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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종군기자의 기록
6.25 동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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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6.25가 다가옵니다. 지난 69년 세월 동안 동란을 직접 맞닥뜨린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도 있었고 비극적인 체험을 글로 남긴 이들도 많았습니다. 포스팅하는 아래 글은 전쟁터를 직접 찍은 1시간반짜리 컬러영상 내레이션을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존에 발표된 글들이 놓친 내용도 분명히 들어 있으리라 봅니다. 미군 종군기자가 목숨을 걸고 전선을 누비며 촬영한 영상을 세월이 지나 접할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습니다. 글은 분량이 다소 많아서 3회에 나누어 싣습니다. 영상 마지막 부분에 오류투성이인 번역기가 통역한 자막이 뜨는 건 ‘옥에 티’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공격’을 ‘0격’으로 번역했으니 말입니다. 서른 살에 날 낳으신 아버지가 동란에서 희생되신데 비하면 사변 당시 초등 1년생이었던 난 참으로 긴 세월을 살았습니다. 원본 동영상도 아래에 함께 싣습니다. - 옮긴이 -
6.25동란은 전 세계를 긴장시켰던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사이에 일어난 소규모 전쟁에 불과할까.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으며 혹독한 추위와 지칠 줄 모르는 적에 맞서 싸워야했던 처절한 전쟁이었다. 이 영상은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것이다. 냉전의 첫 번째 화약고 한반도로 간다. 1950년 4월, 6.25가 일어나기 두 달 전인 이때부터 한반도에서는 이미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 영상은 전쟁으로 치닫고 있던 남한과 북한의 대치상황을 잘 보여준다. 처형당하는 사람들은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들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남한과 북한은 한 나라였지만 이제는 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싹트기 시작한 양측의 긴장관계는 당시 거의 폭발직전이었다.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지만 실제 자연환경은 험하다. 그러고 과거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반도는 북태평양의 자그만 반도로 미국에서 10,00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특이한 점은 주변에 러시아와 중국 일본 세 강국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반도는 주변 강국들의 힘겨루기 장소가 돼 잠시도 편할 틈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서 막 벗어난 상태였다.
1945년 7월, 포츠담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일본군을 공략하기 위해 각각 남쪽과 북쪽에서 진격해 들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미군과 소련군은 대략 한반도의 중간인 북위 38도선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로 한다. 소련은 38선의 위쪽인 북한에, 미국은 아래쪽인 남한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1947년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할 때 북한과 남한에는 전혀 다른 정부가 들어섰다. 북한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이란 북한정권이, 남한에는 이승만 정권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 상대를 없애려고 했다.
대립은 격화되었고 38선 부근에서는 이미 수차례 교전이 벌어졌다. 이 작은 반도는 두 개의 정부가 양립하기에는 너무 비좁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략한다. 이전의 소규모 교전과는 차원이 다른 전면전이었다. 135,000명에 달하는 북한의 인민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거침없이 남쪽으로 진격했다. 수적으로나 장비 면에서 열세였던 남한의 국군은 저항다운 저항을 한 번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당시 남한의 전투력 열세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동란 전에 이승만 대통령은 공공연하게 북침을 주장했다.
이에 미국은 아예 국군의 전력증강을 막았다. 그런데 미국의 이러한 전략이 남한을 위험에 빠트린 꼴이 되고 말았다. 남한은 거의 맨손으로 북한의 탱크와 엄청난 화력에 맞서야 했다. 결국 전쟁 발발 이틀 만에 38선에서 50여 킬로 떨어진 서울이 북한에게 넘어가고 만다. 겁에 질린 서울 사람들은 피란을 떠나기 시작했다.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이들 피란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러나 북한 인민군의 남하를 두려워한 국군이 한강 다리를 폭파시킨다. 다리가 폭파되는 순간 다리를 건너고 있던 수백 명의 시민들은 거의 목숨을 잃었고 수천 명은 피란길이 막히는 신세가 되었다.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고 남한은 공포분위기에 휩싸였다.
북한은 자신들이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미국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한이 공산정권에 넘어가면 다음은 일본 차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론이 들끓자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해공군력을 이용해 침략군을 격퇴하라고 명령한다. “한국은 작은 나라이고 아주 먼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일은 미 국민들에게 중요합니다. 이번 북한의 침략은 모든 자유국가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인류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유국가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 도전은 어디까지나 정면도전으로 미국도 정면으로 대치할 겁니다.”
미 공군은 출격한 첫날 북한 전투기 6대를 격추시키는 성과를 올린다. 한편 미 해군은 북한의 해안선에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정작 지상에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해결책으로 핵폭탄을 투하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이미 핵폭탄을 보유한 소련과 충돌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뻔했다. 결국 지상군을 투입하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이 국제경찰로서 북한을 제지해달라고 요청했다. “유엔이 무법적인 침략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조치를 취하고 이 조치에 전 세계의 자유국가들이 즉각적으로 호응할 때 국가 간의 체계를 세우려는 인류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유엔군의 핵심은 미군이 맡았다. 그러나 1950년 미 군사력은 걱정스러울 만큼 약한 상태였다. 예산은 1945년의 10분의 1 정도였고 특히 극동아시아에 배치된 미군은 극소수였다. 당시 남아있던 미 군사력은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거의 집중되어 있었다. 극동군 총사령관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아시아지역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됨으로써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보여줘야 했다. 가장 급하던 스미스 중령의 특수임무부대는 급박한 전쟁 상황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7월초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오산 부근에서 남쪽으로 진격하는 북한군을 발견했다. 즉시 산 쪽에 숨었다가 북한군이 다가오자 가지고 있던 모든 화력을 동원해 저지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북한군의 탱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겨우 4대만 파괴했을 뿐 나머지 33대는 미군의 저지선을 뚫고 남하했다. 미군은 적진 한가운데 남겨지는 꼴이 되었고 죽을힘을 다해 빠져나와야 했다. 부대원들의 시체가 사방에 나뒹굴고 부하 한 명이 복부에 총을 맞았다. “그 친구가 고통스러워하는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뿐이었다.” -스미스부대 대위 짐 리브스.
이 오산전투로 유엔군의 임무가 단순한 국제경찰이 아니라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뒤이어 며칠 동안 미8군 소속의 지원군 부대가 도착했지만 손바닥으로 강물을 막는 격이었다. 북한은 부산 근처까지 진격해 내려가려고 하고 유엔군은 조금만 더 밀리면 바다로 뛰어들어야할 형편이었다. 당시 유엔군의 전략은 북한군을 상대로 지연작전을 펴는 것이었다. 남진속도를 둔화시키고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시간을 벌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계속해서 북한군에게 밀려서 후퇴를 거듭했다. 7월 20일 결국 금강전선마저 무너지고 남하는 한쪽 구석에 몰리게 되었다.
누가 봐도 유엔군의 참담한 패배였다. 1950년 8월, 유엔군은 궁지에 몰렸다. 한반도 최남단 부산에서 불과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밀려난 것이다. 이제 부산을 지켜주는 마지막 울타리는 낙동강으로 이 방어선마저 무너지면 끝장이었다. 그런데도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은 불안정했다. 미식축구장 100개 정도의 전선을 방어하려면 3600명의 사단병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낙동강 전선은 150개의 미식축구장을 몇 개 대대가 지키는 격이었다. 수적 열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닥에 떨어진 사기였다. 유엔군은 평화유지 임무를 수행하다가 갑자기 치열한 전투현장에 투입돼 상당수가 전장 공포증마저 보였다.
화가 난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이러한 사실을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직접 보고했다. 워커 중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크넷 휘하에서 활약한 철두철미한 군인이었다. 그는 7월 29일 낙동강전선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여기서 더 후퇴하면 장례식을 치러주겠다고 말했다. 사방에 적들이 깔린 상태에서 워커 중장의 부대가 한 가닥 희망을 거는 것은 우세한 화력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수난보에서 미8군 25사단이 반격을 시도하는 동안 걸스 전폭기가 북한군에 폭격을 가하며 적의 보급로를 파괴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미군지원 포병대대가 북한 인민군의 공격을 받는다.
피아가 뒤섞인 상황에서 미 포병대대는 무참하게 당하고 만다. 이 전투로 미 포병대대는 모든 장비를 잃고 수백 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서남부 반격작전은 실패했다. 한편 이보다 조금 상류 쪽에서는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의 빈틈을 발견하고는 공격을 개시했다. 밤사이 낙동강을 건넌 북한군은 이름 없는 능선을 점령하는데 이 능선을 통해 곧바로 부산으로 진격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미군은 즉각 공세에 나섰다. 2주 동안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얼마나 치열했던지 어떤 고지는 미군과 북한군이 서로 10여 차례씩 번갈아가며 차지할 정도였다.
그 사이 북한군에 대한 공습은 계속되었다. “총격전이 끝나면 아군 전폭기의 공습이 시작됐습니다. 북한군은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는 우리 귀에도 들릴 정도였지요.” -B중대 폴리이드 에킨스 마침내 낙동강을 건너왔던 북한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개전 이후 처음으로 북한군의 공세를 막은 것이다. 8월 중순 유엔군은 효과적인 지상전 수행이 가능한 만큼의 병력을 보충할 수 있게 되었다. 부산항을 통해 프랑스 터키 태국 에티오피아의 지원군이 도착했고 특히 영국을 비롯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같은 영연방국가에서 많은 지원군이 도착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엔 너무 어렸고 이제 활약할 나이가 된 젊은이들이었다.
그런데 전쟁의 참상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 특히 미군들은 자신감이 지나쳐 보일 정도였다. “부산은 마치 대학생들의 동창회 날 같았습니다. 들뜬 분위기였죠. 마치 ‘걱정하지 마! 우린 미 해병대야! 하는 것 같았죠.” -해밀턴 소위. 새로 도착한 미군들 중에는 흑인 신병들도 많았다. 이 흑인 신병들은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백인들과 한 부대에서 전투에 참가하게 됐다. 6.25동란 이전까지 미군은 백인과 흑인이 다른 부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급하게 병력을 배치하면서 흑백혼합부대가 탄생하게 됐다. 전쟁터에서 피부색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투 중에도 휴식 중에도 잘 뭉쳤다.
8월 공세에 실패한 북한군은 9월 1일 다시 낙동강 방어선 전역에 걸쳐 대공세를 시작한다. 그러나 북한군은 지칠 대로 지친 데다 보급로가 차단돼 공세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유엔군이 반격을 할 때가 됐다. 그리고 그 반격의 장소는 맥아더 총사령관이 알고 있었다. 지난 몇 주 동안 맥아더는 대반격의 지점으로 인천항을 점찍고 있었다. 인천항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로 교통과 보급의 주요 거점이었다. 그러나 인천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적진 한가운데 위치해 있고 조수간만의 차가 1킬로미터나 됐다.
게다가 항공정찰 결과 북한군이 인천항을 철통같이 경계하고 있었다.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해군과 해병대 장성들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반대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의지는 단호했다. 이 작전의 타당성에 대해 나는 추호의 의심도 없으며 성공할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또 한 발 더 나아가 이것이야 말로 적으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며 결정타를 입힐 수 있는 기회다. 인천항 점령은 북한군에게 정신적인 타격이 될 것이다. 반면 유엔군에게는 사기를 높이고 전쟁의 주도권을 잡는 계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또 인접한 김포비행장과 40킬로미터 거리의 서울을 공략하기도 적당했다.
그러나 좁은 해안에 상륙해 곧바로 도시를 공략해야 하는 만큼 쉽지 않은 작전이었다. 작전이 성공하려면 보통 군대로는 어림없었다. 맥아더 총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제10군단을 편성한다. 육군과 해병대 해군으로 구성된 이 군대는 부산을 떠나 인천으로 향했다. 한 참전 군인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부산항을 떠나자마자 인천항에 도착할 만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2시간 만에 차가 한 곳에서 작전을 수행하긴 처음이었죠. 그런 대규모 상륙작전도 처음이었고요. 9월 15일 새벽이 밝아오는데 만만치 않을 거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 해군 소속 조지 길번 소위.
인천상륙작전은 전력을 짜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썰물일 때 수심이 너무 얕아서 대형군함의 이동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륙작전을 밀물시간에 맞춰 두 단계로 나눠야했다. 아침 밀물시간에 인천항 입구에 위치한 월미도를 확보한 다음 저녁 밀물시간에 인천항을 공략하기로 했다. 작전 개시 닷새 전 월미도에 폭격을 가해 적을 무력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틀 전 상륙정이 합류했다. 드디어 9월 15일 새벽 미 10군단은 월미도 공략에 들어갔다. 월미도의 북한군은 방심하고 있다가 사상자를 320명이나 내고 섬에서 후퇴했다. 미군 전사자는 한 명도 없이 부상자만 20명이었다.
월미도 점령 후 다음 밀물까지 11시간 동안 10군단의 보병들은 휴식을 취했고 거세와 전폭기들은 시가지에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다음 당시 월미도에서 공습을 지켜본 잭 시글 기자의 라디오방송 내용이다.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습니다. 아주 쏜살같이 날아다니네요. 폭발음 들리십니까? 두 번을 울리죠? 세상에 어느새 저쪽 편까지 가서 한 방을 먹이고 다시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어둠이 깔리자 본격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다. 상륙목표지점은 인천시가지와 가까운 레드비치와 남쪽에 블루비치였다. 구축함과 로켓포함에서 포탄을 퍼부어댔다. 상륙정들은 서쪽 해변으로 향했다.
탱크와 각종 중장비들도 합류했다. 포병들은 해안에서 인천항 탈환을 경계했다. 작전개시 1시간 30분 만에 레드비치를 완전 장악하고 인천시가지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레드비치와 블루비치로 상륙한 보병들이 서로 만나면서 작전은 끝났다. 인천상륙작전은 유엔군 전사자가 단 20명에 불과할 만큼 신속하고 정확했다. 맥아더 총사령관의 도박은 성공했다. 성공에 가장 기뻐한 것은 그 자신이다. 그러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으로 남한에 있던 북한군은 큰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게다가 낙동강에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이 끝난 뒤로도 1주일 동안 이 사실을 통보받지 못한 상태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북한군은 겁을 먹고 즉시 퇴각하기 시작했다. 한편 인천에 상륙한 미 10군단은 서울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발걸음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제1목표지점은 김포비행장이었다. 김포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비행장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9월 18일 김포는 미 해병대 수중에 들어왔다. 그 후 해병대의 전투기가 김포비행장 활주로에서 이륙해 서울을 소개했다. 서울 탈환의 신호탄이 울려 퍼진 것이다. 서울수복작전은 세 갈레로 나뉘었다.
우선 제5해병사단은 김포를 통해 바로 한강을 건너 서울의 서쪽 시가지를 공략하기로 했다. 한편 제1해병사단은 서울 남부의 교외지역을 점령하고 서쪽 시가지에서 제5해병사단을 만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낙동강 방어선의 미 육군 제7사단이 올라오면서 동쪽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북한군의 증원을 차단한다. 미 해병대는 작전대로 한강을 건넜지만 서울 서쪽 고지에서 강한 저항에 부딪친다. 북한 인민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치열한 접전으로 미 해병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포대와 전투기가 사흘 동안 지원사격을 했다. 또 화염방사기까지 동원됐다. 그러나 북한군의 저항은 거셌다.
미 해병대 소속의 군대가 669고지에서 치룬 전투는 처절할 정도였다. 미 해병부대는 참호 속의 북한군을 상대해 총검을 들고 백병전까지 치러야 했다. 포연이 그쳤을 때 중대병력 206명 가운데 33명만이 살아남아 승리의 기쁨을 맛봤다. 한편 서울 남동쪽에서는 미 육군 제7사단이 북한군을 쫓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9월 22일, 북한의 전차대대를 격퇴시켰고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수원비행장을 확보했다. 김포와 수원비행장에서 이륙한 전투기들은 지상군의 서울 전진에 힘을 실어주었다. 9월 24일 유엔군은 서울 주변의 고지를 점령했다.
“그때 광경을 잊을 수 없어요. 아래 펼쳐진 도시 곳곳에서 연기가 치솟고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있었죠. 폭격기가 날아와 공격을 하면 폭발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올랐습니다. 고지에서 본 그 광경은 마치 영화 같았죠. 하지만 그건 현실이었어요. -비솝 이등병. 다음날인 9월 25일 북한군은 서울에서 퇴각하고 3개월 만에 서울은 수복됐다. 남한 경제 문화의 중심인 서울이 다시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온 것이다.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총사령관이 참석한 서울수복기념식이 거행됐다. 이 기념식은 전 세계에 유엔군의 국제경찰로서의 위상을 알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념식 중간에도 멀리 저격병들의 총성이 들려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경고했다.
[6.25동란 컬러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