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연쇄점을 경영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는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이웃의 상점 주인들은 같은 그리스도인이긴 하지만 주일에도 가게를 여느라 교회에 나가지 않는 날이 더 많은 듯하였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그의 말에 별로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도리어 뒤돌아서서 비웃기 까지 했다. 어느 주일날, 그날도 상점 문을 닫고 교회를 가려고 나오는데 앞의 상점에 모였던 몇몇 사람들이 "여보게 우리는 이제껏 몇 번이나 예배를 빠졌는데도 이렇게 아무 일도 없잖은가"하면서 농담을 했다. 그 말에 묵묵부답하던 그는 사람들을 향해 "아직 계산은 끝나지 않은 것 같네 그래서 나는 아직 잘 모르겠구만"하고 대답했다. 주님께서는 최후에 날에 우리의 모든 것들에 대해 반드시 계산을 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잘 못한 일에 대해 하나님의 아무런 징계가 없다고 해서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없으십니까?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1. 이제 5월로 접어 들었습니다. 푸르름이 짙어가는 계절입니다. 다시 한번 품은 비젼을 점검하며 힘찬 전진을 이루워 나갈수 있도록 기도가 필요합니다.
2.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속에 잘 이루어지고 지경을 넓혀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목 : 징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 : 히브리서 12장 5절에서 6절
사람은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가정이나 학교나 그리고 직장에서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으면서 성장해 갑니다. 우리 대부분이 차를 운전하기 때문에 이 비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칭찬이라는 것은 차에 있어서 액셀러레이터와 같은 것이라면 책망은 브레이크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차에 액셀러레이터만 있다면 그 차는 잘 나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아주 위험한 흉기가 될 뿐입니다. 그렇다고 차에 브레이크만 있다면 그 차는 아무데도 쓸모 없는 고철덩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차가 정반대의 역할을 하는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통해서 바르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듯이 우리 사람에게도 액셀레이터 같은 칭찬과 브레이크와 같은 책망을 통해서 사람이 바르게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브레이크와 같은 책망, 우리 인생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책망에 대해서 이해를 넓히고 믿음의 자세를 바르게 하고자 합니다. 책망과 징계의 근원은 에덴동산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때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그 책망을 받아들이고 용서를 빌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담은 자기 죄를 아내인 하와의 탓으로 돌리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하나님께서 내게 아내를 주시지 않았느냐고 원망을 돌림으로써 그는 결국 징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에덴을 상실했고 그 결과로 아담의 후손들은 시편 51편 1절의 말씀대로 다 죄악 중에 출생했으며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생로병사(生路病死)가 풍파 많은 바다처럼 쉴새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믿음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을 때도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책망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고 회개하면 용서하셨지만, 회개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그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나 앗수르 같은 이방나라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무서운 전쟁이 일어나게 해서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때야, 무서운 전쟁을 당하고 나서야 죄를 끊고 하나님 앞에 손들고 나와서 용서함을 받고 깨끗함을 받게 되는 것이 성경에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이와 같이 책망과 징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이끌어 가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망과 징계는 인간의 죄악에 대한 브레이크, 인간이 완전하지 못함에 대한 필요악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책망과 징계는 하나님께만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게도 책망과 징계를 하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윗사람의 눈에 비친 아랫사람들의 행동이 완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을 책망하기도 하고 징계하기도 합니다. 그때 사람의 책망이나 징계는 합당할 수도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사람을 징계하거나 책망하는 것은 이치나 공평함에 맞지 않을 수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해하거나 불공평한 징계를 우리는 얼마든지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세계의 모순된 모습이며,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든지 당하는 흔한 일들이라는 것을 또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불공평한 징계나 책망을 받을 때 억울해 하고 분해 하고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울분이나 좌절감 같은 감정적인 반응을 나타내기 십상인데, 실은 우리는 그러할 때 냉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아주 모순된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 우리는 내 마음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거나 징계하실 때 대부분의 경우 주위 사람들을 들어서 우리들을 책망하시거나 징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앞에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보다도 더 악한 앗수르 사람들이나 또 유다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바벨론을 보내셨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직장생활에서 그런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 상사가 나보다 더 못된 사람이지만 나를 꾸중하고 나를 징계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경험합니다. 가정에서도 예수 믿지 않는 남편이 또 예수 믿지 않는 형제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조금 무슨 허물을 보이면, 우리들을 조롱하거나, 우리들을 비난하거나, 우리들을 징계하는 것을 우리들은 많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 더 나쁜 사람 오히려 나보다 더 징계를 받아야 될 사람이 오히려 나를 징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이 불공평하게 느껴지고 울분이 나서 어떤 학생들은부모에게 꾸중을 듣고 자살해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불공평한 징계에 일터를 잃고 나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신문지상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하박국 선지자의 물음이 바로 그런 물음이었습니다. 하박국서 1장 13절에 보면 하박국은 하나님께 항의하듯이 묻습니다.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 하나님은 왜 잠잠하십니까?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죽이는데 왜 하나님은 잠잠하십니까?" 이 하박국의 말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대부분은 당연하다고 동의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박국이 하나님 앞에 묻는 이 물음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박국은 지금 자기가 징계 받은 것에 대해서 항의하는 것이 아니라, 왜 악한사람이 징계하느냐, 왜 하나님께서는 더 악한 사람을 놓아두고 도리어 그 사람들을 통해서 덜 악한 사람을 징계하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징계하느냐고 항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항의가 얼른 생각하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악인들이 흥하든지 망하든지,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흥하든지 망하든지 하나님은 그들에게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때로 그들을 흥하게 해서든지 망하게 해서든지 오직 당신의 백성들을 바르게 세우는 데만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목회해 오면서 우리 성도들이 오는 것이나 가는 것을 오라고도 하지 아니하고, 가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갈 때도 붙잡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목회 하는 것을 보고 어떤 분들은 섭섭하다 하는 분도 있고, 교만하다 하는 분도 있는데 그건 계기가 있습니다. 왜 그랬냐면, 처음 저희 온누리교회가 11년 전 개척한 데서 동부교회의 한 집사님이 자기 동생이 고창에서 이사를 왔다고 소개를 해 주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가정인데 이제 전주로 와서 믿기로 작정했으니까 목사님께서 이사온 날 가서 예배를 드려주고, 목사님 교회로 인도해서 키워주십시오. 뭐 그때는 교인 몇 명 없었습니다. 아주 반가웠습니다. 그분이 이사 올 날만 꼬박꼬박 기다렸다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기로 하고 왕 전도사님과 제가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삿날 가보니까 이미 그 옆에 있는 교회에서 목사님이랑 사모님이랑 몇 분들이 와서 이삿짐을 날라주고 있었습니다. 계면쩍었지만은 제가 아는 동부교회 집사님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다음주에 우리 교회에 꼭 나오기로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주에 기다려서 나오는가 봤는데 그분이 안 나왔습니다. 그래서 월요일날 당장에 전화를 하면서 "왜 나오시지 않았습니까? 찾아가겠습니다" 그랬더니 절대 오시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때는 한 교인이라도 아주 아쉬웠고 또 어떻게 해서라도 부흥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또한 왕 전도사님이 막 가자고 해서 그 집으로 갔습니다. 가봤는데, 이분이 아주 냉정하게 저를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저는 교회 안다닐랍니다" 깜짝 놀라서 "왜 그러십니까?" "목사님 이해가 안 갑니다. 제가 여기 이사왔는데 옆에 소망교회에서, 이삿짐부터 날라준 교회에서는 날마다 자기 교회로 나오라고 하지요. 또 그 옆의 만민교회에서는 거울이랑 하이타이를 사 가지고 와서 자기 교회로 나오라고 날마다 하지요. 또 자기 시누이는 적은 개척교회 가면 안된다, 서문교회나 동부교회 같은 큰 교회에 나가야 된다고 볶아대지요, 온누리교회는 또 이렇게 목사님까지 나왔사오니, 교인들이 장사꾼보다 더 경우가 바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 다니겠습니다" 그러면서 냉정하게 대했습니다.
저는 그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배도 고파보고, 핍박도 당해보았지만 목사된 것을 저는 한번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후회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목사들이 장사하는 사람보다 더 경우가 바르지 않다는 그 말에 얼마나 부끄럽고 목사된 것이 후회스럽다는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장사들보다 더 경우가 바르지 않다는 말에 저는 "죄송합니다." 여러 말도 못하고 나왔습니다. 그 때 저는 결심을 했습니다. 성도들을 너무나도 몰아붙이는 것은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버릇없게 만든다. 성도들에게서 오히려 그 믿음을 쫓아내는 것이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도들을 앞으로 오라 하거나, 가는 것을 막지 않겠다라고 제 마음속으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영혼을 죽이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저는 마음 깊이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옛날에 저희 교회에서 잘 봉사하다가, 옆에 교회에서 막 오시라고 하니까 가셨는데, 가시고 나서는 목사님이 안 잡으니까 그런 목사가 어디 있냐, 섭섭하다는 그런 분도 있었습니다.
자 어쨌든 이렇게 성장, 성장 오늘날 그렇게 된 한국교회의 교인들, 뭐 어떻게 됐습니까?
진리의 문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입니다. 얼마나 많이 먹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성경적이냐가 문제입니다.
한국 기업이 살려면 이제 기업이 거품을 빼고 문어발식 확장을 빼고 정말 내실을 기하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한국기업은 살 수가 없습니다.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기업을 닮은 한국교회도 그러해야 합니다. 제가 목사입니다만, 우리 한국의 목사, 교역자들의 자질문제……. 구조조정되어야 합니다. 이제 앞으로 목회자의 구조조정은 참으로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목사가 아니면은,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성도들을 위해서 울고 죽을 수 있는 목사가 아니고는, 저를 포함해서 그런 구조조정이 되지 않으면 목회를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구조조정이 되어야 합니다.
장로, 집사, 권사들 모든 직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옛날 시골에 있을 때, 장로님께서 목사님 생활비를 줄 돈이 없으니까, 자기집 소를 팔아서 목사님 생활비를 갖다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로, 권사가 되면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 권사라고 폼재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불이 타면 그 불 속에 뛰어 들어 죽어버릴 각오가 아니면은 장로, 권사를 받지 않는다는 각오를 하여야 합니다. 10년, 20년 다녔다고 그냥 장로가 되기를 원하고, 권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권사가 안되었다고 삐쳐서 다른 교회로 가버리십니까? 이것이 한국교회의 참으로 안타까운 실정인 것입니다.
명예가 아니라 멍에들을 짊어지지 않으면, 우리 한국교회가 그렇게 구조조정이 되지 않으면, 우리 한국교회도 희망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 기억나는 것이 옥순이라는 착한 아주 착한 풍금을 잘 치는 처녀가 있었는데, 그 처녀가 동네 한 청년과 연애한다고 그저 몇 번 만난 것뿐인데, 당회에서 당회로 모여 가지고 그 옥순이라는 처녀를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수찬정지를 내리는 것을 보고 어렸을 때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 때의 교회가 그렇게 세속화되지 않으려고 몸부림하고, 세상과 같지 않으려고 몸부림하고, 세상과 대항해서 저렇게 세상의 그릇된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몸부림함으로써,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었는데, 오늘날은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세속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구조조정이 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저도 반성을 합니다. 우리 교회도 성장을 위해서만 달려왔구나 하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면, 하나님 뜻대로만 하면, 하나님 뜻대로 하다가 교회가 망하거나 죽을지라도 하나님 뜻대로만 하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인본주의적이거나 내 교회 이기주의에만 빠져 있다면, 질보다도 양에만 관심 있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도 버리실 것이라는 생각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도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 때에 우리들은 이런 생각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대도 우리를 대신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무서운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님의 대신 받으신 징계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징계를 받을 때에 특히 그것이 억울하다거나 부조리하게 느껴질 때도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주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얼마나 큰 희생의 대가를 치렀나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우리가 이유 없이 고난을 받아도 주님께서 보여주신 본을 받아서 인내하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징계를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들에게 항상 결국은 선한 것으로 나타내어 주십니다. 우리가 받은 징계가 징계 받을 때는 싫고 아프고 억울하지만 되돌아보면 그것은 나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내가 성숙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남을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떤 책망이나 징계를 당할 때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말고 즉 절망하거나, 불만하거나, 원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붙들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아무리 위대한 인물일지라도 다 허물이 있었고 죄악된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위대하다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슨 큰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을 의미하지 아니하고, 혹은 그 사람이 허물이나 죄가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한 인물의 위대함은 죄가 있느냐 없느냐, 그 사람이 얼마나 큰 업적을 남겼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책망과 징계를 받았을 때, 어려움을 당했을 때,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감당했느냐에 따라서 위대함이 바꾸어지고 있습니다.
사울 왕을 한번 보십시다. 사울 왕은 왕이 되기 전에는 대단히 겸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고 나서부터 교만해졌습니다. 사울 왕이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3장에 보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야 되는데 그가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제사를 드려버립니다. 잘못입니다. 그런데 이 사울이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가 제사를 드린 것 이것이 잘못이지만, 이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작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었냐 하면 사무엘 선지자가 그런 사울 왕을 책망했을 때 사울 왕의 태도였습니다. 사무엘이 왜 기다리지 못하고 그렇게 했느냐고 하면서 사울 왕을 책망하자 그는 잘못했습니다고 고백하지 않고 그는 오히려 변명하여 말하기를 블레셋 사람이 내려오려고 해서 그랬다고 하면서 변명으로 일관을 합니다. 그것이 사울 왕의 잘못이었습니다.
또 계속해서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멸망시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 것도, 그 노획한 것을 다 불태워버리고, 다 죽이라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사울 왕은 그 재물들을 숨겨서 자기 것으로 놓아둡니다. 이것도 잘못이었습니다. 이때 사무엘 선지자가 다시 사울 왕에게 왜 그리하였느냐고 책망하자 사울 왕은 또 다시 더 큰 잘못을 합니다. 역시 잘못했다고 인정하지 아니하고 변명하고 자기 위신을 세우기에 급급하고 도리어 사무엘 선지자를 공격하면서 대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못보다 더 큰 것은 무엇입니까? 죄보다 더 큰 것은 무엇입니까? 책망 받을 때,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고 핑계하며 불만 하는 것은 죄보다 더 큰 것이올시다. 그래서 결국 이 사울 왕은 왕의 직분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마는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채찍을 맞게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다윗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다윗은 죄가 없습니까? 다윗은 사울보다도 더 많은 죄가 있습니다. 더 무서운 죄가 있습니다. 그는 한 여인 밧세바를 탐하여서 그와 간음했고, 그녀의 남편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무서운 죄를 다윗은 범했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런 다윗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을 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할 때, 다윗이 이 책망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왕이었고 나단은 무명의 선지자였으며, 만약 그가 그 책망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체면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지고 그의 왕위마저도 잃을 지경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그 사람이오 당신이 간음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범죄 하였다."고 말했을 때 다윗은 그 나단 선지자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때 하나님은 그 다윗을 망하게 하고, 그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해주셨고, 그를 더 가까이 두셨고, 그를 사랑해주고, 그를 돕고 품어주신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될 것입니다.
다윗의 위대성이 여기 있습니다. 죄를 안 지었던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책망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품으로 되돌아 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이러한 책망과 징계에 대한 다윗의 태도는 사무엘하 16장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사무엘하 16장을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칼을 들고일어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궁에서 맨발로 쫓겨 달아나고 있습니다. 그때 사울 왕의 집안 사람인 시므이란 사람이 쫓겨가는 다윗에게 돌을 던지면서 다윗을 비난하고 욕을 했습니다. 참으로 분하고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무엇이라고 말한 줄 아십니까? 사무엘하 16장 10절에 보면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저주하고 저가 내게 돌을 던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라 하신 까닭이다. 여러분 자기에게 비난하고, 자기에게 돌을 던지고, 자기에게 욕을 퍼붓는 그 시므이를 보고 저가 여호와께서 시켜서 그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도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억울한 징계를 당하고 비난을 당했습니다. 여자를 겁탈한다는 비난을 당했습니다. 감옥으로 가는 징계를 당했습니다. 요셉이 받은 이런 억울한 징계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징계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도 있지만 하나님이 그때 그 사람에게 억울하게 징계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를 지금 나타내시려고 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분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일로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악한 사람들에 의해서 비난과 부당한 징계를 받았습니다. 여인을 겁탈하려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가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신 것은 요셉을 그 감옥에 가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술맡은 관원장을 꺼내주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것만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삼으셔서 총리로 만드시려는 큰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억울한 비난을 징계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것뿐입니까? 또 있습니다. 이 억울한 비난 이 억울한 징계 속에는 7년 흉년이 되어서 온 중동 땅이 지금의 IMF보다 더 험한 기근이 올 때, 그 중동의 수많은 생명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요셉의 억울한 징계 속에는 이런 많은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있었기 때문에 감옥으로 보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더 중요한 정말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섭리가 있는데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너의 민족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큰 민족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 민족이 세상의 제사장의 나라가 되리라 하신 그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요셉이 감옥으로 들어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담당하기 위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이 당한 부당한 고난은 4중의 깊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많은 부당한 일들을 세상에 살면서 당하게 되고 억울한 비난과 징계를 당하게도 되지만은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내 모르는 어떤 섭리를 지금 그 부당한 징계 속에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피해를 당하고, 억울하고 힘들 때는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상상하기 어렵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뒤늦게 깨닫게 되고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이 타당하든 억울하든 그것을 주는 사람만 보고 그 일만 보고 분해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자살하거나 마음이 어두워지지 말고,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 뒤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뒤에서 뜻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면서,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징계는 징계로 끝나지 않고, 그 징계가, 고난이 축복으로 바꾸어지는 역사를 우리는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항상 액셀러레이터를 밟듯이 잘 나갈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브레이크를 밟듯이 멈춰 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브레이크를 밟고 서게 하실 때는 무엇인가 내 차에 내가 모르는 전문가가 아닌 나는 모르는 무언가 큰 이상이 내 차에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나가다가는 더 큰 위험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잠시 지연시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는 브레이크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이 잘못함으로 인하였으면 회개하고 그 길을 돌이키면 됩니다. 반대로 이해 안되는 부당한 징계와 피해를 우리가 당할 때는 요셉처럼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가 배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가 믿고 기도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이 우리를 더 사랑하시기도 하고, 요셉과 같이 우리를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시는 도구로 징계를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책망과 징계를 당할 때, 다윗과 같이, 요셉과 같이 그 책망과 징계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인내하고 기도하고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 인하여 그 책망과 징계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복이 되는 그런 역사를 다 창조하는 우리 온누리의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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