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의 야경)
서시장이라는 시장 입구에 이르자 제일 먼저 반기는 장사치가 족발하고 순대를 파는 사람들이다.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시부대로(市府大路)에는 일제시대 국밥장사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8명의 독립지사 부인들의 가게가 문정성시를 이루었다고 했다. 당시 시부대로 부터 사방 1km, 조선족 백화 상점과 한성 구물 광장의 빌딩, 연변가(延邊街), 신개도가(新開道街)가 크게 붐볐으며 한성 구물광장 빌딩의 뒤편에는 조선족 의원과 서탑 시장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도 시장이 있고 조선족 병원이라 쓴 간판이 서탑 동네에 있는데 그것이 아닐까. 서탑은 적어도 일제시대 때에도 조선인들의 터임에 틀림이 없다.
순대국밥, 그 생각이 들어 순대를 사먹으면 어떨까 했는데 역관이 만류를 한다. 진한 향에 입맛에 안 맞을 것이라고 한다. 나는 더운 날씨에 상했을 것 같아 뜻을 멈췄다. 지금도 여전히 궁금증이 이는 순대다. 시장 안은 이제 막 문을 닫을 기세다. 알고 보니 이곳 또한 새벽 장을 여는 곳이다. 꼬치 재료를 만들어 음식점에 파는 도매상 같기도 하고 아무튼 먹는 재료만 취급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옳다 싶었다. 원래 정육점에 딸린 고기집이 풍성하고 맛이 있지 않은가. 더욱이 상인들이 들락거리는 음식점이라면 값도 싸고 싱싱하고 맛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초입의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아니 이곳 말고는 음식점이 없다. 우리는 그림을 보고 콕콕 찍어 음식을 시켰다. 만두에 돼지고기 볶은 것 등등,,,역시 생각대로 맛있고 값도 싸다. 우리는 저녁 때 웬만하면 이곳에 다시 오자고 했다. 실컷 먹고 마시고 지불한 금액이 135원. 특히 만두가 일품이었다. 다 먹고 길을 나섰다. 박 박사가 개별 자유시간을 갖겠다고 했다. 박물관에 갈 필요를 안 느낀다면 굳이 갈 필요가 없다. 그는 첫날 심양고궁을 보고 중가를 돌고 택시 타고 돌아오던 때 아마 앞장을 섰던 모양인데 헛방질을 쳐 망신살이 뻗쳤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때 우리 조도 헤매다가 겨우 찾아 우리를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들은 우리보다 한참 뒤에 나타났었다. 이 참에 동네를 두루 살피고 발마사지도 하고 쉬겠다고 했다. 그와 헤어져 우리는 다시 지하철 2호선을 탔다. 팻말에 부친 글로는 백탑강역이라고 하는 곳에서 내려서 길 건너 다시 괘도 전차 1호선(트램)을 타고 8정거장인가 더 가서 내려서 10분 걸으라고 되어 있었다. 우리는 하라는 대로 곳에서 내려 트램 타는 곳으로 갔다. 심양에도 이런 변두리가 있나 싶은 외진 곳이다. 어느 방향인지를 몰라 다시 물었다. 그러자 웬 아가씨가 4시까지 가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한다.
아뿔싸. 사실 내가 이곳에 온 데는 랴오닝 박물관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신라 천년의 자취소리라는 글에도 랴오닝 박물관이 나오고 고구려 9백년 자취소리에도 그 박물관 이름이 나온다. 당연 랴오닝 유역은 부여와 고구려 터전의 유물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글까지 남긴 주제에 정작 가보지도 않았다는 궁색한 입장을 이 참에 불식시키겠노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대충 이렇다. 고대 역사는 글이 따로 없는 마당 규명하기가 실로 어렵다. 많은 이론과 이견이 존재하고 난립하는 정도라 섣불리 알아보겠다고 나서다가는 혼란지경에 이르고 만다.
(심양의 아침)
내가 그러했다. 이러한 경우, 사실 확인원이라는 동사무소 서류가 있듯이 실물을 맞대면하는 것 보다 확실한 규명은 없다. 발굴현장에서 전문가들이 도록을 옆에 펼치고 열심히 대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2012년 8월 8일 , (김해=연합뉴스) 4세기 무렵 금관부여 왕릉급 대형 목곽묘(木槨墓) 2기가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굴돼 현장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었다. 그리고 그해 9월 10일 발굴성과에 대한 뉴스가 있었다. 내용인 즉 4세기 대 대형목곽묘인 88호와 91호분에서 용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금동제 유물이 나왔으며 두 무덤이 가야의 왕(급)무덤이라고 했다.
아울러 91호분은 피장자 무덤은 이미 도굴을 당하였지만 순장의 흔적과 더불어 중국 모용선비가 세운 삼연(三燕)의 금동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는데, 말방울 5점과 용문양이 새겨진 금동제의 말 장식 2점을 비롯하여 용도불명의 마구로 추정되는 각종 유물 10여점과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삼연에서 제작한 금동제 허리띠장식 4점도 발굴하였다고 했다. 선비족이 가야와 관련이 있다는 뉴스도 그렇지만 나 역시도 책자에서 본 기억도 그러해 '선비족과 가야' 의 유관성에 대해서만 줄곧 생각을 했었다. 마침 그해 10월 20일 KBS역사스페셜 프로에서 대성동 발굴에 대한 추적을 방영하였다.
출토된 북방유목민족 말 부장품들은 삼연왕조(전연,후연,북연)를 세운 모용씨와 연관이 있음을 확실히 자리매김을 할 것이라 예견 했다. 평소 가보고 싶은 선비족의 근거지라 하는 랴오닝성 문물을 볼 수 있다는 호기심이 더했다. 물론 신라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까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간 너무 혼란스러워 하나라도 먼저 정리가 되는 게 맞다 싶었다. 다큐 담당자들도 그렇게 파악을 한 것인지 선비족의 발원지이고 본거지라 할 알선동을 맨 먼저 방문한다. 역시 생각대로 박물관의 유물들은 가야의 것과 닮았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꼭 집어내기는 그렇지만 색다른 점이 있기도 하였다. 핏줄 상 사촌 정도 된다고 할까.
(금동 허리 띠. 라마동의 부여와 대성동 고분 가야)
그리고 그들은 또 다른 본거지 라마동(요령성 북표시 위치)을 찾는다. 그런데 놀랍게 시리 그들은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문형의 허리띠 장식을 그곳 박물관에서 마주하게 된다. 마치 천 육백년도 훨씬 지나 형제상봉 하듯.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라마동은 알선동과는 달리 지정학상 선비족의 영역이라 말하기가 그러하다. 나중 영토확장 과정에서 얻은 땅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라마동 출토를 지휘하였다는 톈리쿤 교수는 라마동 고분군이 부여인의 무덤이라고 주장한다. 아주 뜻밖이었다. 혼란스러워진다. 여직의 가설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라마동과 유사한 대성동 고분의 주인공 역시 부여인이란 말인가. 그는 덧붙여 선비족은 묘가 뒤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부여족은 직사각형 이라고 했다. 분명 대성동 고분 묘는 부여족의 적곽묘와 같고 직사각형이었다. 2~3세기 경 전성기를 맞은 부여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과 흑룡강성 일대인 중국 평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3세기 말부터 선비족에 밀려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4세기경 선비족의 전연이 부여를 침공하여 패망시킨 후 5만여 명이나 되는 포로를 끌고 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중국의 라오닝성 라마동 부근에 이주를 해 살게 되었고 북부여가 패망할 때 다른 부여의 왕족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한반도 남부인 지금의 김해지역에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는 추정은 이제 많은 설득력을 갖게 됐다.
나는 현장 사실 확인처럼 중요한 단서는 없다 싶다. 아무튼 대성동과 라마동 고분군의 유사성을 집중 분석하고 가야문화의 뿌리를 둘러싼 학계의 논란이 뜨거우리라 생각이 든다. 나는 이번 기회에 그 형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또한 부여를 우리나라의 선조에 끌어들이고 싶은 속마음도 있다. 주몽이 부여 출신이 아닌가. 이미 그림으로는 숫하게 본 것인데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헛걸음을 할 수 있다니. 실망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섰지만 내심 속이 상했다. 요즘 고구려나 부여 유물 들 전시물을 잘 안 보여준다는 소문도 들었는데 어차피 가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그렇게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가보자고 작정은 했다. 2원을 주고 트램을 탔다. 바르셀로나 여행 때 타보고 모처럼 타보는 트램이다. 이국적이며 산뜻해서 보기도 좋고 느낌도 가볍다. 세 량 정도 밖에 매어달지 않고 트램은 달렸다. 드디어 도착한 시각, 4시 5분이 넘었다. 박물관까지 뛰어 가도 4시 20분은 족히 될 것이다. 그나저나 공들여 크게 잘 지어놓았다. 동북공정 운운하더니 그것에 맞춘 호기가 아닌가 싶다. 그래봐야 이곳에 유물은 전부 부여와 고구려 산물들이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다 된 것은 확실하다. 여기까지 와서 헛수고라니. 입구는 이미 닫혀있다. 출구로 향했다.
사실 이보다 더 다급한 때가 있었다. 그라나다의 아람브라 궁전을 보러 갔을 때다. 예약을 안 하고 갔기 때문 걱정이었다. 나는 이른 아침 호텔을 나와 걸어갔다. 추운 겨울철인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나처럼 표를 구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더러 보였다. 겨우 표를 구하였는데 문제는 같이 간 가족하고 동료들이 오지를 않는 것이다. 나중 택시를 타고 들이닥쳤는데 문제는 입장시간을 30분 간격으로 끊어 놓아 이미 그 시간이 경과되어 있었다. 아마 사람이 일시에 몰려드는 그런 상황을 배제하기위해 그런 것 같은데 정문에서 출입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사실 스페인 여행의 백미는 바로 이 궁정 관람인데 이를 눈앞에서 놓친다면 말이 되는가. 사정 사정 하니 안내원이 손짓으로 20미터 전방에 가게를 가리킨다. 이상타하면서도 다급하니 뛰다시피 그곳으로 달려갔다. 청소를 하는 아줌마가 나를 힐끔 쳐다 보더니 또 손가락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킨다. 곳으로 가니 바로 그곳은 출구였다. 그러니까 출구로부터 거꾸로 들어가 보라는 의미였다. 지금 우리도 숨을 헐떡이며 출구로 가 섰다. 시각은 4시 15분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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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향으로 중국의 북쪽에 가로누운 산발 대흥안령(大興安嶺)은 흑룡강물을 사이두고 러시아와 마주한다. 넓고 긴 산발에 아아한 산봉이 첩첩하고 푸른 숲이 창창하여 북국의 푸른 보석으로 불리운다. 대흥안령에는 연지구(胭脂溝)와 호중(呼中) 자연보호구, 알선동(嘎仙洞), 흑룡강의 발원지, 고인류 유적, 대자양산(大子楊山) 화산유적, 십팔참(十八站) 구석기 문화유적, 항일영웅기념비, 대흥안령개발기념비 등 자연 및 인문명소들이 많다. 알선동 석실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