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이기적인 크리스천'입니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크리스천 앞에 붙이는 것이 불가능한 표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사람이 어떻게 이기적일 수 있습니까?
또 한 가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크리스천'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어리석을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 눈에 어리석어 보일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결코 어리석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이 지혜롭습니다.
예수님은 크리스천 앞에 붙일 수 없는 또 한 가지의 표현을 알려 주십니다.
'걱정하는 크리스천'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 아무 염려가 없습니까?
정말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습니까?
때때로 그런 것 같다가도 돌발적인 사태나 위기를 만나면 순식간에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지 않습니까?
“암 판정을 받은 날 깨달았습니다. 내 안에 아무 믿음이 없다는 것을요. 정말 순식간에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평생 누구보다 신앙생활을 바르게 해왔다고 스스로 믿었던 분의 고백입니다. 이 분만의 일입니까? 전도하기 어려운 사람 중에 암병원 의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종교인들보다 죽음을 더 못 받아들이는 모습에 실망했고, 특별히 목사가 더 심하거나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실망이 컸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내 안에서 염려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마치 타이어 공기가 조금씩 빠져나가듯 염려가 점점 줄어들어야 마땅합니다.
사실 신앙을 갖고 나서 경험하는 첫 변화가 바로 염려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 인생과 불가분인 것처럼 여기는 이 염려의 문제에 대해 너무나 분명한 처방을 내려 주십니다. 염려가 대체 어디서 시작되는지, 이 염려를 어떻게 내 안에서 내쫓을 수 있는지, 이 염려와 영원히 결별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___마 6:25
영혼에 붙은 껌과 같은 이 염려는 먼저 어디서부터 시작 됩니까? 살기 위해 의식주가 필요하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먹고 마셔야 살고, 입어야 삽니다. 예수님은 먼저 인간의 의식주가 아무 가치도 없다, 그건 마치 쓰레기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의식주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게 먼저가 아니고 그게 더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 입니다. 그것 때문에 걱정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것부터 따진다면 목숨이나 몸이 음식이나 옷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숨이나 몸이 그토록 중요하기 때문에 음식과 옷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라고요. 운동해야 건강하게 산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운동을 하는 사람과 알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요.
중요하기 때문에 모아야 하고 쌓아야 합니까? 모으고 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염려하기 때문이지요. 부족을 염려하는 것이고 안전을 염려하는 것이고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염려하면서 쌓는 일입니다.
인간은 에덴에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면서 먼저 에녹성을 쌓더니 창세기 11장에 이르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내 이름을 내고자 한 것이고 내가 하나님에게까지 이르겠다는 욕망 때문입니다.
불안하면 부지불식간에 쌓습니다. 불안한 사람은 담을 쌓고 길가에도 돌무더기를 쌓고 뷔페 식당에서도 음식을 쌓아서 가져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 번 먹어도 괜찮은데 왜 높이 쌓아서 들고 옵니까? 내 몫에 대한 무의식적인 염려 때문입니다.
염려하는 이유 1: 작은 믿음
예수님은 말씀하시다가 손을 들어 공중에 나는 새를 가리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___마 6:26
이 질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새만도 못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새가 누구 때문에 날아다닙니까? 누가 기릅니까? 사람과 새 중 어느 쪽이 더 귀합니까? 사람이 더 귀한데 왜 새도 하지 않는 일을 사람이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새도 의식주 걱정을 하지 않는데 왜 사람이 그 걱정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짐승도 하지 않는 걱정을 사람이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니까 걱정하지요. 짐승이 무슨 걱정을 할 줄 알며 무슨 걱정할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머뭇거리지 않고 또 물으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___마 6:27
그렇다면 염려가 무슨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옵니까? 염려는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염려할 수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기차가 앞으로 제시간에 도착할지 못할지 염려할 수 있지만 이미 도착한 기차를 염려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걱정해서 키가 크는 게 아니지요. 엄마가 걱정해서 생명이 잉태된 것이 아니고 아이가 부모의 염려 때문에 자란 것이 아니지요. 클 때가 되어서 크고 멈출 때가 되어서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겁니다. 중고등학생 때 얼마나 많이 먹고 자고 자랍니까? 그때는 부모가 걱정 안 해도 자라고 부모가 너무 큰다고 걱정해도 계속 자랍니다.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___마 6:28-29
솔로몬왕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옷과 들꽃의 아름다움을 비교하다니, 좀 지나쳐 보입니다. 사람들은 들꽃에 별 관심이 없으므로 자신과 비교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것과 사람이 디자인한 것의 차이를 보라고 하십니다.
백합화는 예수님이 살던 지역에서 흔히 피던 꽃이었습니다. 꽃은 대개 잠시 피었다가 집니다. 하루살이와 같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들꽃 하나만큼의 아름다움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 옷 때문에 왜 염려하냐는 겁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___마 6:30
예수님은 계속 들풀도 벌거벗은 채 버려두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을 헐벗게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걱정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 답을 알려 주십니다.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건 아닙니다.
아무 믿음도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것이건 믿음을 갖고 삽니다.
심지어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되고 어떤 사람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도 믿음입니다.
믿음이 크면 문제가 없습니다. 믿음이 작아서 문제입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이유에 대한 정확한 진단입니다. 상황이 나빠서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작아서 염려하는 것입니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놓고 왜 염려합니까?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아이구, 믿을 만해야지요. 그 사람 걱정을 어떻게 안 합니까?” 매일 늦게 들어오는 남편이 걱정이어서 어떤 아내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밤마다 술에 취해 들어오는데 어떻게 걱정이 안 될 수 있습니까? 더구나 몇 차례 음주운전 사고까지 냈다면 어떻게 걱정이 안 됩니까? 맞는 반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염려하지 않고 처음부터 대책을 세웠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날마다 걱정하는 대신에 일찍 귀가할 수 있는 동기부여책을 놓고 날마다 기도하고 하루 종일 골똘히 생각했다면 어땠을까요? 무슨 변화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염려하는 습관을 버리고 기도하는 습관을 길렀으면 피차 관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염려와 생각이 다르고, 생각과 기도도 다릅니다.
생각은 내가 나한테 묻고 내가 답하는 것이고,
기도는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 답을 얻는 것입니다.
의논은 사람에게 묻고 사람에게 답을 얻는 일이지만,
신앙은 성경에게 묻고 성경에서 답을 얻는 것입니다.
근원적으로 불안에서 해방되는 방법,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믿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않는 길은 두가지밖에 없습니다. 상황을 바꾸든지, 믿음을 키우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둘은 별개가 아닙니다. 상황을 바꾸는 가장 빠른 길도 사실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대응하면 반드시 상황이 바뀌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물론 염려로 대응해도 상황이 바뀝니다. 다만 더 나빠지지요. 염려는 사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염려는 눈앞에 펼쳐진 지금을 염려하는 게 아니라 이 현실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입니다.
염려는 단지 부정적인 관점으로 바라본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그렇게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된 경향성입니다. 믿음은 이 경향성이라고 하는 회로를 바꾸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바꿉니까?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의 말씀을 따라 내 생각의 회로를 바꿉니다.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로고스에서 출발 합니다. 로고스는 로직의 바탕입니다.
인간 이성의 출발은 로고스,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회로가 형성되면 문제가 없습니다. 이 회로는 일종의 OS(Operating System)와 같습니다. 컴퓨터가 아무리 사양이 좋고 성능이 좋아도 OS가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윈도우가 되었건 맥이 되었건 무엇이건 이 OS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컴퓨터 입장에서 보면 하드웨어는 아무 지각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지각과 인식과 행동은 소프트웨어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OS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소프트웨어를 깔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바이러스를 제거하든지 아니면 이 OS를 지워 버리고 새로 깔든지 해야 합니다.
염려는 OS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염려는 고장 난 믿음입니믿음 체계입니다.
염려는 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병든 사고체계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심지어 크리스천들조차도, 믿음이 작아서는 절대로 염려에서 헤어날 수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어떻게든
믿음에 붙들려야 합니다.
어떻게든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성숙인가_조정민-
<옮긴글>
[출처] 왜 염려하는가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