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속> 6. 미저리(misery) 的 신앙(?)의 위험성
과거에 관람했던 영화중에서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섬뜩한 영화가 바로 '미저리(misery, 비참)'라는 제목의 영화이다.
어느 소설가가 눈으로 뒤덮인 깊은 산 속에서 소설 집필을 끝내고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 마을에 사는 그의 열렬한 팬인
전직 간호사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가 쓴 소설을 읽어본 그녀는 그에 대한 잘못된 애정과 편집증(망상증)으로
자기 의도대로 소설 줄거리를 바꾸기를 강요하면서 더욱 정성어린 간호를 기울인다.
그녀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에게 가해진 폭행과 약물주사와 감금은 정말 끔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영화 속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소설은 그 소설을 쓰는 '작가의 의도대로'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의 의도대로 쓰여졌다면 비록 그 작가의 손에 의해 쓰여졌다 하더라도
그 작품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다.
소설이 작가의 의도대로 쓰여져야 하듯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의 의도(뜻, 섭리)대로' 행해져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기도와 정성'이 아무리 지극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원하시지 않는 기도와 정성"은 영화, 미저리의 여주인공의
'소설가에 대한 정성어린 간호'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신앙인들이 '외적 신앙행위'가
자신의 신앙과 구원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미사참례와 성사생활, 성체조배, 묵주기도, 자선과 봉사활동, 단체생활,
여러 피정과 강좌 참여 등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성실한 신앙인'이라 스스로 안위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의 '구원의 필요조건'을 다 충족시켰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다.
신앙의 외적행위, 외적활동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신앙과 구원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드러나는 외적 신앙행위로만 다른 사람의 신앙심을 판단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신앙인 스스로 거기에 안위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인간 구원에 있어서의 전부(전체)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방식대로, 자기의 뜻대로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하느님의 방식대로',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을 섬긴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하느님이 가장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지도 않으면서,
하느님께 그것을 늘 여쭈어 보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방식대로만 그분께 해드린다면,
하느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내 뜻대로만 해드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을 '미저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왼쪽 등이 가려운데, 오른쪽 등을 긁어주는 꼴이다.
가렵지 않은 곳을 긁어주면 가려운 곳이 더 가렵게 되고,
긁어준 부분이 더 아플 뿐이다. 상대의 어느 부분이 가려운지 먼저 물어보고 긁어주어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하느님께 늘 '여쭈어 본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다 해드린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그냥 '척'하면 '착'이다.영감을 주셔서 '영감(靈感)'이 즉통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의사를 늘 '물어본다.' 그리고 상대방의 의사대로 다 해준다.
그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척'하면 '착'이다. 텔레파시가 통한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지 묵주를 손에서 떼지 않고 틈만 나면 묵주기도를 바치면서도,
매일미사에 참례하여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시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고해성사에 자주 참여하면서도,
한 주간에도 여러 시간을 성체조배실에 꿇어앉아 주님을 바라보며 마음에 새기면서도,
적지 않은 교무금과 헌금과 자선과 봉사와 단체활동에 자신의 정성과 노력을 다하면서도,
'다른 이에 대한 배려에는 너무나 무관심한 신앙인'이 있다.
과거에 몇 분의 지인과 함께 긴 시간(며칠 간)을 보낸 적이 있다.
그 중에는 열심한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여 온 선친으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철저히 신앙교육을
받고 자라온 분이 계셨다. 무엇보다 소위 신앙활동(?)에 아주 열심한 분이셨다.
그분은 자신의 신앙적 경험에 아주 자신감이 넘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자신의 경험이나 거기에서 얻어진 지식만이 가장 옳은 것처럼 말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느라 다른 이에게는 아예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도 않았다.
'아주 긴 시간 동안'을, 정말로 놀랍게도 다른 사람의 말을 도중에 끊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거의 모든 주제가 '신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신앙인이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긴 시간을 서로 함께 하면서 '대화'가 사라진 그런 경우는 정말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나까지도 말하기를 포기할 정도였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이에 대한 배려'에 무관심 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원의를 헤아려 주는 "아량"이 있다.
하느님은 미사나 고해성사나 성체조배에 굶주리신 분이 아니시다.
우리의 교무금, 헌금, 예물, 자선금 등의 돈에 전혀 굶주리시지 않으셨다.
우리의 외적활동에도 전혀 굶주리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것들로부터 얻어지는 뭔가의 '반사이익'을 바라는 사람들이
그것들에 굶주려 있을 뿐이다.
하느님은 다만, 우리의 사랑을 원하신다. 그분의 원의를 채워드리려면 그분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분의 뜻을 따르면 '부분들(미사 등 성사생활과 외적 신앙행위)'이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 '전체가 부분을 인도'하는 것이다.
순서가 뒤바뀌면 신앙생활에 많은 힘이 든다.
올바른 순서는 신앙생활에 많은 은총과 활력을 준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신앙의 외적행위들'은
오히려 하느님을 '비참하게' 해 드릴 뿐이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신앙적 미저리(misery)'는 이제 그만 끝내야 한다.
하느님을 '미저리'하는 머저리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이사 1,13)
"율법을 듣지 않고 귀를 돌리는 자는 그 기도마저 역겹다."(잠언 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