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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애국지사
남도 제일의 의병장 심남일(沈南一) 홍영기(순천대학교 인문학부 사학전공 교수)
1. 서당 훈장이 의병을 일으키다
초야의 서생이 갑옷을 떨쳐입고 말을 타고 남도를 바람처럼 달리리 만약에 왜놈을 소탕하지 못한다면 맹세코 모래밭에 죽어 돌아오지 않으리.
전라도 함평 땅의 자그마한 서당에서 훈장을 하고 있던 심수택(沈守澤). 위의 시는 그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이 기승을 부리던 1907년 말 사랑하는 가족과 어린 학동들을 뒤로 한 채 의병으로 나서면서 지은 것이다. 그의 결연한 맹세처럼 그는 고향 땅에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심수택, 아니 심남일(沈南一)로 더 잘 알려진 그는 누구인가. 심남일(1871~1910)의 자(字)는 덕홍(德弘)이며 본관은 청송이다. 그가 의병을 일으킬 당시 전남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의미로 스스로 남일(南一)이라 이름했는데,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다. 그래서인지 그가 이끄는 의병부대인 호남의소(湖南義所)는 흔히 “남일파(南一派)”로 불려졌으며, 그 역시 심남일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는 현재의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신기에서 심의봉(沈宜奉)과 진주강씨(晉州姜氏) 사이의 세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벼슬이 끊긴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히면서 성장하였다. 그후 그는 평택임씨(平澤林氏)와 혼인하여 두 아들과 세 딸을 둔 평범한 가장이었다.
이러한 그에 대하여 일본측 기록에서도 “일찍이 훈장(訓長)이 되었던 일이 있음. 다소 학식있음”이라고 되어 있다. 물론 그는 관직에 나아간 적이 없었으며, 그의 향리인 함평향교의 교임(校任)을 맡아 활동하는 정도였다. 그는 어느 정도 학식을 갖추고서 서당 훈장으로 활동하던 시골 선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의감이 매우 강했던 것 같다.
심씨는 전라남도 함평군 사람이라. 그 천성골격이 옥과 같으며 세상에 드문 대장부로 재주가 출중하며 손오병서와 중국 고대의 협객전을 많이 읽은 고로 그 위의와 명망이 표표(대한매일신보 1909년 10월 16일자 잡보 : 현대문으로 고침) 즉, 그는 천성과 골격이 옥과 같은 대장부로서 재주가 출중한데다 손오(孫吳)의 병서(兵書)와 중국 고대의 협객전(俠客傳)을 많이 읽어서 위엄과 신망이 높았다는 것이다.
을사늑약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하자 그는 의병을 일으킬 궁리에 골몰하였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위태로운 국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질 각오였다. 특히 을사늑약 이후 풍전등화의 위급한 상황과 을사오적의 농간에 분개하여 장차 의병을 일으켜 국권을 되찾을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그는 자력으로 의병을 일으킬만한 처지가 못되었다. 명망이 높은 유학자도 아니었으며, 재력이 탄탄한 부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그는 1907년 후반 전남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가담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의 주도로 선봉장 김태원(金泰元)‧김율(金聿) 형제 등이 약 4-5백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이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일제 군경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귀순을 권유하는 귀순정책과 아울러 강력한 군사작전을 수시로 전개하여 이들을 압박하였다. 결국 1908년 2월에 의병장 기삼연이 체포‧총살되었고, 그해 3월에는 김율이 체포되었으며, 이어 4월에는 김태원마저 전사하고 말았다. 이처럼 호남창의회맹소가 거의 와해지경에 처했으나 그는 굳건한 항일의지로 의병을 다시 불러모아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서당 훈장에서 의병장으로 탈바꿈한 순간이었다.
2. 독자적인 의병부대 “남일파”를 결성하다
전국의 동포들은 다같이 풍파를 만난 배를 탄 신세입니다. 그런즉 앉아서 고래 떼처럼 악독한 왜놈들에게 잡혀 먹히기 전에 서로 분발하여 의병을 일으켜 그들을 쳐부순다면 우리 강토를 회복하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는 일은 오늘의 거사에 달려 있습니다. (중략) 엎드려 바라건대 조정의 벼슬아치나 산림의 숨은 인재들은 저더러 그러한 자격이 못된다고 하지 말고 각자 의분심을 일으켜 함께 큰 일을 치루어 나간다면 천하 만국이 또한 반드시 우리를 호응하게 될 것입니다(심남일, 「격고문」). 1908년 봄을 지나면서 기삼연과 김태원 김율 등의 의병장이 잇달아 순국하자, 그는 위의 격문을 사방에 보내어 흩어진 의병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아울러 그는 토왜(土倭), 즉 친일파들에게도 지난날을 회개하고 의병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으며, 향교에도 통문을 보내어 서로 호응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각 고을의 면장과 세금영수원, 이장들에게도 일제에 협조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독자적인 의병부대의 출범을 사방에 알리는 한편, 의병부대의 주요 부서를 정하였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주요 부서와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의병장 심남일 선봉장 강무경 장인초 중군장 안찬재 박사화 후군장 노병우 나성화 최우평 도통장 김도숙 통장 공진숙 군량장 이세창 호군장 강달주 정관오 기군장 이덕삼 김치홍 서기겸모사 염원숙 도포 장경선 선도명 모사 권택
심남일 의병부대의 부서 조직은 선봉-중군-후군, 즉 전통적인 군제인 삼군체제(三軍體制)를 근간으로 운용되었다. 특히 선봉장 강무경(姜武景)은 부장(副將)의 임무를 맡았는데, 이는 의병장 심남일과 선봉장 강무경이 서로 의형제를 맺은 특별한 관계였기 때문일 것이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주요 구성원들은 어떤 특징을 지녔을까. 이미 의병장 심남일의 행적은 살펴본 바와 같다. 선봉장 강무경은 필묵상(筆墨商)이었는데, 서당 훈장과 필묵상이 의기투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리고 강무경의 뒤를 이어 선봉장으로 활동한 장인초(張仁初)의 직업은 목수였으며, 모사 권택은 최익현의 문하에서 한때 수학한 적이 있는 유생이었다. 또한 중군장 안찬재(安贊在)도 유생이었다. 하지만 심남일 의병부대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의병 병사층은 대개 농민이거나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다시 말해 심남일 의병부대는 다소의 학식을 갖춘 유생과 농민 및 상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대다수의 의병 병사층은 가난한 평민출신으로 보인다.
의진(義陣)의 편제와 직책이 확정되자 의병장 심남일은 의병들이 지켜야 할 10개 조항을 고시하였다. 다소 길지만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1. 좌우익과 선봉은 의병장이 통솔하고, 중군 · 후군은 선봉이 거느리며, 호군(護軍) · 기군(起軍)은 중군이 거느리고, 포사 기사 보졸 서사(砲卒 騎士 步卒 庶士)는 기군이 통제한다. 포졸 기사 보졸 서사는 10사람으로 각기 오(伍)를 삼아 역시 통장(統長)을 둔다. 지휘 과정에서 만약 군율을 위반한 자가 있으면 통장이 다스리고, 통장이 과실이 있으며 통장을 통솔하는 자가 다스린다. 2. 의(義)로서 이름한 이상 의병이 지나가는 곳에서 만약 무뢰의 행위가 있거나 혹은 몽둥이로 촌민을 때리거나, 민가의 안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자는 난군이니 죄의 경중에 따라 처단한다. 3. 지나가는 마을에서 만약 재물이나 곡식을 빼앗는 자가 있으면 이는 적군이니 참형에 처한다. 4. 혹 부녀자를 겁탈하거나 또는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자가 있으면 이는 역군(逆軍)이니 용서없이 처단한다. 5. 혹시 소나 말을 약탈하거나 닭이나 개를 함부로 죽이는 일이 있으면 이는 도군(盜軍)이니 경중에 따라 처벌한다. 6. 혹 의소(義所)의 지시라 칭하고 가짜 인장을 거짓 날인하여 민간에 토색하는 일이 있으면 이는 포군(逋軍)이니, 마을에서 자세히 조사하여 잡아 올리면 의소에서 참형에 처한다. 7. 읍이나 부중을 지날 때에 혹시 창고 자물쇠를 임의로 부수거나, 관가의 물건을 빼앗는 일이 있으면 국가에서 정한 형벌이 있으니 관에 보고하여 처벌한다. 8. 지나가는 곳곳의 전답에 심어진 곡물을 보호하여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다닐 것이며, 만약 함부로 밟는 자가 있으면 죄를 준다. 9. 복병시에는 포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방포하여야 하며, 만약 머뭇거리다가 발포하지 않은 것도 죄이다. 10. 호군장(犒軍將)이 징을 치면 일제히 모여 함께 밥을 먹어야 하며, 앞당겨 오는 자와 뒤에 떨어져 오는 자도 모두 죄에 해당된다. 이상의 규정을 일일이 시행한다. 이에 만약 등한시하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각각 통솔자에게 책임을 묻는다(심남일실기, ‘고시군중문’).
즉, 제1조에서는 의병의 지휘체계와 군율을 어긴 자에 대한 책임 소재를 밝혀 놓았다. 제2~6‧8조에서는 의병들이 일으킬 수 있는 각종 민폐(民弊)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다음 그것을 어기면 처벌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이들이 특히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에 역점을 두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7조는 국가재산의 보호에 관한 것이고, 제9조는 전투시 지켜야 할 사항이며, 마지막으로 제10조는 의병의 식사시간의 준수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위의 인용문에 나타나 있듯이, 의병장 심남일은 주민의 보호를 크게 강조하고 있는데, 이들의 안민의식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러한 잠은 의병활동 기간에도 누누이 강조되었다.
원컨대 제군들은 특히 백성을 무마하는데 힘써야 한다. 부디 토지와 재물을 빼앗지 말고, 겁략하지 말 것이며, 무고한 사람들을 때리지 말라. 그리고 경솔하게 군사를 발동하지 말고, 적을 가소롭게 보지 말라.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집안 사람을 맞이하듯 반갑게 서로 대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실망을 주지 말라(심남일실기, ‘능주돌정접전’).
의병장 심남일이 안민적 의병활동을 크게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민폐를 끼치거나 군율을 어긴 자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히 다스렸다. 일제측 기록에서도 심남일은 부하의 비행을 엄격히 다스리고, 재물의 강탈을 금지시킨 의병장으로 높이 평가함으로써 이른바 그가 결성한 “남일파”는 더욱 이름을 떨쳤다.
3. “남일파”,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이제 독자적인 의병부대로 출범한 “남일파”의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은 일본의 국권 강탈과 경제적 침탈, 단발 강요, 일본인관리의 임명, 군대해산과 황제양위 등에 대하여 매우 강력히 반발하였다. 다시 말해서 “남일파”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저지하여 국권을 회복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이들의 의병활동을 몇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친일세력을 제거하는 활동이다. 1908년 4월 심남일은 호남의소의 이름으로 통문을 게시하였는데, 군수‧세무관 그리고 각 면의 공전영수원들이 거두는 세금이 일본군의 군사비에 충당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일을 계속한다면 왜적과 같은 세력으로 간주하겠다고 천명하였다. 그는 주민의 납세거부투쟁을 유도하였으며, 아울러 일진회원들로 구성된 자위단과 한인 헌병보조원들도 일본세력과 함께 제거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이 가운데에서도 이들은 특히 납세거부투쟁에 중점을 두었다. 그것은 각종 세금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보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병활동의 재원 마련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던 심남일 의병부대에 대하여 당시의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의병소식 일인의 탐보를 거한즉 영산포 등지에는 의병장 심남일 전해산씨 등이 횡행하는 지방이라 그 당류가 2백명 이상에 달하였고 때때로 백성에게 대하여 방곡을 하며 또 세납을 바치지 말라는 격서를 돌리며 또 때때로 동포가 서로 죽이는 것이 불가하다고 효유하며 또 한인 관리에게도 글을 보내어 의병의 세력을 확장하게 하기를 힘쓰라 하는데 목하 의병 중에 가장 굉장한 세력을 얻은 자는 남일 해산 두 파라 하였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13일자 잡보).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심남일 의병부대의 규모가 약 200명 정도로, 이들의 활동방향은 미곡의 일본유출 금지‧납세거부‧친일세력에 대한 경고‧한국인 관리의 호응을 호소하는 내용 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이들은 의병을 빙자한 도적을 퇴치하고자 하였다. 심남일은 잡배들이 약간의 무리를 지어 의병이라 칭하고서 민재를 강탈하면 의소에 곧바로 알리거나 잡아 보낼 것을 촉구하였다. 즉, 이른바 ‘가의(假義)’의 준동을 크게 우려하여 주민의 재산을 보호하려는 심남일 의병부대의 의도를 헤아릴 수 있다. 이로써 이들은 주민들로부터 한층 신뢰받을 수 있는 의병부대로 인식되었으리라 믿어진다.
세째로 반일투쟁활동, 즉 일본세력을 구축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나주 함평 영암 보성 장흥 강진 해남군 등지를 무대로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8~9년 사이에 전라남도 나주와 강진을 축으로 하는 전라남도의 중남부 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성장하였다. 남일파는 1908년 음력 3월 강진 오치동(五治洞)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노구두(老狗頭), 함평 석문산(石門山), 능주 석정(石亭), 남평 거성동(巨聲洞), 보성 천동(泉洞), 1909년 음력 7월 장흥 봉무동(鳳舞洞) 전투에 이르기 까지 수십 회에 걸쳐서 일본군경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과정에서 그가 가장 강조한 바는 주민 보호, 군율의 확립, 약탈금지, 농작물 피해방지 등이었다. 요컨대, 남일파는 의병으로서 엄격한 군율을 유지하며 주민보호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반일투쟁에 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병을 좋아하지 않을 주민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주민들도 이들을 기꺼이 도와주고 숨겨주었다.
그런데 이들의 군사작전은 매우 정교하게 이루어졌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1909년) 음력 4월 2일 장흥 우산에 주둔하였다. 이때 능주 헌병 20여 명이 매달 다섯차례씩 장흥을 통과하므로 그들이 지나갈 때를 맞추어 내외 생사문(生死門)을 가설하되, 구성(九星)에 응하고 또 8문(門)의 법을 택하였다. 선봉장 강현수는 병졸 20명을 거느리고 두문방(杜門方)에 매복하고 모사 염원숙은 날랜 군사 20명을 거느리고 생문방(生門方)에 매복하고 후군장 노병우는 화포군 2명을 거느리고 휴문방(休門方)에 매복하였다. 오후 2시경 적병 15명이 북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곧장 충돌해오니 각 방의 복병이 일제히 포를 터뜨려 적 8명이 즉사하고 나머지는 도망하였다(심남일실기, ‘보성 웅치접전’).
위와 같이 심남일은 전통적인 군사지식을 활용하여 유리한 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심남일 의병부대가 일본 군경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거두자, “심남일은 용마를 타고 산 밖으로 뛰쳐나가고 강현수는 풍운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갔다”는 동요가 생겨날 정도였다. 이들의 본격적인 반일투쟁은 1908년 음력 3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심남일은 각 의진 간의 연합작전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의진 간의 연합을 주장하였는데, 전남 동부지역에서 활동하는 안규홍 의진, 서부지역의 전해산 의진과도 연합투쟁에 대하여 자주 논의하였다. 그가 여러 의진과의 연합을 중시한 까닭은 일본군경의 강력한 진압작전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는 의도였다.
더욱이 심남일은 전남의 중부지역에서 활동한 관계로 연합의진의 결성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전남의 동부와 서부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장들을 두루 접촉하여 하나의 연합체인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을 결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11개 의병부대로 조직된 호남동의단의 맹주에는 의병장 전해산을 추대하고 자신은 제1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전해산 의진과 안규홍 의진과 긴밀하게 협조하며 항일투쟁을 선도함으로써 이들은 호남지역의 3대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처럼 전라남도의 중남부지역을 근거삼아 의진간의 연합전선을 주도하며 반일투쟁을 전개하는 심남일의 존재는 일본군에게 눈엣가시와 같았다. 일제는 1908년 후반부터 심남일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먼저 1908년 10월에 영산포헌병분대의 후원으로 일진회원들로 구성된 정찰대가 발족시켜 의병진압을 목적으로 한 정찰을 실시하였다. 또한 그 해 12월 15일에는 영산포헌병분대장의 지휘아래 8개 부대가, 광주수비대에서는 3개 부대가 각각 편성되어 심남일 의병부대 등을 진압하기 위하여 동시에 출동하였다.
그리고 1909년 6월 초에도 3개월 예정으로 3개의 변장정찰대가 활동에 들어갔는데, 그들의 목적은 당시 전라도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인 심남일을 비롯한 전해산, 안규홍 등의 근거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또한 7월 중순에도 1개월 예정으로 11개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들 역시 “주된 목적은 전해산 심남일을 죽이는데 있다”라고 함으로써 당시 일본측이 심남일의 제거에 얼마나 힘을 기울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에 심남일 의병부대는 1909년 7월경 부대를 소규모로 분산하고서 활동을 일시 중단하였다. 일제측은 “대토벌을 개시하자 적세가 조락(凋落)하여 지난날의 횡포가 없고 전‧심‧안(전해산‧심남일‧안규홍 : 필자주)과 같은 대수괴는 일시 부하를 해산 혹은 분산하고 수괴는 어디론가 잠복”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일제는 심남일을 비롯한 호남의병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이른바 강력한 군사작전을 모색했는데,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그것이다.
결국 1909년 8월말 심남일 등 10여 명의 의병장이 강진군 모처에 모여 일제의 군사작전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훗날을 기약하며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다. 심남일 역시 의병부대를 해산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고인동(古引洞)에서 군사를 해산하며
가을바람 스산한데 장졸들이 눈물로 이별하며 고인산을 떠나려하니 말조차 더디 가구나 왜적을 소탕할 날이 반드시 있으리니 3년 동안 맹세한 일 부디 잊지 말세나.
하지만 중군장 안찬재(安贊在)는 의병해산에 반대하여 보성에서 활동하던 임창모(林昌模)와 합세하여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의병장 심남일은 부대장 강무경과 함께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잠복해 있다가 결국 1909년 10월 9일에 체포되었다. 그 이튿날인 10월 10일에 ‘남한폭도대토벌작전’도 일단락되었으며, 그를 체포한 일본군 제2연대 제3중대는 “전라남도 남부에 있어서 수일(首一)이라 칭하는 거괴(巨魁) 심남일 및 그 부하 유수의 수괴 강무경을 포획”한 공로로 상장을 받았다.
일본측조차 “현재(1908 ; 필자주) 폭도 중에서 가장 교묘한 자”라고 일컬었던 의병장 심남일의 체포는 곧 호남의병의 종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후일 백암 박은식(白岩 朴殷植)은 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평하였다.
그는 훤한 얼굴에 훤칠한 풍채로 재주가 뛰어나고 기지가 많았었다. 의병 700여 명을 소집하여 누차 기묘한 계책으로 토적하여 매우 위망이 있었으나 마침내 장흥군의 동쪽 산에서 패전하여 의병장 강무경과 함께 전사(체포 ; 필자주)하였다(韓國獨立運動之血史, 上海, 1920 ; 朴殷植全書 上, 단국대출판부, 1975, p.21).
4. 남도의 별, 마침내 스러지다
화순과 보성의 접경에 위치한 바람재(風峙)에서 체포된 심남일 등은 광주감옥에 갇혀 일제의 모진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심남일은 그의 굳건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왜적과 매국노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한이요, 노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한이며, 죄없는 의병들이 갇혔으나 구해주지 못한 것이 세 번째 한이고, 죽은 후에 순절한 충신들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 네 번째 한”이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변함없는 충절을 다짐하던 중 강무경이 먼저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자 그와의 이별을 슬퍼하였다.
옥중에서 강무경에게
지난 비바람치던 10년 동안에 서로 호형호제하며 생사를 같이 했네 나는 남고 그대 먼저 떠나가니 무슨 까닭인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말할 수 없네.
얼마후 심남일 역시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었다. 대구에서도 지루한 법정 공방이 오간 끝에 이들은 체포된 지 약 1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1910년 10월 4일이었다. 그는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고국강산을 영결하며
해와 달처럼 밝고 밝던 우리 강산이 갑자기 비린 먼지 속에 묻히고 말았네 맑은 하늘 보지 못하고 지하로 가노니 붉은 피 한에 맺혀 푸른 피 되리라.
이상과 같이 심남일은 1908~9년 사이에 전라남도의 3대 의병장으로 이름은 날렸다. 그는 서당 훈장과 향교의 교임을 지낸 함평출신의 유생이었으나, 일제의 국권침탈이 날로 심각해지자 의병에 투신하였다. 처음에는 기삼연이 주도하는 호남창의회맹소의 김율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군경의 강력한 공세를 받아 의병장 기삼연‧김율 등이 차례로 순국하자, 그는 사방에 흩어져 있던 의병들을 불러 모아 1908년 음력 2월에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그는 의병활동의 경험을 살려 신속하게 전열을 정비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전라남도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성장시켰다.
그리하여 심남일은 1908년 초 침체에 빠진 전남지방의 의병을 재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아울러 전남에서 활동하는 의병부대간의 연합의진인 호남동의단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심남일은 “남일(南一)”, 즉 남도 제일의 의병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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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읍니다...성씨와 본관이 같은 저의 선조이기에 더욱 애잔합니다...감사합니다 독립군님~
좋은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