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6.
어린 시절, 동네에서 가장 잘 살던 집에는 바깥 정원이 있었는데 바깥정원 중의 하나가 연이 잔뜩 심겨진 연밭이었다. 여름에 냇가로 가서 멱을 감다 돌아 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나면 그 연밭에 들려 연잎 하나를 따서 뒤집어 머리에 쓰고 집으로 돌아 오기도 하고, 연밥을 따서 연실을 꺼내 먹기도 했었는데, 한 번도 그 집 사람에게서 야단맞은 기억이 없었던 걸 보면 마음이 후한 쥔장이 동네 연밭으로 생각하고 문을 열어 두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산으로 가는 도중, 도로에서 바로 보이는 연밭이 있어 잠시 차를 멈추고 연꽃을 바라 보니 돌아갈 길 없는 옛날 생각이 불현 듯 떠오른다. 도시락 대신 연잎에다 밥과 된장을 싸서 오는 아이들도 있었던 어려운 시절이였어.
밀양-언양간의 24번 도로를 달리다 양촌마을로 들어 오니 옛날,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봉의교가 없어지고 새다리 공사가 한창이다. 짐작컨데 작년 태풍에 낡은 봉의교가 유실되어 버린 모양이다.
가라마을 끝자락까지 들어 와 황토찜질방을 겸하는 민박집의 앞마당에다 주차를 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날이 잔뜩 흐려 있으나 아직은 비가 내리지 않고 있으니 계곡부터 들려야겠다 싶어 계곡을 옆에 낀 산길로 들어 섰다. 축축한 기운이 공기 중에서 느껴지지만 그 때문에 풀냄새, 흙냄새가 더욱 짙게 느껴져 마음이 빠르게 차분해지는 느낌이다.
산 중에서는 산을 음미할 수 있는 템포로 걷는 것이 가장 좋다. 산 오르기에만 숨이 차도록 열중하는 사람들은 산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놓치고 마는 셈이다. 산 속의 뭇 생명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살이에 대해 짧은 순간이라도 관조해 볼 수 있음은 산을 찾는 이들에게는 소중한 행복거리인데 어찌 소홀히 하랴.
계곡으로 내려서면서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구만산과 육화산 줄기 사이에 있으면서 통수계곡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좁고 긴 협곡은 산세에 견주어 보면 상상하기 힘든 아름다움을 간직한 계곡이다. 이젠 산행객들이 많이 드나들어 오염을 염려할 지경이 되었지만, 얼마 전만 하더라도 때묻지 않은 순결한 아름다움의 계곡이였다. 30년, 50년 후에라도 지금만큼 만이라도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리 될는지.
^ 자귀나무
자귀나무가 공작 꼬리 모양의 붉으스레한 꽃을 피우고 있다. 밤이 되면 깃꼴의 복엽을 곱게 접는 것을 보고 부부가 잠자리에 드는 모습에 비유하여 합환목이라 부르고 부부침실 가까이에 심기도 했다는 나무이다.
물을 들여다 본다. 너무 맑아 개울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이고 빛의 조화인가, 평범한 조약돌이 무지개 빛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사랑과 행복은 천 사람이 만가지 다른 뜻으로 쓰고 있는 말이긴 하지만 그 순수함이 높은 수준에 이르면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덜어내고 나누어 갖더라도 줄 지 않는 속성이 있다. 높은 산의 깊은 계곡이 끝 없이 흘려 보내는 맑은 물처럼 말이다.
너덜에 돌탑이 몇 기 세워져 있다. 무엇을 기원하며 이 탑을 세웠을까? 홍진에서의 명리를 원했을까? 자신이 세상에 지은 허물을 속죄하기 위해서 쌓았을까? 자신의 극락왕생을 기원했을까? 아니면 자손들이 복 받기를 기원했을까? 돌탑을 쌓아 올리는 정성도 필요하고, 탑쌓기의 무의미함을 꿰뚫어 보는 지혜도 모두 필요한 것 아닌가 생각해 본다.
^ 구만폭포
드디어, 오늘 계곡 탐방의 하일라이트 구만폭포 앞에 섰다. 높이 약 40미터. 해발 800이 채 못되는 산이 품기에는 벅차다 느껴지는 폭포이다. 산행객들만 없다면 저 폭포 밑에 서서 벼락처럼 떨어지는 물을 한 번 맞아 보고 싶구마는. 대구에서 왔다는 팀, 김해에서 홀로 온 사나이, 모두 사진기들이 없어 내 사진기로 사진을 찍고, 사진화일을 보낼 멜주소를 휴대폰에 기록해 두었다. 사람들은 폭포를 목표로 해서 온 것인지 모두 내려들 갔다.
절벽 같은 사면을 타고 폭포 위로 오르면 조용하고 깨끗한 계곡은 계속 이어진다.
^ 물에 들며 날며 매실주로 점심 먹던 곳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모두 끝이 나고 계곡도 잦아들 무렵 옥 같은 물이 넘쳐흐르는 웅덩이가에 자리를 잡고 거적대기를 훌훌 벗어 던졌다. 온 몸으로 물이 흐른다. 잠시나마 내 자신이 맑은 물이 되어 버린 듯한 착각이 든다. 점심을 꺼내 놓고 함께 가져 온 매실주를 마신다. 최고의 주연(酒宴)이다. 날씨가 맑아 좀더 더웠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지만, 계곡산행이 끝나도록 비를 뿌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꽃놀이라고 마냥 할 수야 없지. 다시 일어나 능선 오르는 길을 찾아 들었다. 한차례 땀을 뽑고 나니 능선이다.
^ 저 좀 봐 주세요 - 요염덩어리 털중나리.
숨을 돌리고 구만산 정상을 향해 간다는 것이 반대로 방향을 잡고 말았다. 지척의 정상에 등을 돌리고 하산길로 들어선 것임을 잠시 후에 알아차렸지만 구만 정상이야 조그마한 돌덩이에 구만산이라고 쓴 것 밖에 더 있남, 게다가 한 두 번 올라본 것도 아니고, 그래서 가던 길 계속 가기로 하자.
봉의 저수지가 보이고 인곡산장이 눈에 들어 온다. 인곡산장에서 개를 잡아 먹던 날, 술에 꼭지가 돈 백곰이 한 밤중에 자기는 산에 가야 한다며 배낭메고 나서는 것을 말리느라고 혼쭐이 났던 일이 생각난다. 그렇게 산을 좋아하던 친구가 시나브로 산에 발길을 끊은지 2년이 넘어 가네.
^ 조록싸리 - 뿌리고 지나간 비가 방울되어 잎마다 가득하다.
좌측사면으로 급한 비탈을 내려 오니 바로 차를 주차했던 민박집으로 내려 선다. 개울에서 대충 씻고 민박집에 들려 맥주로 목만 축이고 길을 나섰다.
물이 제 맘대로 흐르는 것 같아도 물은 물리적인 법칙에만 따라 흐를 뿐이다. 인연의 맺어짐도, 인연이 다함도 물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산도 인연으로 오르고 사람도 인연으로 만나고 헤어지겠지만 산이 있는 동안 산을 찾을 것이고 인연이 이어지는 동안 마음을 다할 것이라. 달리 행하고 말할 것이 무어랴.
첫댓글 자연처럼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름이 가장 좋은거라합디다^^ 캬~제가올려놓고 제가 감탄합니다 그려~ 하하하
한파람 인연의끝 바람결에 띄워놓고 구름처럼 물처럼 흘러가는 세상만사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