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1976년)
마오쩌둥은 루쉰의 소설을 굉장히 좋아했다. 마오쩌둥은 옌안(延安) 시절에 루쉰의 책을 밤새도록 읽어서 ‘마오쩌둥의 성서’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였다. 루쉰을 현대 중국의 성인이라고 평가했다.
일명 중국 최후의 유학자라 불리는 량수밍(梁漱溟, 1893년~1988년)과의 일화도 유명하다. 량수밍은 불교와 유교 양쪽을 공부하면서 향촌건설운동에 참여했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한참 먼 인사였다. 그와 연이 있던 인물 가운데서 공산당원이 있었기는 했었고, 마르크스나 레닌의 서적을 탐독하기는 했지만, 그와 성향이 멀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을 다녀오면서 마오쩌둥과 중국의 바람직한 미래를 놓고 토론을 나누었는데, 이때 양측의 입장차가 워낙에 컸기 때문에 결론이 난 게 별로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마오쩌둥은 량수밍에게 많은 영감을 받은 모양이다. 후에 야당인사로써 입지가 단단했던 인물이었다. 중공 건국 이후로 량수밍이 1953년도 중앙정부 회의 과정에서 도시 노동자의 삶은 나아졌지만 농민들의 삶은 그렇게 나아지지 않았고, 지방 간부들은 호의호식(好衣好食)한다며 공산당의 통치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가 마오쩌둥의 심기를 건드렸다. 다음날에 마오쩌둥이 량수밍을 비판하는 발언을 냈고, 이에 당원들이 량수밍의 발언에 반대하는 표결을 했다. 량수밍은 이에 추가 발언을 하려고 했는데, 이것도 표결에 붙여지면서 추가 발언이 막혔다.
이때 마오쩌둥은 의외로 량수밍의 발언을 더 듣자는 입장이었지만, 여하튼 이때를 계기로 량수밍은 뒷방 늙은이나 마찬가지인 신세로 전락했고, 특히 반우파운동으로 열심히 까이는 처지가 되었다. 문화대혁명 때 류사오치 등 한때 당 동지였던 인물들이 줄줄이 홍위병들에게 수모를 겪거나 강제로 하방 당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량수밍에게는 특별 지시를 내려서 홍위병들이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다만 부인까지 패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지 부인은 팼다고 하며 원고는 압수되었다. 받던 돈이 잠깐 깎이기는 했지만 얼마 안 가 원상복구 되었다. 량수밍은 1972년 마오쩌둥의 생일 때 선물을 보내주자 마오쩌둥이 이때 미칠 듯이 기뻐했다고 하며, 량수밍도 나중에 마오쩌둥과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의견이나 사상이 맞지 않았지만 마오쩌둥이 그립기도 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마오주의(마오이즘)라고 불리는 마오쩌둥식 사회주의. 도시의 노동자들이 아닌 농촌의 농민들을 혁명의 기반으로 파악한 마오쩌둥 특유의 사상이다. 일명 농민들의 맑시즘으로 불리는 사상으로, 한때는 제3세계의 혁명가들에게 “빛나는 길”을 열어주었다. 68혁명 시기에는 서구에서도 급진적 무장투쟁 조직인 바더 마인호프가 마오이즘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사회주의 세력의 전반적인 퇴조, 특히 본토에서의 탄압 때문에 거의 듣지도 본적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마오쩌둥 사상은 스스로는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을 토대로 했다고 하나, 객관적인 현실보다는 주관적인 의지를 강조했기 때문에 사실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극도로 혐오(嫌惡)해 마지않는 관념론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또한 마르크스주의보다는 중국의 전통 사상에 훨씬 더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중국 철학에서 대가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 그 대가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되고 있다. 철학사적 면만 따져도 마오쩌둥은 주요인물에 들 만한 인물이다. 중국 현대철학 교과서에는 꼭 마오쩌둥의 실천이론이 풍유란(馮友蘭, 1894년~1990년)과 웅십력(熊十力, 1884년~1968년)과 함께 언급된다.
또한 마오주의는 아나키즘(Anarchism) 사상가인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애초부터 모택동이 공산당에 가담하기 전에 크게 영향 받은 것도 아나키즘이었고, 그 당시만 해도 “나는 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훗날 대약진운동 시대에 만든 인민공사 같은 제도는 아나코 콜렉티비즘(무정부 집산주의)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북한의 주체사상은 마오쩌둥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북한 스스로는 부정하지만 인간중심, 수령론 같은 것은 마오주의와 판박이다.
마오쩌둥의 사회주의는 소련식의 마르크스주의인 레닌주의(사실은 스탈린주의)와는 좀 다르다. 이는 당시 중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혁명 당시 러시아국는 농업 국가이기는 했어도 도시에는 충분한 수의 노동 계급이 형성되어 있었고, 정부기관이 도시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도시노동자만 잘 조직해도 혁명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래서 레닌주의에서는 도시의 노동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보았다.
중국은 러시아보다도 훨씬 뒤쳐진 농업 국가였고, 노동자와 도시화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적용해서 사회주의 혁명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실제로 1차 국공합작이 붕괴된 후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중국 공산당의 당권을 잡고 소련식의 전략을 차용했다가 모두 망하고 만다. 이렇게 되어 마오쩌둥에게 자연스럽게 당권이 돌아왔다. 반면에 마오쩌둥은 소련의 혁명이론 대신 중국 고유의 농민반란의 역사에 주목하여 농민을 사회주의혁명의 주체로 삼는 전략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도시의 직접봉기 대신에 농촌에서 세력을 넓혀서 도시를 포위하는 전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전략은 전근대적 사회에 매우 효과적이었고, 한동안 여러 제3세계의 혁명가들이 차용하여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마오쩌둥은 이런 마르크스-레닌-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교조주의(敎條主義)를 “(비료로 쓸 수 있는) 똥보다도 못하다”고 경멸했다. 이런 점 때문에 마오쩌둥은 서구의 사상을 도입한 인물이 아니라 멀리는 한고조 유방부터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에 이르기까지, 중국사에서 난세마다 등장하는 농민반란군의 전통을 잇는 인물로 볼 수 있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을 부추겨 중국의 전통을 모조리 박살내려고 했던 것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렇게 마오쩌둥의 이론은 소련식의 사회주의와는 영 별개의 것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국공내전의 말기까지도 신뢰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제스에게 엄청난 원조를 해주기도 했다. 소련측은 마오쩌둥을 “마가린(가짜) 사회주의자”로 공공연히 무시했는데, 결국 이것은 후에 중소결렬(中蘇決裂)과 중국-소련 국경분쟁(中蘇國境紛爭)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숙적 장제스와 더불어 군사적 사고를 가졌던 걸로 알려져 있다. 차이점이라면 장제스는 제대로 된 군관학교에서 수학했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정형화된 사관학교 장교 출신이라면, 마오쩌둥은 비록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게릴라, 빨치산(Partisan) 활동을 통한 실전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만든 전략가라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군사이론은 중국의 고대 병법과 클라우제비츠(Carl Phillip Gottlieb von Clausewitz, 1780년~1831년)의 《전쟁론(戰爭論)》을 결합한 독특한 것이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중심의 유린”을 중시했지만, 마오쩌둥은 일단 자신의 역량이 뒤쳐질 때는 중심보다는 주변부를 장악하면서 중심을 포위하여 고립시킨 후, 적의 역량이 감소하고 자신의 역량이 우월해졌을 때 적의 중심을 쳐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전술 레벨에서든지 전략 레벨에서든지 자신의 역량이 뒤쳐질 때는 적의 주력과 대결하는 것은 피했고, 결정적 순간에 압도적인 병력을 집중시켜 적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마오쩌둥의 군사 이론은 혁명이론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마오는 게릴라와 농민의 관계를 물고기와 물의 관계, 수어지교(水魚之交)라고 했다. 젊은 시절 삼국지연의를 거의 강박증에 가깝게 탐독했다고 한다. 그리고 1962년 중국-인도 국경분쟁(중인전쟁) 때도, 당나라와 원나라 시절 “1.5번”(약탈을 0.5번의 전쟁으로 간주) 전쟁을 치른 양국 간의 관계를 고려해, 양국이 영원히 적대관계에 처할 숙명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을 만큼, 역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던 것이다. 즉 게릴라는 농민의 지지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디쾨터(Frank Dikötter, 1961년~ )처럼 중공체제에 비판적이고 장제스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이것이 윤색된 신화라고 주장한다.
하여튼 이러한 이론 때문에 기계화보다는 보병의 과감한 기동력과 수적 우위를 중시했고, 무기의 성능보다는 인간의 의지와 민중의 각성을 더욱 강조했다. 소련이나 미국과 같은 침략자가 중국에 쳐들어오면 중일전쟁처럼 대규모의 게릴라전을 펼쳐 적을 “인민의 바다”에 빠뜨려 수장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유격전술을 마오쩌둥은 “인민전쟁”이라 불렀다.
어쨌거나 게릴라와 보병중심의 기동을 중시하는 이러한 전술은 복잡한 상층구조를 갖춘 현대 국가를 엎어버리는 혁명군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유용했지만, 거대한 현대국가를 운용하는 단계에서는 당연히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건국 후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있던 때에 건설된 것을 모두 포기하고 인민전쟁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문적으로 소련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고, 6.25 전쟁에서 중공군을 지휘하여 미국의 힘을 겪어본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이런 마오쩌둥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 1950년대 말 펑더화이는 이제 “우리도 미국이나 소련처럼 프로페셔널한 장교단이 지휘하고 첨단무기로 무장한 인민해방군을 건설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오쩌둥의 군사이론과는 모순되는 것이었고, 결국 이것은 펑더화이 실각의 한 이유가 된다. 마치 1930년대 소련에서 당료들과 투하쳅스키의 충돌이 그의 숙청으로 이어진 것과 비슷하다. 마오쩌둥은 다른 혁명국가들이었다면 초기에 숙청당했어야 할 매우 강성한 극좌파계(極左派系) 속한 혁명론자(革命論者) 였고, 부르주아적인 안정화에 대해 반대하며 외교를 제외하고는 정치, 경제, 군사를 모두 이상적혁명이론에 따라 운용하였다. 인민의 무제한적 동원이 기술과 자본을 능가할 것이라 믿었던 대약진운동이나, 일부 반동 주자파만 때려죽이면 나머지 인민들이 올바른 프롤레타리아 신문화를 설립할 것이라고 믿었던 문화대혁명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실무진 입장에서 과격한 혁명이론에 반대해서 여러 차례 마오쩌둥과 충돌을 빚었던 펑더화이의 숙청은 마오쩌둥이 살아있는 한 예고된 일이었다.
어쨌든 마오쩌둥의 군사이론은 정치이론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유용하게 연구되는 분야이다. 이것은 경영전략에서도 꼭 한 번쯤은 이야기된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월마트나 애플이 바로 마오쩌둥 이론을 경영면에서 제대로 응용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농촌중심의 혁명전략을 내세운 그의 사상은 아직도 많은 추종자를 이끌고 있다. 2012년 현재에도 마오주의자를 자처하는 게릴라가 남미와 같은 저개발 국가에서 활약하고 있고, 특히 네팔에서는 이들이 게릴라전을 벌여 결국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우는 데 일조했으니. 참고로 중국에서는 이들의 적인 네팔의 왕정을 지원했기 때문에 이들을 마오주의자라고 보도하지 않고 ‘비적(匪賊, Bandit)’이라고 보도했다는 웃지 못 할 사례가 있다. ‘비적’은 국민당이 공산당을 부를 때 쓰던 말이다.
인도에서도 마오주의자들이 정부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 전근대적인 질곡(桎梏)이 워낙 심하여 가난하고 지주세력의 힘이 세기 때문에 마오주의자들의 선전선동이 잘 먹혀 들어가고 세력이 크다. 매번 경찰들이 마오주의자들과 교전하다 죽었단 뉴스가 왕왕 나올 정도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오지로 관광 갔다가 마오이스트들에게 피랍당한 적도 있다.
그러나 목표를 이루려면 도시로 진입을 해서 선동을 하고 그네들이 말하는 소위 혁명을 일으켜야 되는데, 도시에 진입할 능력도 역량도 없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감싸주던 인도 공산당, 인도 마르크스주의 공산당 같은 좌파 세력들도 마오주의자들이 사상이 다르다고 자기네들까지 싸워대었다. 원수지간으로 돌아서고 아예 정부랑 편 들고 같이 싸우고 있다. 인도의 좌파 세력들은 현 체제를 인정하는 상황에서 교육과 복지, 언론을 통해서 농민/노동자 계급을 조직한다는 전략을 오래 전에 채택하였다. 사실상 서구의 중도좌파 정당들과 유사하게 변해서 지방정부를 수십 년째 장악하고 있는 곳도 있을 정도이다 보니 툭하면 무장봉기를 외치는 마오주의자들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인도의 마오주의자들은 인도 내에서는 완전히 불온 단체로 찍힌 상태다.
위 항목에 나온 것처럼 마오쩌둥주의와 여러 다른 공산당 분파들의 사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옥신각신 싸워댄다. 다른 분파들은 일단 농민들을 교육시키고 도움을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데, 마오주의자들이 자꾸 총으로 혁명을 일으키자고 설쳐대니 공산주의자들도 자기들 계획에 걸리적거리니까 눈엣가시로 본다. 그 예로 공산당이 힘이 있는 데에서는 마오이스트들이 힘을 못 쓴다. 그래서 마오주의자들이 공산당 당사를 습격해서 당원들을 살해하거나 서로 교전하는 일이 잦다. 실제로 농민과 정부와의 토지 문제로 농민들을 공산당과 마오주의자들이 번갈아 만나본 적이 있는데, 공산당은 일단 도와줄 테니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해결하자고 하고, 마오주의자들은 총기를 줄 테니 싸우자고 했는데 농민들이 마오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나중에 경찰이 와서 마을 주민들을 전부 쓸어버렸다고 한다.
마오주의자들이 인도 오지 전역에 넓게 산개해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형편이라, 정부도 마오주의자들을 억제는 할 수 있지만 완전히 쓸어버리는 것은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마오이스트 입장에서 봐도 경찰도 버거운 상대이다.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인도정부는 경찰로 충분하다고 보고 군대를 안 보내고 있다. 정확히는 카슈미르 지역이 영토분쟁 지역이라 군대를 보냈다가는 외교적으로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고, 도시민이 선동될 가능성은 없다. 결국 오지에서 교전하거나 도시에서 테러를 저지르는 것밖에 없는데, 그러다 민심은 점점 멀어지고 목표하는 건 이루지도 못하고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에 놓일게 뻔했다.
마오쩌둥은 시인과 문필가로 유명하다. 이 점에서 조조와 정말 비슷하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조조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치하에서 조조가 재평가되기도 했다. 전술했다시피 사서로 일한 적도 있고, 독서를 엄청나게 한 걸로도 유명하며, 게릴라 시절에도 공작원이 신간을 구해오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관련 서적보다는 중국의 여러 고전 역사책을 탐독했으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과거의 예를 찾아 어떻게 할 것인지 연구했다고 한다. 다독(多讀)과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우는 것은 많은 성공한 지도자들의 공통적인 습관이기도 했고, 마오쩌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오쩌둥식 사회주의는 원산지인 소련의 사회주의와 심각한 차이가 있었고,
또 그랬기에 중국식 사회주의가 그럭저럭이라도 돌아갈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자치통감을 17차례나 보고 연구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서 차라리 혁명가가 되지 않았으면 그냥 유명한 인문학자나 고전문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그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문장을 만드는 데 매우 능했다. 번역된 문구로는 잘 알 수 없지만, 원문을 보면 중국 특유의 댓구를 잘 이용한 인상적인 문장이 많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枪杆子里面出政权)
“가장 높은 곳에 뜻을 두어라.”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나날이 발전한다.”
“전쟁은 전쟁을 통해서만 종식될 수 있다. 총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총을 드는 수밖에 없다.”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는다. 만약 남이 나를 범하면 나도 반드시 남을 범한다.”
“당대의 인물이 바로 역사의 주인이다.”
“독서하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적용한다는 것 또한 배우는 것이며, 보다 중요한 배움이라 할 수 있다.”
“말만 늘어놓지 말고, 실천가가 되어라.”
“작은 불씨는 들판을 불사르고, 큰 불씨는 물에 기세를 그친다.”
“스스로 노동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하라.”
“인민, 오직 인민만이 세계 역사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다른 번역으로는 “인민, 인민이야말로 역사의 발전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힘이다.”
“모든 반동파들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원문은 1946년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미국 기자는 정말 미국이 종이호랑이로 보이냐고 하니까 “처음에는 진짜 호랑이겠지만 결국 인민들이 미 제국주의를 약화시킬 것이고 궁극적으로 그들은 종이호랑이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것은 단지 만리장성을 완주하는 첫 걸음일 뿐이다!”
“하늘은 곧 비가 오려 하고, 어머니는 시집을 가려고 한다. 그렇게 하게 해라!”
린뱌오가 소련으로 도망친다는 보고를 듣고 나서 한 말. 비와 과부가 된 어머니의 시집은 막을 수 없다는 의미. 김태호 총리서리가 총리 인준을 포기하면서 남긴 글이기도 하다.
“결심을 했으면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이기는데 집중해라.”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평등하지만, 사람마다 능력이나 인격의 우열이 있으니 자기보다 나은 자를 따라야 질서가 잡히는 것이다.”
“인민을 위하여 일을 하라.”
온갖 꽃이 함께 피고 온갖 새가 울어재낀다.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편다. 위에서 봤듯이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선언 이후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에 돌입했다. 물론 마오쩌둥 자체가 당시의 지식인층들의 불만을 과소평가하고 여유 있게 사상의 자유정책을 취했다가 호되게 데인 감도 있지만. 여하간 계획대로든 아니든 숙청당한 비판적 지식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낚시 그 자체였을 것이다.
“자기만족은 학문의 적이다. 우리가 자기만족을 면하기 전에는, 우리는 실제로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정녕 할 수 없는 일은 억지로 하려고 들지 마라.”
“정치가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인 반면에 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이다.
클라우제비츠도 비슷한 말을 했다.
“법칙의 성격을 띠고 있는 모든 군법과 군사 이론들은 전(前) 시대나 우리자신의 시대에 산 사람들이 축적한 전쟁체험의 총화이다. 우리는 피의 대가로 얻은 교훈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그 교훈은 과거 여러 전쟁의 유산이다. 그것을 연구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중략) 우리는 그런 유산들을 우리자신의 체험이라는 시험대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래서 유용한 것은 소화시키고, 무용한 것은 버리며, 우리자신의 고유한 체험은 덧붙여야 한다. 그 세 가지는 몹시 중요한데,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전쟁을 지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일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살았을 때 비판받지 않은 자, 죽어서 비판받기 마련이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진지함이다.”
“실수와 좌절을 겪고 지혜를 얻는다.”
“인간은 죽기 마련인데, 그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거나 깃털보다 가볍다.”
사기 태사공자서에서 가져온 말로, 항일전쟁 도중 숯을 굽다가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말이다. 그런데 아편을 굽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빛나는 날로 나아가는 길은 굽이굽이 사연도 많다.”
페루의 마오이즘 반군조직 센데로 루미노소, 즉, ‘빛나는 길’의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
“힘든 일은 눈앞에 놓인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든 움켜쥐고 내 것으로 만들어라.”
“분열하지 말고 단결하라.”
“세상에는 이유 없는 사랑 없고, 이유 없는 미움 없다.”
“아무리 많은 공을 세웠더라도 절대 교만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정과 냉정, 긴장감과 원칙이다.”
“사상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바뀌고 적응해야 한다.”
“한 번 실수는 실수지만, 두 번 실수는 음모다.”
“제대로 가려면 멀리 보라.”
“한 번 더 생각하라. 고민하고 예측할수록 지혜가 나온다.”
“혁명(革命)은 만찬(晩餐)도, 수필(隨筆)도, 그림도, 한 폭의 자수(刺繡)도 아니다. 그것은 조용히, 서서히, 조심스럽게 앞뒤를 가리며 점잖게 순순히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
“월살인취월요혁명(越殺人就越要革命)”을 오역하여 나온 말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살해된 사람들의 수가 많을수록 혁명에 대한 소망은 더 커진다.” 정도가 적절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논지로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일본제국주의가 중국공산혁명에 큰 공로를 세웠다고 한 적도 있다. 1945년 6월에 “사실시반동파살인월다,혁명적력량취월대(事實是反動派殺人越多,革命的力量就越大)” 등으로 발언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중국어를 잘못 이해해서 의도치 않게 오역하는 경우가 꽤 있다. 장제스 몬순 발언, 저우언라이 프랑스혁명 발언 등이 이러한 오해로 알려져 있다. 마오쩌둥도 오역이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해석 사례가 많으며, 이 정도 수준이 아닌 이상, 보통은 의도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행운에 기대고, 남의 도움으로 이기려는 마음을 버려라.”
“참새는 해로운 새이다.” 마작시해조(麻雀是害鳥)
많이 알려진 “저 새는 해로운 새다”는 만화 창천항로(蒼天航路, 넓고 넓은 푸른 하늘에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간다)의 대사이다.
“맹목적으로 소련을 따를 수는 없소. 방귀를 뀌면 냄새가 나는 법인데, 소련이 뀌는 방귀가 모두 향기롭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소?”
“동지들! 여러분은 각자 책임을 철저히 분석해야 할 것이오. 똥을 누고 싶다면 누시오! 방귀를 뀌고 싶다면 뀌시오! 그러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것이오.”
“먹은 다음에 X을 눠야 한다는 것 때문에 먹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오!”
“문예는 국가에 봉사해야 하며, 문예는 중국 공산당이 지도하는 혁명의 대의에 입지해야 한다! 모든 예술과 표현은 낙관적이여야 하며 당에 대한 어떠한 비판 / 폭로 / 비난도 엄격히 금한다!”
“책을 너무 많이 읽는 것은 해롭다.”
“부농들만 보아도, 자본주의의 심각한 문제를 알 수 있다.”
“공산주의는 사랑이 아니다. 적을 부수는 망치다.”
“일제의 침략은 중국 공산당에 큰 이익이 됐고, 중국 인민에게 권리를 되찾아줬다. 일제 황군의 힘이 없었다면 공산당이 집권하지 못했을 것이다.”
1964년 사사키 고조 일본 사회당 의원이 중국을 찾았을 때 한 말이다.
“중일의 싸움은 본당 발전의 절호의 기회이며 우리 공산당의 기본 정책은 전력의 70%를 자기세력 확대에, 20%를 국민정부와의 대응에, 나머지 10% 항일에 사용한다.”
“중공은 일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일본의 대륙 침략이 없었다면 우리는 국공 합작이 있을 수 없고, 우리는 발전할 수 없고 최후 승리를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면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데, 내가 보건대 일본의 침략이 없었던들 우리가 어찌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일본에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