 그래도 없애지 않고 옮겨 놓았던 말에 안도하면서 모두 들 그 뜻이나 새기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귀한 뜻이 담긴 편액이 아니었던가. 신숙주는 사약을 앞에 두고도 내 집안에 讀書하는 種子가 끓이지 않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독서종자란 결국 독서를 통해 가문의 위상을 높이라는 말일 게다.
대문 건너편에 돈재 이석문의 신도비(정이품이상 세울 수 있음)로 안내했지만 들은 채 만 채하고 버스 있는 데로 내려들 간다.
돈재의 신도비는 여느 신도비와는 다르게 비구도 작고 비신도 작다. 신도비가 있는 전각에는 화강암으로 철책을 둘러 접근을 금하였다 전각 앞으로 오석에다 다음 글귀를 볼 수 있다.
이 비석은 영조 조에 천륜에 무너진 왕실의 비분을 품고 낙향하였으나 사도세자에 대한 사모의 정과 사직의 안녕을 기원하여 북녁으로 문을 내어 북비공으로 더 알려진 돈재 이석문의 신도비다
이석문의 자는 사실(士實) 호는 돈재다. 재목으로 추천받아 조정에 나간 뒤 선전관 훈련원주부로 벼슬을 지냈다 1764년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의 반목으로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할 때 왕명을 무릅쓰고 세손을 업고 들어가 영조에게 부당함을 간하다 곤장을 맞고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 와 무괴지심이란 편액을 써 놓고 조석으로 대좌하여 두문불출하였다
후일에 영조가 다시 훈련원 주부로 제수하고 조정 대신들이 출사를 권유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사후에 병조판서로 증직되었다. 그의 손자 규진이 장원급제했을 때 정조가 특별히 불러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가상하다. 아직까지 너의 집에 북녘으로 낸 문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다.
돈재 이석문(1713-1773)은 숙종 때 태어나 영조 때 북비공으로 알려졌다. 1739년 27세로 무관에 급제하여 사도세자 호위무관으로 1762년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자 잘못이라 간하다가 삭탈관직 당하고 낙향하여 북쪽으로 사립문(北扉)을 내고 사도세자를 기리며 은거하였다.
2007년에 하용준이 쓴 ‘북비이야기 1권-6권’은 이 집을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이다. 고택도, 종택도 말이 없지만 그 댁 후손들은 대를 이어 이 집들을 자금도 지키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력들은 외면하고 그저 주마간산으로 만족하는지는 몰라도 그래도 한 꼭지의 내력이나 이야기는 담아 가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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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최상순드림
한개마을에 있는 고택과 충절의 실화를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야돌님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