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따라 / 문형렬
산속에 비가 쉼 없이 온다
추워서 장작에 불을 붙이고
이생에서 소죽 끓이고 불 때는 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또 난다
어릴 때 꿈은 무엇인지 몰라도
지금 다 사라지고
저잣거리에서는 몰라도,
매정하게 오는 비에 아궁이 불꽃 속
참나무 장작에 새겨진 빗줄기는
지나온 발자국일까?
다음 생의 이정표일까?
짧은 생각 사이 불꽃은 재로 바뀌는데
와르르 나는 흔들리고
갑자기 퍼부어대는 비 따라
마지막 불꽃은 얼음처럼 솟구치니
인연은 하얗게 늙고
살아있던 사람이 언제 죽었다는
풍문처럼 나는 돌아와 장작불을 지핀다
소쩍이는 혼자 울고, 무엇을 탓하랴
불꽃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재가 되어 깊어간다
- 『너의 이름만으로 행복했었다』, 두엄, 2023.
감상 – 제목으로 인해 좀 더 머물게 되는 시가 있다. 이 시도 그렇다. 『벽암록』은 선사들의 선문답으로 도를 고민하게 하는 책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시인이 『벽암록』을 읽다가 시를 썼을 수도 있고, 『벽암록』의 어떤 장면을 고민하다가 시작(詩作)이 시작(始作)되었을 수도 있다. 여하한 경우라도 제목과 시가 무관할 수 없을 테니 독자로서 『벽암록』을 읽으려는 노력은 가상하다 하겠으나 바쁜 일상 속 웬만한 정성 가지고는 안 된다.
다행히 이 시는 제목을 가려도 잘 읽힐뿐더러 내용도 아주 서정적이다. 비 오는 날, 장작불 피우며 소죽을 끓이는 장면은 이전 농경사회에선 아주 익숙한 풍경이다. 땅에서도, 가마솥에서도 소 입김에서도 김이 무럭무럭 피는 걸 보면서 자란 시인이 세상을 떠돌다 다시 아궁이 앞에 섰다.
장작불이 일어나고 장작이 재가 되는 건, 어찌 보면 한 생의 성장과 소멸에 대응된다. “참나무 장작에 새겨진 빗줄기”나 “마지막 불꽃은 얼음처럼 솟구치니”와 같은 표현은 꽤 낯설다. 빗줄기가 참나무 빗금이 되는 이치도 바로 헤아리기 어렵지만 빗금에서 연륜도 읽고 상처도 느끼게 된다. 불꽃이 만든 얼음 기둥은 상상 너머다. 세찬 빗속에,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 뒤에 오는 얼음 기둥은 깨달음의 일순간 같은 걸까. 소쩍새든 누구든 존재는 혼자 울고, 무엇을 탓할 일도 아니란 것이 깨달음의 일면 같기도 하다.
시인은 의문과 화두를 잡고 정진하는 벽암록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자신과 무관할 리 없는 어떤 삶, 어떤 인연을 깊이깊이 생각하는 중이다. 소멸 앞에 의미 있는 건 무엇일까 하는 화두 하나도 쪼개져서 이편으로 건너온다.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출처가 『벽암록』인 것을 이번에 새로 알았다. 줄탁동시는 병아리가 안에서 쪼을 때, 어미가 밖에서 쪼아서 마침내 껍질을 깨게 한다는 의미다. 새로 거듭나려는 자는 스스로의 내면 욕구와 행동이 우선 중요하다. 그렇게 하다 보면 밖에서의 도움도 따라 오게 되고, 어느 순간 결실도 한다는 의미로 나는 받아들인다. 또 생각건대 결실하지 않으면 또 어떤가 싶기도 하다. 이래도 한 생이고, 저래도 한 생이다. 그래도 생각하는 삶이 낫긴 나으려나. 『벽암록』을 읽지 않고 시행만 좇아 벽암록 따라가는 흉내를 내니 말이 설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