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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성고 57회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권영목
송시열 연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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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07~ 사망 1689 | |
1607 | 옥천 구룡촌에서 출생. |
1633 |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경릉참봉이 되었다가 곧 직. |
1635 | 봉림대군의 사부가 됨. |
1649 | |
1657 | |
1658 | 찬선에 등용되고 이조판서를 지냄. |
1672 | 좌의정을 지냄. |
1680 | 경신환국 이후 중추부영사를 지냄. |
1683 | 사직하고 봉조하가 됨. |
1689 | 왕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오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 [네이버 지식백과] 송시열 [宋時烈] (두산백과) |
천년바위 주위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없이 무성한 소나무 숲에 ~~~
그리고 남윤면 해설에 의하면 운동장 우측 비위를 기초로한 빌라집 근처가 송시열 옛집터라네요!!!
역사가 있는 골목길엔 잘 조성된 꽃정원도 있고~~~
잠시 공원에서 휴식도 취하며 목도 축이고~~~
ㅎㅎ 우곤이가 양주군 북곡산 생막걸리를 숨겨와서 한잔씩 ~~ 잘 마셨소이~~~아푸루 계곡 준비해 요ㅏ용!!!ㅋㅋㅋ
중식시간이 되었으니 이곳 김염삼대통령 단골국수집으로~~~
서울 성북구의 ‘성북동 국시집’은 1969년부터 2대에 걸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칼국수집이다. 원래 분식집이었는데 1968년 김현옥 전 서울시장이 우연히 들렀다가 칼국수가 맛있다며 정식으로 칼국수 집으로 문을 열어볼 것을 제안하면서 이듬해 국시집이 됐다. 고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청와대에서 검소한 식단으로 칼국수를 즐겨 먹었는데 이 성북동 국시집에서 청와대 오찬을 하기도 했다.
또한 모듬전이 아주 맛이 좋아요! 막걸리 안주로 딱이네
문화해설에 수고많은 남대감 맛있게 장 드셔~~~ 항상 고마워유~~~
국수 중식값은 김진학동무가 스폰서했습니다. 지난번 장무님조사의 감사답ㄹ례로~~~진학아 감사
다시 비가 내려 잠시 자리를 이동해서 시원한 거리끼페에서 캔아사이호프로~~~
호프는 황상천 동무가 스폰서했습니다. 지난 장남 잔치의 답례로~~~ 감사
일제 아사이 맥주맛이 좀 싸~한게 맛있소이~~ 상천아 하나 드 부탁~~~
비가 주룩주룩 쏫아지니 호프맛이 드 좋아~~~형기야 많이 드셔~~~
이곳 삼선교 왔으니 삼선교 지킴이 윤대경을 콜해서 반가이 만나서~~~
정회장님 감사~~ 복이 많아 이런 짓궃은 날씨에도 많이 참석해 즐겁도다!!!
대경이가 분위기 있는 선술집으로 이동해서~~~
동무들 반갑다 부라보~~~
선술집 지평막걸리맛이 아주 좋구나!!! 대경아 감사해유~~~
영목인 쇠주를 나발부냐!!! ㅎㅎㅎ
선술집 계산은 대경이가 부담했네요!!! 윤대감 감사해유~~~
대경이가 분위기 있고 동네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까페로 자리를 옮겨~~~
대경아 고마워~~~ 이게 소꼽동무의 우정않인가~~~
호프 와 커피로 취사선택하고~~~
2층 까페에서 커피 한잔하면서 삼선도의 옛추억담으로~~~
2층 까페에서 바라본 삼선동 동네가 고풍이~~~
윤대경이의 구수한 입담에 삼선교의 문화와 동네 자랑을~~즐거이 들어면서 커피 한잔하면서~~~
열변하는 대경이의 제스처~~~ㅋㅋㅋ
까페 커피는 강희인교우가 서폰서했습니다. 고마워~~~
대경아 고맙고 담에 만날때까지 여름 잘 보내고 바이바이~~~오늘 고마워
돌담에 여름 주황꽃이 보기 좋아서 한컷
담 목적지 이승만초대 댜통령집으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해방후 첨 귀국하여 잠시 머물던 돈암장에서 윤면이의 해설도 들어면서~~
1945년 이승만(李承晩)이 환국하여 처음 기거했던 사저(私邸)로 당시 서울시 돈암동 인근에 있다 하여 ‘돈암장’이라 하였다. 이 집은 당시 조선타이어주식회사 사장이었던 장진영(張震英)으로부터 빌린 집으로서, 장진영은 연건평 약 150평의 3채 중 1채만을 쓰고, 안채인 54평과 또다른 1채를 빌려주었다.
약 700평의 정원에 뛰어난 미관(美觀)을 지녔다. 장진영은 6·25사변 때 납치되어 죽었고, 돈암장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번지의 1호 및 2호로 분할되어 1986년 현재 문화재로 지정받지 않은 채 3명의 소유자에게 나뉘어 있다. 이승만은 환국 후 조선호텔에서 며칠을 묵고 경비과중으로 이 집을 찾았다.
이 곳에서는 윤치영(尹致暎 : 비서실장)·이기붕(李起鵬 : 서무담당)·윤석오(尹錫五 : 문서담당)·송필만(宋必滿 : 비서) 등이 보필하였고, 와병 중에는 임영신(任永信)이 간병하였다. 이승만은 돈암장에서 미군정청으로부터 추대되었던 민주의원 의장직을 버리고, 공산계열의 민주주의 민족전선과 대결을 하면서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열중하였다.
극도의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승만은 장진영으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통고를 받았고, 이 소식을 들은 미조선주둔군사령관인 하지(Hodge,j. R.)중장의 주선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田中)가 쓰던 마포장(麻浦莊)을 얻어 이사하였다.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 10월에 국내로 돌아온 이승만은 미국의 지지를 받는 우익 지도자로서 세력을 키워 갔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결정된 신탁 통치에 반대하며 남한 내의 좌익 세력을 제압한 후,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과거사 청산보다는 국가의 안정과 반공을 앞세우는 정책을 수행했다.
6 · 25 전쟁 중 헌법을 바꿔 대통령에 다시 선출되었고, 전쟁 후에는 대통령 연임 규정을 없애는 헌법 개정안을 불법적으로 통과시켜 세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에는 또다시 3 · 15 부정 선거를 저질러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분노한 국민들이 4 · 19 혁명을 일으키면서 결국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하와이로 망명했다가 그곳에서 1965년에 세상을 떠났다.
지루한 장마에도 많은 교우들이 참석해 골목길을 걸어면서 문화해설과 동무들과
우정을 다지는 유익한 하루였습니다.
동무들 무더운 날씨에 건강에 유의하시고 좋은 나날 되세요!!!
정 인 수 산악회장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