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의 표상
성덕상씨는 백송이 꽃 전문점 사장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28년째 꽃을 제일 많이 팔아 생활의 달인, 이색 발명가, VJ특공대 등 20회 이상 방송에 소개된 인물이다.
그가 청송중학교 3학년일 때 주1회 특활시간 과학실험실에서 만년필을 주웠다.
그 때 만년필은 큰 부자나 살 수 있었다.잃어버린 아이는 가슴 아파 잠도 못잘
보물같은 물건이었다. 그런데 성덕상은 일주일후 만년필 주인(중1)을 찾아 주었다.
만년필을 다시 찾으리라 상상도 못한 아이 어머니는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성덕상은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정직한 성덕상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은 그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교문 앞에서 기다려 학생을 만나 집에 데려갔다.
뉘집 자녀인지 알고 보니 그 지역에서 제일 가난한 집 막내 아이로 끼니마저 잇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어머니는 덕상을 양아들로 삼고 고3까지 학비와 숙식을 제공해
그가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성 사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정직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다. 그의 꽃가게에는 ‘正直’이라는 휘호가 걸려 있다.
또 한 이야기는 이웃에 사시던 구상 시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구상 시인도
도쿄 유학중 배운 한 대학교수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어느 일본인이 독일 유학을 갔는데, 졸업을 하고 돌아올 무렵 함께 공부하던 외국 유학생끼리 관광여행에 나섰다. 어떤 지방에 이르러 휴게소에서 버스가 쉬는 참에 일행도 내려 잠시 서성거렸는데, 이 외국인 일행을 진기하게 여긴 그곳의 어린이들이 몰려와 에워싸고 사인을 청했다.
그 때 그 일본학자가 먼저 만년필을 꺼내 서명하고, 그 만년필을 일행에게 돌렸는데 그것이 이손 저손으로 도는 동안 그만 버스의 발차 시간이 돼서 챙기지 못하고 허둥지둥 차를 타고 출발했다. 그러자 창밖 어느 소년이 만년필을 손에 높이 쳐들고 버스를 쫓아오는 것이 보였지만, 만년필을 단념하고 여행을 계속했다. 귀국하여 그 기억마저 희미해지고 말았는데, 1년쯤 후엔가 어떤 독일 부인으로부터 뜻밖에 소포 하나를 받아 풀어보니 그 속에는 부서지고 망가진 자기의 옛 만년필에다 새 만년필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뵈옵지도 알지도 못하는 일본 박사님! 1년 전 선생님의 만년필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저희 아이는 그 다음 날부터 박사님의 주소를 찾기 위해 온 힘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때 박사님이 하신 서명을 유일한 단서로 신문에다 투고도 하고 여러 대학에 조회를 하여 마침내는 베를린 일본 대사관에다 문의를 한 것이 맞아 떨어져 박사님 주소를 알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저의 아이는 뛸 듯이 기뻐하며 만년필을 소포로 꾸려가지고선, ‘엄마, 나 우체국에 다녀올게’ 하고 나간 것이 아들의 최후였습니다. 아들은 그만 그 일에 너무나 정신이 팔려 거리를 가다 자동차에 치여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박사님의 만년필은 아들의 품속에서 이렇게 부서지고 망가졌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 망가진 것이나마 제 아들의 정성 대신 보내오며, 제가 또한 아들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새 만년필 한자루를 마련하여 동봉하오니 받아 주소서.”
이 이야기는 참 가슴이 아프지만 독일인의 진지함과 끈기에 호감을 느끼게 한다.
성덕상 사장이나 독일의 저 모자와 같은 아름다운 마음씨를 우리도 거울로 삼고
살아보시지 않으려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