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금병매(31회)하녀 춘매 6
춘매는 본래 영리한 계집앤데다가 하녀로서 주인의 눈치를 보는데 이골이 난 터이지만,
서문경의 물음에 얼른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손설아를 헐뜯는 말을 주인어른한테 해도 되는지 얼른 판단이 서질 않았다.
주방에서 부엌데기처럼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엄연히 넷째 부인인데,
말하자면 하녀가 마님의 험담을 해도 되는 건지,
그래도 주인어른이 곱게 보아줄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비록 주인어른과 깊은 관계까지 가지고 있고,
때때로 세 사람이 벌거숭이로 한데 뒤엉키는 그런 일까지 즐기고 있긴 하지만,
신분은 여전히 다섯째 마님의 몸종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래서 춘매는 서문경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연다.
“오늘 아침 주방 마님께서 몹시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에요”
“왜? 뭣 때문에?”
“모르겠어요”
“그래서 아직 하화병하고 은사자탕이 멀었던 말이야, 뭐야?”
서문경이 역정을 내자,
춘매는 에라 모르겠다는 듯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여 버린다.
“공연히 저를 나무라지 뭐예요.
주인어른하고 그거 할 때 제가 운다고 비꼬고,
또 셋이서 그런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더라구요.
그러면서 개보다도 못한 것들이라고 욕을 해대지 뭐예요”
“뭣이 어째?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에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서문경은
“음-”
무겁게 신음소리를 토하고는 지그시 두 눈을 감으며 침통한 표정으로
무슨 생각에 잠기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눈을 뜬 서문경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서 이 사람이 주방으로 갔나?”
“예, 제 얘기를 듣고 마님이 화가 나서 가셨어요”
“음- 춘매야, 네가 다시 가보고 오라구”
“예”
주방에 갔던 춘매가 헐레벌떡 달려서 돌아왔다.
“싸운다구요. 막 서로 머리끄덩이를 거머쥐고 싸우고 있지 뭐예요.
우리 마님이 못 이기는 것 같애요”
“헛헛허....”
벌컥 화를 낼 줄 알았던 서문경이 이번에도 뜻밖에 껄걸 웃는 것이 아닌가.
춘매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문경을 바라본다.
“아침부터 재미있구나. 어디 내가 한번 가볼까”
서문경은 정말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코 언저리에 닝글닝글한
웃음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선다.
회랑을 꺾어 돌아 주방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는 서무경의 뒤를 춘매가 따른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옳을지, 서문경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해 보았다.
서문경은 성질이 급할 때는 가랑잎에 불붙는 듯하지만, 반면 침착할 때는 예상외로
다른 사람의 눈에 신기하게 비칠 정도로 침착했다.
화를 내고도 남을만한 일인데도 뜻밖에 아무 일도 아닌 듯이 느긋하게 웃기까지 하는그런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그가 특히 침착해지는 것은 마누라들끼리의 실랑이가 벌어졌을 경우였다.
그럴 때는 어느 한쪽의 편을 들려고 하질 않고 가급적이면 공정한 입장에서 양쪽을
다 나무라고 서로 화해를 하도록 다독거리게 마련이었다.
여러 여자를 아내로 거느리는 남자의 도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편네가 여러 사람이면 하찮은 일로도 곧잘 티격태격 다투기 일쑤고
샘을 내어 헐뜯게 마련이어서 어느 마누라만을 특히 편애하는 일을 되도록 삼가는 터였고,
그녀들의 욕구 불만을 헤아려서 가능하면 골고루 이따금 한 번씩이라도 동침을 해주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을 경우에는 한동안은 말하자면
신부에게 빠져서 다른 마누라들은 돌보지 않게 마련이었다.
손설아와 금련 사이에 오늘 아침 다툼이 벌어진 것도 바로 그런 까닭에서라는 것을 서문경은 잘 알고 있었다.
금련을 맞아들이기 전인 얼마 전까지만해도 손설아와 거의 매일밤 동침해 오던 터이라,
다섯째에게 밀려나 별안간 독수공방을 하게 된 넷째의 시새움의 폭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문경은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어서 되도록이면 말로써 잘 타이르는 것으로
끝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설령 그녀의 입에서 세 사람이 함께 어울리는 개같은 것들이라는 말까지 나왔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추궁해 들어가며 오히려 그 사실을 온 집안에 알리는 꼴이 되어 체면이 말이 아닐터이니,
모르는 것처럼 넘겨버리는 것이 현명하다 싶었다.
그런데 주방 가까이 간 서문경은 그만 그 자리에 주춤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손설아의 서슴없이 내지르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제 서방을 독살한 년이 어디서 큰 소리야.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 응? 이 천벌을 받을 년아!”
“말 다했어? 내가 언제 서방을 독살했다는 거야? 앙? 네 년이 봤어? 봤냐 말이야!”
금련이 맞받아 악을 써댄다.
하인의 아낙들이 뜯어말리는 바람에 드잡이는 끝났으나,
서로가 분을 못 참아 삿대질을 해대며 악다구니를 퍼붓고 있는 중이었다.
서문경은 가랑잎에 불이 확 붙는 느낌이었다.
아직 말끔히 멍이 가시자 않아 푸르스름하고 약간 삐딱해진 매부리코가
경련을 일으킨 듯 실룩거린다.
눈에 불을 켜고 주방으로 뛰어들어간 서문경은,
“너 이년, 지금 뭐라 그랬어? 누가 누구를 독살했다는 거야. 응?”
냅다 호통을 치며 다짜고짜 손설아의 뺨을 한대 올려 붙인다.
놀라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그녀를 이번에는 발길로 사정없이 걷어찬다.
뒤로 벌렁 넘어졌다가 허겁지겁 일어나는 그녀의 머리 끄덩이를 달려들어 덥석 거머쥐고는,
“이년 이리 나와. 오늘 맛 좀 봐라. 이년이 아가리가 성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주방 바깥으로 끌어낸다.
“아이고 아이고 잘못했어요. 용서해줘요.
한번만요, 한번만요.....”
손설아는 곧 숨이 넘어갈 듯 애원을 하면서 질질 끌려 나간다.
부엌 아낙들은 겁에 질려 감히 말리러 들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고,
금련도 처음엔 서문경의 돌연한 출현에 약간 당황하다가도 곧 분이 확 풀리는 듯,
“꼴 좋다. 당해야 싸다구. 어디서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는거야”
끌려나가는 손설아를 향해 눈을 힐끗 힐끗 흘긴다.
서문경이 손설아를 주방 바깥 마당으로 끌어내어 꿇어 앉혔을 때는 이미 주방의 소동을 알고 집안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고 있었다.
서문경은 하인을 시켜 집안사람 전원이 모이도록 했다.
‘독살’이라는 말이 손설아의 입에서 나온 이상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고,
다시는 그따위 말이 어느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못하도록 일벌백계로
전원이 보는 앞에서 단단히 본때를 보여주어야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집안사람들이 한 사람 빠짐없이 모두 모여들자,
금련은 슬금슬금 피하듯 자리를 떴다.
그러나 멀리 가지 않고 회랑이 꺾어지는 그 모퉁이에 숨어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고소하다는 듯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맨땅에 꿇어 앉아 얼굴을 푹 떨어뜨리고 있는 손설아 앞에 서문경은 심문을 하듯
버티고 서서 모두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묻는다.
“너 이년, 왜 이렇게 땅바닥에 꿇어 앉게 되었는지 알겠느냐?”
대답이 없다.
“왜 대답이 없지?”
벌컥 고함을 내지른다.
그러나 서문경은 조금 전의 가랑잎에 불붙는 듯하던 그 성깔은
어느 정도 가라앉고 제법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집안의 모든 가솔(家率)이 모인 앞이라 가주(家主)로서 위신을 차리기 위해서였다.
손설아는 들릴 듯 말 듯 입을 달싹거린다.
“잘못했으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줄 일이 있고, 못해 줄 일이 있는 법이야.
너 이년, 너는 누구편이냐? 무송이란 놈 편이냐? 내편이냐? 대답해 보라구?”
“제가 당신 편이지, 무송이 그놈 편일 턱이 있어요. 안 그래요?”
겁에 질려 기가 죽을대로 죽어있던 손설아가 뜻밖에도 번쩍 얼굴을 쳐들고
제법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잘못하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던 것이다.
서문경은 야, 이것 봐라, 싶으며 위엄있게 호통을 친다.
“그렇다면 왜 그따위 소리를 하는거야?
반금련에게 남편을 독살한 년이라고 네 입으로 마구 퍼부었잖아, 조금전에. 그랬어, 안그랬어?”
“화가 나면 무슨 말을 못해요”
“화가 난다고 당치도 않은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건가?
멀쩡한 생사람을 살인자로 몰아붙여도 되느냐 말이야?
그 말은 바로 무송이란 놈이 내 생일 잔치 때 뛰어들어와서 한 말이구.
그 불한당보다도 못한 미친놈이 내뱉은 말을 곧이 듣고 그 말을 네년이 반금련에게 퍼부었다면 그게 바로 무송이 편을 든 게 아니고 무엇이야?
그래도 네년이 내 편이라고 할 수 있어?”
“잘못했다구요. 반금련이가 달려들어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너무 화가 나서
그만 그런 말이 나왔지 뭐예요.
여보, 한 번만 용서해 줘요. 정말 잘못했어요”
아내로서 남편에게 애원을 하는 투로 나온다.
그러나 서문경은 쉽사리 화가 풀릴 턱이 없다.
뒤가 구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반금련이 남편을 독살했다면 나는 뭐가 되는 거야.
응? 나는 남편을 죽인 여자를, 다시 말하면 살인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같이 사는 꼴이 되잖아.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나?”
“아이고 여보, 당신은 절대로 그런분이 아니라구요. 제가 왜 당신을 몰라요”
“닥쳐! 당신 당신 하지 말어. 듣기도 싫다구”
서문경은 이 기회에 집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과 반금련의 떳떳함을
알려야 겠다는 듯이 모여 서있는 가솔들을 향해 해명을 하듯 말한다.
“내가 반금련을 아내로 맞아들이기 전에 반금련의 남편이 왜 죽었는가를
자세히 알아보았다구. 시체를 검사한 하구에게 물어보니까 틀림없는 병사였다는 거야.
검시관이 거짓말을 하겠어? 반금련의 말대로 평소에 가슴이 아파서 약을 먹어 왔는데,
갑자기 악화되어 병사한 게 틀림없다구. 그것을 확인하고서 내가 반금련을 아내로
맞아들인 거라구. 모두들 알아들었는가?”
모두 예-하고 일제히 대답을 한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금련은 매우 흡족한 듯,
“저 양반 좌우간 알아모셔야 해. 남자가 낮가죽이 저 정도는 두꺼워야 된다구.
아마 심장에 털도 수북하게 돋아났을 거야. 히히히...”
혼자서 중얼거리며 킬킬 웃기까지 한다.
서문경은 말을 꺼낸 김에 좀더 가솔들이 납득을 하도록 계속 늘어놓는다.
“무송이란 놈이 자기 형의 죽음이 혹시 독살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은 것은
시체를 매장하질 않고 화장을 해서 그 재를 강물에 뿌려버렸기 때문이라는 거야.
행상을 해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한 가난뱅이 집에서 묘를 어떻게 쓴다는거야.
묫자리는 누가 공짜로 주나. 화장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런데 그 정신 나간 놈이 끝내 제 형수를 의심하고서 그 난동을 부렸던 거라구.
과부가 된 제 형수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고 해서 나까지 마치 무슨 공범자처럼
생각하고서 말이야. 과부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도 뭐 잘못인가.
나 참 재수가 더러울라니까 별놈의 꼴을 다 당했었지 뭐야”
듣고 있던 가솔들 중에는 일이 그렇게 되었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데 명색이 내 여편네라는 여자가 무송이 한 말을 곧이 듣고서 그 말을 직접 반금련에게 퍼부어 대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구.
그런 억울한 소리를 들은 반금련이 얼마나 분하겠느냐 말이야. 안 그래?”
어른들은 거의가 대답이 없고, 몇몇 어린 종들만 예-하고 대답한다.
“대답않는 사람들은 뭐야! 응! 그런가, 안 그런가?”
서문경의 목소리가 격해지자, 그제야 모두 마지 못하는 듯 예-하고 대답을 한다.
“대답들이 왜 그렇게 시원찮나?”
“예-”
한결 대답 소리가 크다.
“어험!”
서문경은 위압적인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꿇어앉은 손설아를 향해 마치 선고를 내리듯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그 따위 말을 함부로 지껄인 네년의 혓바닥을 이제부터 뽑아놓을 작정이다.
아가리를 벌려. 그리고 누구 얼른 가서 집게를 가지고 오라구”
그 말에 그만 손설아는 질겁을 하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비며 애원을 한다.
“아이고 살려 주세요. 아이고 여보, 다시는 안그럴께요. 한 번만 살려 줘요. 아이고 아이고...”
“어서 가서 집게를 가지고 오라니까. 금동아, 네가 가서 가지고 와”
마침 자기의 몸종인 금동이가 눈에 띄자 그에게 이른다.
“집게가 없거든 인두를 불에 달구어 가지고 오라구. 혓바닥을 바싹 지져 놓을테니까.
다시는 그따위 소릴 못하게... 뭘 하고 있는 거야. 빨리 가서 안 가지고 오고”
호통을 치자 금동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도리없이 연장을 가지러 슬금슬금 간다.
“빨리 뛰어!”
금동이는 놀라 냅다 뛴다.
그만 손설아는 그 자리에 무너지듯 땅바닥에 엎어져서 목놓아 울음을 터뜨린다.
손설아의 울음소리에 모여 서있는 가솔들은 모두가 속으로 서러워하며
두려움에 굳어져서 숙연하고 처연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정실인 오월랑을 비롯한 이교아 맹옥루 세 부인이 가장 침통한 심정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집게로 혀를 뽑다니,
혹은 인두로 혓바닥을 지져 놓다니,
그럼 손설아는 어떻게 된다 말인가.
죽고 마는게 아닌가.
정말 그런 끔찍한 일을 자기처의 한 사람에게 저지르려는 것인가 싶으니
남편인 서문경이 마치 야차(夜叉)처럼 느껴져 바라보기조차 몸서리가 나는 듯
고개를 떨구며 눈을 감아버리기도 했고, 살짝 돌아서기도 했다.
무거운 분위기를 휘저어 놓듯이 서문경은 혼자서 벌컥 역정을 내뽑았다.
“이 녀석이 왜 빨리 안 오지. 연장을 만들어 가지고 오는 거야, 뭘 하는 거야”
그 말이 떨어지자
곧 저쪽 회랑을 돌아 뜰로 내려서는 금동이의 모습이 보였다.
한쪽 손에 집겐지 인둔지 얼른 분간이 안되는 연장 하나를 들고 있었다.
“어서 뛰어와!”
“예”
금동이가 마지못해 뛰기 시작하자,
* 계속 32회~~
첫댓글 암튼 길다
천천히 즐기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주 착한 어른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