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사이에서 자란 작은 새처럼 사람들이
이영선
이 도시의 밤은 붉은 십자가에 먼저 도착한다
그다음 기다렸다는 듯 러브모텔의 네온사인이 깜빡 깜빡 거린다
서쪽에는 왼팔이 잘린 십자가가 서 있다
그 뒷골목에 있는 화가의 작업실에 가본 적 있다
창과 창 사이에 낀 홍매화 꽃잎이 파르르 흔들리는데
무엇을 그렸는지 덕지덕지 덧칠해진 그림 위로
붉은 나비 한 마리 날고 있었다
천왕선녀 점집 붉은 불빛이 사직산로 아래까지 번져 간다
이혼 하고 싶다고 주저앉아 우는 여자, 사업 망하고 허구한 날 술만 마시는데 어디가야 귀인을 만나냐고 다그치는 남자,
그들의 눈을 마주하고 천왕선녀가 술술 주문을 외우면 신이 접신하여
호통치고 겁박하고 얼래고 달래고 한다는데 영험하다는 소문에 굿판도 자주 벌이고 날마다 방울 속 놋쇠 부딪히는 소리가 골목을 돌아다닌다는데
지금 막 내림굿을 끝냈는지 마당 한편에 떡이며 과일 그득하고
무의를 입은 여자가 검은 철제 대문을 비죽이 열고 나간다
대문 앞을 기웃대던 노인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골목길을 올라간다
도시의 골목은 검은 가지처럼 자라고
가지 사이에서 자란 작은 새처럼
사람들이 숨어들고 있다
---이영선 시집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