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고두현의 아침 시편』2024.01.15.
'내 인생의 주행거리는 얼마나 될까?’
인생 / 유자효
늦가을 청량리
할머니 둘
버스를 기다리며 속삭인다
"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 유자효 : 1947년 부산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직>, <심장과 뼈>, <사랑하는 아들아>, <성자가 된 개>, <내 영혼은>, <떠남>, <짧은 사랑>, <꼭>, <어디일까요>, <잠들지 못한 밤에 시를 읽었습니다>, <아버지의 힘>, <신라행> 등 출간.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신설동에서 청량리까지는 시내버스로 네 정거장, 약 15분 거리입니다. 지하철로는 2구간 4분,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 거리죠. 걸어가도 30분이면 됩니다. 이 짧은 거리가 두 할머니에게는 여태까지 걸어온 인생의 주행거리입니다.
이 시는 속도와 시간, 거리와 공간의 의미를 사람의 일생으로 응축해 보여줍니다. 이런 장면을 포착해서 순간 스케치처럼 보여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시인이 보여주는 풍경의 한편에는 ‘느린 속도’와 ‘멈춘 걸음’과 ‘생의 비의’가 함께 있습니다.
“속도를 늦추자 세상이 넓어졌다”
그 속에서 깊은 성찰의 꽃이 피어납니다. 유자효 시인은 평생 시인과 방송기자라는 두 길을 바쁘게 걸어왔습니다. 부산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진해군항제 백일장 등의 장원을 휩쓸고, 대학 시절 가정교사로 바쁜 중에도 스물한 살 때 신춘문예로 등단했습니다. 그 뒤로는 기자가 되어 KBS 파리 특파원과 SBS 정치부장, 보도제작국장, 논설위원실장 등으로 종횡무진했죠.
은퇴 후 “어릴 때부터 걷고 싶었던 시인과 기자의 두 길”을 ‘한 길’에서 만나게 되면서 그는 더 내밀한 세상의 풍경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시 ‘속도’를 한번 볼까요. “속도를 늦추었다/ 세상이 넓어졌다// 속도를 더 늦추었다/ 세상이 더 넓어졌다// 아예 서 버렸다/ 세상이 환해졌다”
이 시처럼 삶의 속도를 늦추면 세상이 넓어 보입니다. 속도를 더 늦추면 세상이 더 넓어지고, 아예 멈춰 서버리면 세상이 모두 환해집니다. 그제야 잊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지요. 그동안 무심히 지나치던 것 중에서 소중하고도 살가운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지난해 봄 신문 칼럼에 이렇게 썼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습니다. 아내와 함께 찾아본 집 근처 산에는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납니다. (…)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의 데이트였습니다. 연애 시절에는 그리움에 안달복달했었건만, 결혼 이후 아내와의 대화는 생활적인 것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무려 반세기 만에 찾게 해준 것이 이 듣도 보도 못하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였습니다.”
환하게 피어나는 봄을 만나기 위해
우리 또한 ‘멈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속도가 늦어지고, 모든 일상이 단절됐지요. 고요 속 단절과 격리는 뜻밖에도 우리의 ‘숨은 눈’을 뜨게 해줬습니다. 비로소 보이는 세상의 이면과 틈새, 그 사이로 넓어지는 삶의 지평, 그 위에 피어나는 새로운 발견의 꽃잎….
이런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가족과 사랑의 의미도 특별해 보이겠지요. ‘아침 식사’라는 시에서 그는 “아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송곳니로 무 조각을 씹고 있는데/ 사각사각사각사각/ 아버지의 음식 씹는 소리가 들린다/ 아 그때 아버지도 어금니를 뽑으셨구나// 씹어야 하는 슬픔/ 더 잘 씹어야 하는 아픔”이라고 썼습니다. 작은 식탁 위에 3대의 인생이 겹쳐지는군요. 짠한 마음이 들다가도 이내 마음이 환해집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지요.
그는 그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간격’까지 준비해두었습니다. 그 간격과 거리는 곧 무한천공의 우주로 펼쳐집니다. 이럴 때 그는 ‘그리움’이라는 배를 타고 유영하는 우주항해사 같기도 합니다.
“그를 향해 도는 별을/ 태양은 버리지 않고// 그 별을 향해 도는/ 작은 별도 버리지 않는// 그만한 거리 있어야/ 끝이 없는 그리움”(‘거리’ 전문)
이 모든 게 속도를 늦춰야 보이는 것들이지요. 저도 오늘부터 생의 보폭을 줄여보려 합니다. 더 천천히, 더 느리게, 마침내 한 지점에 멈춰 서서 환하게 피어나는 세상의 봄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지요.
〈하략 / 맨아래 '원본 바로가기' 참조〉
〈고두현 /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Schnittke: Tango (Arr. by Andriy Rakhmanin for Violin and P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