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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명(張鳴)
모두 의화단은 산동(山東)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그건 맞는 말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대륙학자들은 의화단의 뿌리가 백련교(白蓮敎)같은 류의 민간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건 근거가 없다. 의화단내에 민간종교의 신도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의화단은 확실히 이들 종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대만학자는 의화단의 기원을 향단(鄕團)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근거는 그다지 없다. 그저 의화단의 전성기에 향단이 참여했다는 것이지, 그들이 의화단의 기원은 아니다. 그래서, 미국학자인 주석서(周錫瑞)는 아예 19세기말 20세기초의 산동사회 및 문화를 의화단의 기원으로 본다. 이렇게 말하면 안전하기는 안전하지만, 그러나 확실한 대답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실망스럽다.
의화단은 초기에 신권(神拳)을 단련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구성이 아주 복잡하다. 일반적인 백성도 있고, 민간 권회(拳會)의 사람도 있고, 향단의 사람도 있으며, 민간종교의 사람도 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들어갔다. 물론 그들의 기원은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조직이다. 몇세기동안 중국의 북방 몇개 성에는 계속 신권을 가르치는 것이 있었다. 신권은 바로 도창불입(刀槍不入)의 법문(法門)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들은 노사(老師)라고 불렸다. 이런 쿵푸는 기실 간이한 법문이다. 약간의 간단한 신비스러운 의식을 통하는데, 부적을 마시고, 주문을 외우고, 그후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운기(運氣)하는지를 가르친다. 일정한 화후(火候)에 이르면, 칼을 밀어낼 수 있다. 즉, 대도(大刀)를 운기하는 부위를 베어간다. 일반적으로 배인데, 한번 내려치면 흰자국만 남는다. 운기가 끝나면 다시 보통사람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당초, 어떤 사람이 산동 대도회(大刀會) 안에서 이 쿵푸를 가르칠 때, 청정부의 밀정이 이미 상황을 모두 파악했다. 당시 어떤 사람은 이것은 모두 가짜라고 지적한다. 칼로 내려치면 배에 들어가지 않지만, 칼을 그으면 베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명청 두 왕조때 간혹 출현했다. 심지어 의화단의 난같이 큰 사건으로 비화된 적도 있다. 민국시대에 이르러서도 어떤 사람은 이런 짓을 했다. 민국의 홍창회(紅槍會)가 바로 의화단의 또 다른 버전이다. 다만 이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큰 사건을 벌이지 못한다. 배우는 사람이 아주 많고, 상응하는 토양이 있을때 비로소 규모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의화단이 크게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정치시사적인 필요때문이었고, 민국시기에 홍창회가 커질 수 있었떤 것은 역시 군벌혼전으로 북방의 시골사회가 살아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별히 설명해야 할 점은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쿵푸를 가르치는 스승은 있지만, 이들은 현지에서 이런 간이한 법문을 가르치는 조직에서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그들의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활동의 조직자, 영도자는 또 다른 사람이다. 노사는 모두 외지인이고, 조직자는 현지인이다. 어느 정도 인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엘리트는 아니다. 그래서 의화단의 조직은 모두 하나하나 나뉘어 있다. 몇개의 마을이 연합하기만 해도 이미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 대사형, 이사형같은 지도자들이면 충분했다.
무술변법이전에, 이런 쿵푸를 수련하는 사람은 명확한 정치적 경향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향촌교회를 괴롭히는 사람들과 결합하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요인이 이들을 서양인과 맞서는 궤도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독일인이 건설하는 교제철로(膠濟鐵路)였다. 관련되는 면적이 넓다보니 독일인들은 산동의 농촌사회와의 사이에 마찰이 증가했다. 그리하여, 독일인을 적대시하고, 나아가 서양인을 적대시하게 된다. 원래 산동의 교회는 민간사회와 충돌이 있었다. 그리하여 서서히, 도창불입의 이 법문은 아주 강력한 도구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서양인과 싸우던 사람들이 이 법문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의화단조직이 천차만별이고, 잡다하지만 유일한 공통점은 바로 그들의 법술이다. 무슨 건자단(乾字團)이건 감자단(坎字團)이건 그들이 수련한 쿵푸는 모두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 몇몇 노사가 전한 법은 모두 같았기 때문이다.
신권을 배운 조직은 처음에는 의화단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여러가지 명칭이 다 있었다. 그중에는 신권(神拳)과 의화권(義和拳)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점점 이 두 가지 명칭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당시, 서양인과 싸우고, 기독교를 공격하는 조직은 모조리 청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보수파관료인 육현(毓賢)과 이병형(李秉衡)이 산동을 다스릴 때, 모두 신권과 의화권을 진압한다. 정부의 진압에 직면하여 이들 조직은 기본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나 분산되어 있어서, 흩어질 뿐이었고, 그래서 소멸시킬 수가 없었다.
무술정변이 발생하고, 서태후가 다시 수렴청정하며, 신법을 모조리 폐기해버리고, 역사를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다. 다만, 이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일본을 포함한 서방세계와의 관계가 나빠지게 된다. 광서제를 폐위시키는 구체적인 문제를 놓고, 서태후는 서방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더욱 심층적으로 말하자면, 당초 변법은 서방을 배우자는 것이고, 청일전쟁이래의 망국위기에서 나라를 구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신법을 모조리 폐지하였는데, 위기는 여전히 존재했다. 그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서태후가 직면한 난제였다. 비록 당시 중국의 양무운동은 이미 여러 해동안 진행되었지만, 서태후는 양무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했다. 그녀에 있어서, 서양인들을 쫓아낼 수만 있고,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만 할 수 있다면, 망국위기는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방에 대항하고 위기국면을 구해줄 좋은 방안을 찾는 것이 서태후에게 놓여진 현실적인 과제였다. 그리하여, 일부 보수파관료는 "민기가용(民氣可用)"의 건의를 하게 된다. 구체적인 예로 든 것이 산동의 의화권이다. 그리고 그들은 도창불입의 법술이 있다고 했다. 서태후는 비록 즉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움직였다. 윗사람이 흥미를 보였으니, 아래에서는 바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그리하여 의화단은 즉시 기세를 올려 세력이 팽창된다. 윗사람들의 은전에 보답하기 위하여, 의화권은 더욱 관방화된 의화단이 된다.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구호가 천지를 울렸다.
수천수만의 의화단이 북경과 천진으로 몰려든다. 그리고 도처에서 서양인을 죽이고 교회를 부수었다. 4만여 천주교인을 죽일 때, 일부 서양선교사와 중국으로 와서 철로를 건설하던 엔지니어들도 피해를 입거나, 혹은 위협을 받는다. 혼란이 커지고, 전체 세계가 깜짝 놀란다. 그러나 서태후의 의화단에 대한 인정은 한단계 격이 올라갔다. 정식으로 그들을 "의민(義民)"으로 승인한 것이다. 이전에 서태후는 군기처(軍機處)의 강의(剛毅)와 조서교(趙舒翹) 두 사람을 탁주(涿州)의 의화단 대본영에 보내어 고찰해보도록 지시한다. 그들 두 사람은 의화단의 '도창불입'이 진짜라고 보고한다. 그리하여 의화단이 북경성에 들어온 후, 의화단에 서태후는 대통령(大統領)을 임명한다. 바로 광서제를 대체하려했던 대아거(大阿哥) 부준(溥儁)의 부친인 단군왕(端郡王) 재의(載漪)이다. 그리고 돈과 양식도 내어준다. 그러자 의화단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스스로를 "봉지련단(奉旨練團)"이라고 하고, 모든 권단(拳壇)에는 "흠정의화단(欽定義和團, 흠정은 황제가 임명했다는 뜻임)"이라는 기치를 내건다. 그리고 스스로 나서서 곳곳에서 한간(漢奸)을 체포하고, 백련교와는 선을 긋는다. 북경에서 일찌기 백련교일당을 붙잡아(기실 그들은 강호에서 공연하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었음) 일가를 모두 죽여버린다.
비록 이 기간동안 재의가 생각한 것은 의화단을 이용하여 광서제를 쫓아내거나 죽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의화단에 새로운 구호를 내걸도록 한다. "일룡이호삼백양(一龍二虎三百羊)"을 죽이자는 것이다. 일룡은 광서제이다(이호는 이홍장과 경친왕 혁광이고, 삼백양은 주화파대신들을 가리킴). 서태후는 그렇게까지 서두르려 하지 않았지만, 이 기간에 의화단은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리하여 의화단에 대한 여하한 비판도 그녀는 용납하지 않았다. 설사 의화단이 사고를 치고, 조정의 대문인 전문(前門)의 건물을 불태웠지만, 아무도 감히 나서서 안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안된다고 말하면 목이 날아날 터였다. 당시 5명의 대신이 죽임을 당한다.
비록 그렇지만, 서태후가 바라는 것은 의화단들로 서양인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주로 군대이다. 그러나 이들 시골에서 온 권민(拳民)들이 가장 싸우고 싶어했던 것은 천주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종교를 믿으면서, 같은 시골에 살고 있는데, 종교를 밎지 않는 자들과 수십년간 사이가 벌어지고 충돌이 있어왔다. 신도들은 신앙이 평민들과 다를 뿐아니라, 신도들은 미사를 하고, 세례를 했다. 이런 행위는 평민들의 눈에 거슬렸다. 특히 신도들은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평상시에 마을에서 주최하는 영신새회(迎神賽會)의 연희(演戱)활동에 한푼도 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쌍방의 충돌은 이미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교안(敎案)충돌에서 평민들이 내세운 이유는 대부분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예를 들어, 그들은 집단으로 음란한 짓을 한다든지, 그들은 신상을 부순다든지, 심지어 교회의 육영당에서는 아이의 눈을 파내서 약으로 만든다든지 하는 것들이 있었다. 다만 교회가 파괴되고, 신도가 피살되고, 사건이 벌어지면, 관청에서는 서방의 간섭하에 평민의 목숨을 빼앗거나 돈을 배상하게 했다. 그러나 절대로 백성들에게 진상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교회는 정말 나쁜 짓을 많이 하지만 관청은 서양인들을 무서워하여 부득이 굴종한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매번 교안이 발생할 때마다 백성과 신도간의 원한은 쌓여갔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의화단의 난은 그런 총폭발한 교안이라고 할 수 있다.
지적해야할 점은 의화단이 난을 일으킨 후, 노사들이 당초에 전한 법문은 기실 간단한 법문이었고, 부적을 불태워 마시고, 주문을 외우는 것만으로는 그다지 신비한 색채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을 크게 벌인 후에는 권민들이 자발적으로 발명창조를 하게 된다. 부적을 태워마시고, 주술을 외우고, 웅기를 하는 과정을 신령부체(神靈附體)라고 얘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권민은 평상시에 종교색채가 짙은 희악(戱樂)문화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부체된 신은 모두 평상시 극에서 보던 인물이다. 특히 삼국연의의 인물, 서유기의 인물, 여기에 팔선(八仙)도 더해지고, 공안희(公案戱)에 나오는 황삼태(黃三太)와 황천패(黃天覇)도 있었다. 여기에 원래 주술을 외우는 것은 허울이었따. 그리하여 나중에 주술어는 각양각색이 되어 뭐든지 다 나온다. 종교적인 주술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권민은 상법(上法, 즉 신령부체)때, 희극의 인물을 모방하여 공연을 하는, 보는 사람들로서는 웃기는 일이었다.
그외에, 의화단에는 종교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민간종교색채까지 나타난다. 자신의 단에 팔괘의 명호를 내걸어 무슨 건자단, 감자단같은 류가 나온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사실상 의화단은 건곤감리 태진손감의 8개를 모두 쓰지 않았다. 모두가 '건자단'이었다. 개략적으로 '건'자가 가장 첫째라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나머지는 홍포 혹은 황포를 머리에 썼는데, 민간의 길한 색깔을 채용한 것이다.
당연히 서태후가 정말 의화단으로 서양인을 막으려할 때는 소용이 없었다. 서십고교당(西什庫敎堂)을 공격할 때나 사관구(使館區)를 공격할 때나 아니면 팔국연군에 저항할 때나 진정 서양인들을 위협한 것은 청군이었다. 나중에 일부 학자들은 이화접목하여 청군의 전적을 모두 의화단의 것이라고 말했지만, 결국은 흐지부지된다.
특히 설명해야할 점은 아주 많이 알려진 홍등조(紅燈照)이다. 기실 이것은 무슨 여자의화단의 조직이 아니다. 그리고 여성이 홍등조를 수련하는 경우도 없었다. 소위 홍등조라는 것은 등절(燈節)에 공중에 휘날리는 그런 등이다. 사람들이 상상을 해서 여떤 여자가 이런 등처럼 날라가서 외국으로 간 다음 서양인의 수도를 불태워버렸다라고 한 것일 뿐이다. 의화단은 매우 보수적이었고, 여성에 대하여는 극도로 차별했다. 의화단 내의 여자 예를 들어, 황련성모(黃蓮聖母, 林黑兒)는 의화단이 서양인의 여성법보에 대항하기 위하여이다(의화단의 법술이 통하지 않는 것은 서양인들이 나체여인 혹은 여인의 생식기를 이용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리하여, 임흑아라는 선기(船妓)를 찾아, 가장 더러운 여인으로 이독공독(以毒攻毒)하려 한 것이다. 이렇게 서양인이 사용하는 여성법보에 대항하려던 것이었다. 결국 대항이 되지 않자, 임흑아는 의화단에 의해 버려지고, 결국 서양인에게 생포되어, 전시당하게 된다.
사관구를 공격한지 1개월여가 되었을 때, 서태후는 이미 깨달았다. 도창불입은 효과가 없다는 것을. 다만 이때 그녀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그래서 즉시 방향을 돌릴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가 북경에서 도망쳐, 산서에 도착해서 막 위험을 벗어나자, 광서제의 명의로 상유를 반포하고, 청군에게 의화단을 소탕할 것을 명한다. 그후, 의화단을 가장 많이 죽인 것은 기실 청군이다. 이런 역공에 대하여 비록 경정빈(景廷賓)이 앞장서서 반항해보지만(기실 경정빈은 의화단이 아니고, 그저 의화단을 포위소탕하던 청군에 의해 연루된 향신이다), 기본적으로 연소운산(煙消雲散)한다. 여기서 언급할 것은 의화단의 전성기에ㅐ 산동순무가 원세개(袁世凱)로 교체되고, 원세개는 1만의 새로 조직한 육군으로 산동의 의화단을 쫓아낼 사람은 쫓아내고, 죽일 사람을 죽여서 모조리 소탕해버린다. 그리하여 큰 사건을 일으킨 의화단은 그저 직예와 산서에 집중되어 있었고, 주로 북경, 천진일대에 있었다.
나중에 의화단으로 있던 농민중 죽지 않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심지어 기독교를 믿었다. 이게 무슨 이치인가? 전현동(錢玄同)의 수레를 끌던 수레꾼은 이전에 대사형을 지낸 인물이었는데, 그는 기독교에 귀의했다. 그가 말하기를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의 보살은 영험하고, 우리으 보살은 영험하지 않았끼 때문이라고 한다.
의화단이 사라졌지만, 쿵후를 가르치는 노사들은 남아 있다. 그들은 무슨 멸양멸교(滅洋滅敎)에는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승에서 제자로 대대로 전해졌다. 민국북양시기의 후반기에 군벌의 혼전이 극도로 빈번하게 일어나자 북방향촌사회는 크게 파괴된다. 그리하여 옛날의 의화단은 다시 홍창회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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