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贊翊1884(고종21)--1949 오창공파 독립운동가 자 정일 호 남파 경기도 파주출신 광무10(1906) 신민희에 가입 민족운동을 벌이고 1910) 한일합방으로 만주에 망명 대종교의 正敎로 있으면서 화룡현 삼도구에 한인학교르 세워 교육사업에 종사행사했다 서로군정서의 요직을 역임하고 상해로 건너가 신규식등과 동제사를 조직했다 1920) 임시전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1921) 임시정부 대표로 광동정부에 파견되었다가 1940) 임시정부 법무부장 이 되었다 1948) 귀국 1949) 서울에서 병사 1963) 건국 공로훈장 단장이 수여 되었다
(朴贊翊/1884.1.2~1949.3.9) 독립운동가. 자 정일(精一). 호 남파(南坡). 경기 파주(坡州) 출생. 1906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1910년 국권피탈 후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의 정교(正敎)로 있으면서 허룽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에 한인학교를 세우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요직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1921년 임시정부 대표로 광둥[廣東]정부에 파견, 1940년 임시정부 법무부장이 되고, 1948년 광복된 조국에 돌아왔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이듬해 1949년 서울에서 병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찬익(朴贊翊), 1884년 1월 2일~1949년 3월 9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남파(南坡) 아명은 박창익(朴昌益)이다. 본관은 반남.
생애 초기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박봉서(朴鳳緖)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4년 상경하여 상공학교 동기생 박원호의 추천으로 보안회에 가입하여 일본의 황무지 개척 요구안에 대한 반대투쟁에 참여하였다. 1907년 초에는 비밀 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박호원 등과 서부지방을 순례하면서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야학을 조직하였다.[1]
1908년 4월 다시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이때 나라를 일제에 강점당하자 만주 용정으로 망명하였다. 연길에서 간민교육회를 조직,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서일과 함께 대종교 항일무장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1918년 11월에는 만주 길림에서 김교헌,김동삼,조소앙,이동녕 등 38인의 동지와 함께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1]
독립운동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갔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4월 23일 서울의 국민대회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을 때는 평정관에 선출되었다. 1921년 3월 임시 정부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7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무차장대리로 외교임무를 실질적으로 전담하였으며 주로 대중국 외교에 주력하였다.[1]
특히 중국 국민당의 쑨원이 광동에 중국호법정부를 수립하자 임시정부를 승인받는데 기여하였으며, 1922년 2월에는 광동에 주재하여 호법정부와의 외교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1926년 9월 31일 침체되어 있던 대종교 교도들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윤세복, 정일우 등과 귀일당을 조직하였다.[1]
임시정부 활동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하고, 1930년 10월 중국 국민당 제 4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임시정부 대표인 조소앙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32년 5월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후임시정부를 가흥으로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하여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1932년 6월에는 다시 상해로 잠입하여 일제 앞잡이 옥관빈과 상하이 한인친우회 위원장으로 일경의 밀정 노릇하던 유인발 등을 적발, 처단하는 계획에 참여하였다.[1]
이후 외교술로 대외교섭과 재정조달의 임무를 맡아왔다.[2]
1934년에는 한국국민당과 결별하였다가[1] 6월경부터 박찬익은 한국국민당의 자금관리 문제를 김구에게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박찬익은 김구와 불화가 생겼고, 더욱이 자금운영문제로 의심을 받자 미련없이 자리를 떠났다.[3] 1938년 7월 이시영, 이동녕 등의 주선으로 다시 김구와 손잡고 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의 일을 보게 되었다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임정이 중경으로 옮긴 뒤에는 법무부장 겸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광복시까지 임시 정부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한편 1942년 10월에는 한중문화협회의 한국측 이사로 선임되어 한.중 친선에 기여하였으며, 1943년 5월에는 김구, 홍운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1]
해방후 1945년 8.15해방 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장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였다. 1946년 2월 한국독립당 중국 총지부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47년 중국국공내전 상황에서 한인군대의 필요성에 대한 계획서를 중국 당국에 제출 승인받아 동북행영 장연지구에 보병독립총대를 설치하였다. 1948년 4월 김구의 남북협상을 위한 월북을 만류하기 위해 인천 월미도로 귀국하였으며, 1948년 말에는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김구의 은퇴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사후 1949년 3월 9일 서울 창신동에서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3년 11월 19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朴英俊(1915--2000) 임시정부 의 외곽단체인 한국광복전선 청년공작대를 시작으로 한국광복군 제3지대 훈련총대장 등을 지내며 항일운동을 벌였다. 한국전력주식회사 사장 광복회고문 등을 역임했다. 백범기념사업회장을 지낸 애국지사 박영준翁 이 2000년3월27일 오전 8시 삼성서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85세 1977 ;건국훈장 독립장 수상 아들; 박천기 딸 ; 박天敏(대원예고 교사) 사위 이흥권(인천지법 부천지원장) (중앙일보 2000/4/1) 2000년 3월27일 타계한 애국지사 박영준(85 예비역 소장)옹 은 1930년대부터 중국에서독립군으로 활약했고, 건군이후에는 초대 장훈감을 지낸 군의 원로다. 특히 박장군의 부친은 상하이 임시정부 법무부장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남파 박찬익(48년 작고)선생이어서 이들은 부자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4남2녀중 막내로 1915년 중국 퉁징(용정)에서 태어난세서 태어난 박장군은 어린 시절 아버비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15세 때인 1930년 상하아러 부작정 부친을 찾아가 독립운동가로서의 길를 걷기 시작했다, 부친의 명을 받고 박장군은 1938년 지하 항일조직인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했다. 1942년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임관한후에는 대일무장 투쟁을 하기도했다, 1943년 신규식의 질녀이자 임정요인인 신건식의 딸인 순호(79)와 결혼했다. 순호씨는 “당시임정 지도자들이 한데 모여살았기 때문에 자녀들도 자연 스렵게 가까워졌다” 면서 “그분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정열적이었다‘ 고 회고 했다, 1945년 박장군이 광복군 제3지대 1구대장을 맡았을 때 동료였던 장호강장군은 “당시 조국을 찾겠다는 박장군의 뜨거운 의지에 부하들은 물론 동료들도 감동했다,”고 회심했다. 해방후 박장군은 3년간 중국에 남아 현지 한국인 보호에 주력했다. 중국인 탄압에 앞장섰던 일부 한국인들이 ‘망국노로 불리며 잡단 테러의 대상이 됬기 때문이다. 박장군이 평소에 “우리민족이 다시는 忘國奴 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 것도 이같은 배경과 무관치 않다. 1948년 귀국한 박장군은 12월 국군 소령으로 특별임관 했다. 광복군계급이 중령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강등된 셈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특히 건군 초기 국군 간부의 주력이 일본군 출신으로 짜여저 있었는데도 “새나라를 지키는데 과거는 중요치 않다”면서 이를 흔쾌히 수용했다. 1952년초 정훈감을지낸 박장군은 1961년 현역으로 한국전력사장에 임명 됬다가 63년 사장직에서 무러났다. 이후 광복군동지회 회장 백범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 딸 천민씨는 “평소에는 다정하고 자상했지만 아버지의 출퇴근시에는 문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고 규율을 중요시하는 박장군의 단면을 전했다. 박장군은 지난달 29일 부친의묘소가 있는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