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문드문 비가 내린다.
이즈음의 비는 꽃을 피우게 한다고 사람들은 반기지만,
지난밤,
심한 복통에 잠을 설쳤더니
며칠째 계속되는 습기 머금은 날씨가 유난히 찌부듯하다.
빈속에 바나나를 먹은 게 탈이 나 토하기도 하고 밤새 욕실을 들락거리며 고생을 했다.
껍질이 갈색으로 변했지만,
하얗고 부드러운 속살은 아주 적당히 익은 것 같았는데.
눈이 뙤꼼하다며,
꼼짝 말고 하루 쉬라는 아내의 말이지만,
오전 내내 누웠더니 허리도 불편하고 어지럽기도 해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더니 한결 낫다.
거울을 보니,
불룩하던 아랫배도 하룻밤 사이에 훌쩍해지고
푹 들어간 눈 주위와 입가엔 주름살이 몇 개 더 생겼다.
이전 같지 않게 자주 탈이 나니 이젠 음식에 더욱 조심을 해야 할 것 같다.
기운을 차릴 겸 해서 주섬주섬 재킷을 걸치고 뒤뜰로 나서니
아직은 서늘한 기운이 목덜미를 파고들어 움츠려진다.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가 물러갔으니 고맙기는 한데,
긴 겨울에 지쳐 고단해진 심신이
추적 거리는 비를 반길만한 여유를 가지기에는 무던치가 않은가 보다.
이제 그만 빨아서 챙겨 넣어야 한다며 밀쳐 놓았던 겨울 재킷이
며칠 쌓아 놓았던 까닭인지,
그새 퀴퀴하고 습해서 궁금한 냄새가 묻어난다.
계절 바뀌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귀 따가운 소리를 또 들을지 모르겠다.
아내는,
그새 봄맞이 청소를 했는지 잔설에 묻힌 낙엽이 짓물러 질척거렸던 앞 뒤뜰이 깔끔하다.
지난 늦가을에는,
쌓이는 낙엽을 아침저녁으로 쓸어내어도 잠깐 눈 돌리면 엉망이 된다며
양쪽 이웃들을 많이도 원망했었다.
왼쪽 집의 노처녀는,
정원 가꾸는 사람들에게 맡기고선 통 관심이 없으니
낙엽이 전부 우리 쪽으로 날아온다며,
싹수없는 젊은 것이라 불평을 했고.
오른쪽 집은,
수시로 앰브르란스가 들락거려 정원 손보는 일을 엄두도 못내는 것 같은데,
그럴 거면 콘도로 이사를 가야지,
이웃에 피해를 주는 염치없는 늙은이들이라고 원망을 했다.
칠칠치 못한 이웃 탓에 허리가 남아나지 않는다며
낙엽 치우는 송풍기까지 장만한 아내의 정성이다.
그런데 아내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게으른 이웃 탓이기보다는,
지금의 집터를 잘 구했다는,
틈날 때마다 자신의 선견지명을 자랑하는 아내의 잘못이다.
타원형으로 빙 둘러선 중앙에 위치한 장소여서 바람이 내 집 쪽으로 몰려드는 구조인 것을
아내는 아직도 깨닫지 못한 모양이니,
그냥 잔소리와 불평을 듣고는 살지만,
저 부지런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갈수록 매사에 억척스러워지고,
예사로 험한 말을 들어내는 아내가 참 걱정이다.
목덜미에 선 듯 선 듯 스치는 빗방울이 반갑지는 않은데,
그래도 대지는 이 차가운 비로 인해 새 생명을 맞이하고 있다.
군데 군데에서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어,
마른 껍질 속엔 논꼽만한 빨강 튤립이 살포시 숨어있고
자줏빛이 어우러진 남색의 히아신스도 고양이 발톱처럼 모습을 들어낼 것 같은데,
.
긴 줄기 끝에 달린 하얗고 노란 수선화 꽃잎 두 장,
햇살이 부담스러울 만큼 가녀리고 연약한 꽃잎이 청초하여
손바닥을 내밀어 보다 언뜻 스치는 향기에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토록 매섭도록 잔인한 계절의 상처를 견디고
연약한 자태와 아기자기한 꽃망울에서 겨우내 숨죽였던 자색(紫色)의 아픔이 남빛에 붉은 물 드리우듯
순백의 청초함을 수줍게 들어내고 있다.
경이로운 자연의 섭리다.
기러기들도 이젠 제짝을 찾아 새끼들을 부화하기 위한 몸짓들이 부산스러우니
뒤뜰의 새싹들처럼 곧 새 생명이 태어날 테고.
경이롭고 신성한 계절이
싱그러운 봄 내음을 뿌리고 있어
이 부드럽고 따스한 아름다운 계절의 정서를
글이나 시로 표현하고픈 생각이 불쑥 들지만,
내겐 안타까운 욕심일 뿐이다.
그래서
감성적인 이들은 아름다운 계절에 피는 꽃을 보고 글을 써고 또한 시를 써는 것일 것이다.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모두에게 친숙한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인 김춘수 시인의 (꽃)은 젊은이들에게 그 얼마나 사랑받는 시인가
( 이 한밤에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
...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꽃에서
사물의 본질을 캐어묻고
갈대에 부는 바람에서 서러운 짐승처럼 울 수밖에 없는 존재의 의미를 탐구했다는
시인이 그래서 존경스럽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런 존경스러운 분이 신군부를 위한 헌정 시를 썼다고 하니.
차마 옮겨 적기조차 부끄러운 문장을 나열한 가락을 시라고 했었다니..
불행하게도 나의 고향 출신이라고 한다.
우리 시대 불멸의 거목이라는 서정주 시인도 신군부를 위한 헌정 시를 썼다고 했었지,
그 분들은 일생 추구 하고자 했던 자신들 문학의 지향점을 헌정시라는 가치로 표현했을까..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
봄비 맞으며
한 떨기 꽃에서 존재의 의미를 캐어묻고
초록이 지쳐서 단풍이 된다는
소름이 돋을만큼의 깊은 눈울 가진 시인들이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생명의 경이로움이 아닌
그이 들에겐 단지 찰나의 지나가는 풍경이었는지도 모를 일,
참 부질없다.
구차한 사람들이다.
조그마한 뜰에서
움트는 새싹을 바라보는 일이 이다지 경이로운 일인데..
긴 겨울이 지나고
이제 아름다운 계절이 시작되려나 보다.
첫댓글 아내분이 봄바람 드신 것도 다 아시고.
늘 아내바라기 판돌님.
아니, 단풍들겠네님.
저희 남편은 긴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해 와도 몰라요.
봄바람이 들었는지,
겨울바람에 감기가 걸렸는지.
토론토 그 집 담장 주위엔
머 그리 큰 나무들이 많은지..
낙엽 치우다 치우다 포기.
걍 두셔요 단풍 들 때 까지.
단풍 떨어져도 쓸지 마시고.
마치, 가평 남이섬 노오란 은행 이파리길 ~
여자는 나이먹을수록 거칠고 억세지는걸 아시면서 ㅎㅎㅎ남자는 약해지고
사랑스런 마나님 자랑. 잘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