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0월 18일에 경상남도 진주시 하촌동 194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명(兒名)은 최창수(崔昌洙)이며, 본명은 강문수(姜文秀)이다. 남인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설이 많다. 최씨 문중에서 태어난 남인수(당시 이름은 최창수(崔昌洙))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어머니(장하방 씨)가 강씨 문중으로 재가(再嫁)를 하게 되어 이름을 강문수(姜文秀)로 바꾸었다는 말도 있고, 어렸을 적에 너무 가난하여 강씨 문중에 양자로 들어갔다는 말도 있다. 1939년 4월 7일에 김은하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고, 1958년 말경 부인 김은하와 이혼하였다. 1962년에 지병인 폐결핵으로 타계하였으며, 당시 44세였다. 남인수는 평소 노래실력이 뛰어나 여러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가수의 꿈을 키우던 중 1935년에 서울로 상경하여 시에론 레코드사에서 「눈물의 해협」이라는 곡을 취입하여 레코드 가수로 데뷔하였다. 1936년 말에는 오케 레코드사에 입사하여 예명을 남인수(南仁樹)로 하고 오케 레코드 전속 제1탄인 「범벅서울」,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를 취입하여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오케 레코드사에서 매년 히트곡을 내놓았는데, 1938년에는 「애수의 소야곡」을 취입함으로써 명색이 대형가수로 자리매김 하였고, 이후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그런데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할 무렵 남인수도 어쩔 수 없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혈서지원」,「그대와 나」 등의 군국가요를 부르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고 3·8선이 갈라지자, 당시 고려 레코드에서 남인수는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가거라 삼팔선」을 음반으로 발표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58년 대한가수협회의 초대회장을 역임하였고, 1960년 전국공연단체연합회 회장을 거쳐, 1961년 12월에는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2년 6월 26일에 폐병으로 작고한 남인수는 서울 조계사에서 당시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영결식이 치러진 뒤 경상남도 진주시 장재동 산 49번지에 묻혔는데, 장례식장에서 장송곡 대신에 남인수의 대표곡인 「애수의 소야곡」 멜로디가 연주되었다. 1984년 12월에 남인수 노래 기념비가 진양호 내에 세워졌으며, 2001년 5월에는 남인수 기념사업회에서 남인수를 기리기 위해 노래 기념비 자리에 남인수 동상을 건립하였다. 2004년에는 남인수 팬클럽에 의해 진주시 장재동 산 49번지에 위치한 남인수 묘소를 정화하고 추모비를 세웠다. 남인수는 백년이 지나도 나올 수 없는 하늘이 내린 목소리로 평가받고 있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그가 남긴 주옥같은 1,000여 곡들은 나라 잃은 서러운 마음을, 때로는 분단의 아픔 속에 신음하는 서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 한국의 대표적인 대중가수라 할 수 있다.
1939년 무렵 오케연주단의 모습
오케 연주단 지방공연 사진.1번- 남인수 ,2번- 고복수, 3번- 이화자,4번- 이난영, 5번- 김해송, 6번- 김정구, 7번- 이철- 오케 연주단 단장- 오케레코드사 사장, 8번- 손목인, 9번- 이은파, 10번- 장세정, 11번- 김용호
오케레코드 1941년 7월 신보 목록에 실린 남인수 사진.
오케레코드 '안개 낀 상해' 가사지에 실린 남인수 사진.
남인수의 고향인 진주 촉석루 아래에서 찍은 사진 맨 왼쪽이 남인수,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작사가 구완회 맨 오른쪽이 작사가 박영호
작곡가 이용준(왼쪽), 남인수(오른쪽), 미상
백난아(당시 19세, 왼쪽)과 남인수 부부 (중앙- 남인수, 오른쪽- 김은하) 가 일본 전국 순회공연 중 분장실에서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 김은하는 당대 한국 무용계의 1인자였다.
조선악극단 멤버들의 사진 앞줄 왼쪽 부터 이난영, 서봉희, 이화자, 맨 끝이 단장 이철 가운데줄 왼쪽 부터 이봉룡, 남인수 뒷줄 두번째 부터 엄재근, 송달협, 김정구 지휘봉을 든 사람이 손목인
1940년 남인수의 눈오는네온가 광고 사진
40년대 말 이난영, 장세정, 김정구와 국도극장에서.
군예대 시절. 앞줄 왼쪽이 남인수, 그 옆이 가수 금사향이다.
50년대 시민회관 공연사진- 맨 왼쪽이 이인권, 왼쪽에서 두 번째가 고복수 왼쪽에서 세번째가 남인수이고, 네번째가 김정구 이다.
50년대 중반 작곡가 손석우와 함께 중앙극장 앞에서 찍은 사진
50년대 중반- 작곡가 이재호와 함께 찍은 사진.
50년대 중반- 태평양 가극단의 포스터이다. 정중앙이 남인수
50년대 극장 포스터이다. 가요계 황제-남인수, 가요계 여왕- 신카나리아 모던가수- 고운봉, 오리엔트 전속- 김용태, 가요계의 호프- 김백희 등의 광고문구가 보인다.
57년경 남인수
1958년 국도극장 공연에서- 앞줄 외쪽부터 영화배우 김지미, 이난영 뒷줄 왼쪽부터 계수남, 남인수, 영화배우 이민, 고운봉, 김선영.
남인수의 병간호를 하고 있는 이난영.
50년대 말 남인수와 이난영
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장동휘, 일곱번째가 최병호 앞줄 왼쪽부터 손석봉, 남인수, 황금심, 고복수, 박진(전 국립극단장), 한 사람 건너 최남용
앞 줄 외쪽부터 남인수, 신카나리아, 황금심, 고복수 57년 고복수 은퇴 공연 때 찍은 사진
남인수 친필문서- 59년 가수협회장이던 남인수가 반야월에게 보내는 편지
진주시 초장동 새미골 중간지점 오른쪽 양지바른 경사지에 있는 묘소
묘소 진입도로가 지난해에 소규모로 정비되어 다행이었다
묘소를 오르는 경사면은 통나무로 임시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가요황제 남인수 추모비
예술인 남인수지묘 라는 비석의 글자가 선명하다.
묘소의 경사면이 너무 가파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요황제의 묘소 치고는 너무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옛날에는 더 초라했는데, 지난해 부분정비를 한 것이라 한다.
지나는 등산객 두분이 일부러 들려 참배를 하고 가신다.
묘소 바로옆 대밭에는 마삭덩굴이 새파랗게 겨울을 이기고 있었다
묘소 아랫편 밭둑에는 매실나무에 꽃망울 터지고 있다.
엊그제 내린 봄비로 이끼들이 싱싱하게 살아나고 있다
묘소입구 수로에는 벌써 개구리가 나왔는지 산란무더기가 익어가고...
묘소주변에는 양지바른 곳이라 비교적 따뜻하여 개00꽃이 한창 피어나고.
오늘은 애수의 소야곡 한곡쯤 올려도 좋은데...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그가 남긴 주옥같은 1,000여 곡들은
때론 나라 잃은 망국민의 처참한 마음을, 때론 아물지 않는 전쟁과 분단의
고통 속에 신음한 서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진 국민가요들이다.
1935년 어느날, 학생복 차림의 잘생긴 18세 청년 강문수는 '시에론레코드'사
음악실에서 노래 테스트를 받는다.
이때 부른 노래가 (눈물의 해협). 기타 반주를 해주었던 작곡가 박시춘으로
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방송 출연과 본격적인 가수 수업을 받게 된다.
시련도 있었다.
친일가요라고 비난받은 수많은 곡중 (감격시대, 1939년4월, okeh12237번)와
(혈서지원-이천오백만감격, 1943년11월, okeh31193)은 그가 부른 군국가요.
얼마 전 8ㆍ15 광복절 행사에 (감격시대)가 흘러나와 언론기관에 항의전화가
빗발친 것도 이 때문이다.
감격시대의 발표 연도를 제대로 알리 없는 방송 관계자들의 무지에서 나온
해프닝이지만, 암울했던 일제치하에서 강요당했을 군국가요의 존재는 후세들에게
나라 잃은 설움의 아픔을 전해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당시 남인수의 인기는 지금의 '오빠부대'를 능가했다.
그가 출연한 악극단은 벌떼처럼 몰려든 청중들의 거듭된 '앵콜' 요청으로 진행이
어려웠을 정도.
'사회자들은 번번이 무릎을 꿇고 프로그램 진행을 사정해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청중들의 탄성과 흐느끼는 여성 관객들로 객석은 늘 술렁이고
극장 밖에는 남인수를 데려가려는 인력거꾼들이 서로 다툼까지 벌였다.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던 해(1945년) 남인수는 결핵으로 병약해졌다.
53년 7월 휴전후 발표한 또하나의 명곡은 (이별의 부산정거장, 유니버샬, 1954년)이다.
55년 추억의 소야곡, 청춘고백, 56년 산유화, 58년 무너진 사랑탑 등으로 히트
62년(45세) 지병의 악화로 남인수는 세상을 떠난다.
조계사에서 한국연예인협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의 장송곡은 온 국민이 사랑했던
'애수의 소야곡'이였다.
남인수도 배호처럼 사후에 우후죽순격으로 탄생한 모창가수들로 인해 가짜음반이 난무한다.
남인수를 기리는 모든 일에 정성을 들이며 '예도매미회' 모임을 결성하고, 노래비
건립에다, 1991년부터 10회째 남인수가요제를 이끌어온 신해성과 그 애호가들.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남인수 사망 39주기인 2001년 6월26일 진주에서는
남인수동상제막식이 있었고, 해마다 열리는 진주개천예술제// 이별슬픈 프렛트홈 / 파워필
1.그사람 잊어야지 그 이름도 잊여야지 행복을 빌어 주고 떠나야 하는 정거장 대합실에 내 청춘이 외로워 타향길 밤 열차야 손을 잡고 작별인사 아~ 주고받을 사람도 없네
2.고향도 님도 잃고 마음 둘 곳 어드메뇨 천리 길 차표 한장 무거운 발길 바람 찬 플랫트홈 트렁크를 들고서 서러운 운명이라 기적소리 슬피 울 때 아~마후라에 눈물이 젖네
3.나 혼자 떠나간다 밤 열차에 몸을 싣고 미련이 남은 사랑 한이 되여도 세월이 흘러가면 잊을 날이 있으리 담뱃불 연기 따라 그림자는 사라지고 아~유리창에 밤비가 오네
|
첫댓글 동갑내기 친구가 부릅니다
남인수 이제 영원히 기억속의 인물입니다.
해방후 애환이 담긴 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