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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허물어진 담장을 지나 거기 이르렀습니다. 차마 말로는 다 못할 서글픔이 거기 있었습니다. 고향에서 4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 누추한 묘지에, 프랑스의 영광스런 자녀들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어떠한 소리도 없습니다. 수업 시간에 중국인 학생들이 반복해 대는 콧소리만이 이 음산한 고요를 흩트리고 있습니다.”(부르불롱의 기록, “Relation de voyage de Shang-Haï à Moscou, ....” 중에서)
부르불롱, 정복사 묘지를 기록하다
1860년 어느 프랑스 외교관이 묘사한 정복사(正福寺) 묘지의 풍경이다. 그의 이름은 알퐁스 드 부르불롱(Alphonse de Bourboulon, 1809-77). 당시 북경에 주재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이름은 외교관보다는 여행가로서 더 유명하다. 1861년 5월부터 8월까지, 그는 부인 카트린느(Catherine, 1827-65)와 함께 북경에서 파리까지 여행했다.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19세기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긴 육로 여행이었다.
(왼쪽) 1886년에 출판된 부르불롱 부부의 여행기. (오른쪽)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 프랑스의 여행 잡지 'Tour du Monde'에 여행기가 연재되었다. 부르불롱은 프랑스 로브(l'Aube) 지방의 트와(Troyes) 출신으로 외교관이자 여행가다. 1860년 북경 주재 프랑스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그는 부인 카트린느와 함께 북경에서 파리까지 여행했다. 1861년 5월부터 8월까지였다. 시베리아를 지나 모스크바를 통과한 여정으로 19세기의 가장 긴 육로 여행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두 사람의 여행 기록을 젊은 외교관 푸시엘그(Achille Poussielgue)가 편집하여 세상에 알렸다. (이미지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fr.wikisource.org)
그가 정복사 묘지를 방문한 건 북경조약(1860) 직후였다. 그곳은 북당 프랑스 예수회의 묘지였다. 당시 북경은 한바탕 소란이 남긴 상처가 곳곳에 가득했다. 청 제국은 몰락하고 있었다. 제2차 아편전쟁으로 천진조약(1858)이 맺어졌으나 청 조정은 비준을 거부했다. 후과는 컸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이내 북경을 침공했다. 그들은 자금성을 점령하고 원명원을 철저히 약탈했다. 함풍제는 열하(熱河), 지금의 청더(承德)로 황망히 피신했다. 황제를 대신해 공친왕 혁흔(奕訢)이 영국-프랑스와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북경조약이다.
청 조정은 기존 천진조약 위에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되었다. 막대한 배상금은 물론이고 천진을 열어 조계(租界)를 설치해야 했다. 영국, 프랑스 외교사절의 북경 체류를 허용해야 했다. 선교사의 활동도 완전히 보장해야 했다. 프랑스가 별도로 추가한 사항이 있다. 청 조정이 과거에 몰수한 프랑스 교회 재산 일체를 반환하는 것이었다.
북경에는 옛 프랑스 선교구가 있었다. 북당 거주지와 정복사 묘지였다. 프랑스 외무부는 신속히 조사에 착수했다. 재산 반환을 위한 현지 조사였다. 부르불롱이 정복사 묘지를 방문한 연유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에 그곳을 둘러본 이가 있었다. 프랑스 라자리스트 물리(Joseph-Martial Mouly, 孟振生, 1807-68) 신부였다. 부르불롱보다 25년 앞선 시점이었다. 은밀한 염탐이었다.
물리, 북경에 잠입하다
물리 신부가 서만자(西灣子)에 이른 건 1835년 7월이었다. 프랑스 아미엥(Amien)을 떠나 마카오를 거쳐 온 길이었다. 지난한 여정이었다. 북경 프랑스 선교구장(supérieur de la mission française) 자격이었다. 그의 임지는 북경이었으나 북당은 이미 허물어진 상태였다. 북경 선교지는 폐허에 가까웠다. 서만자로 가야 했다. 북경의 북서쪽인 장자커우(張家口) 인근 마을이다. 북당을 떠나 온 선교사들이 거기 있었다. 중국인 라자리스트였다. 서만자에서 그는 설마태오(薛瑪竇, Matthieu Sué, 1780-1860) 신부의 환대를 받았다. 따뜻하고 눈물겨운 만남이었다. 설마태오는 북경 프랑스 선교구장 자리를 곧장 물리에게 넘겼다.
물리가 서만자에 닿기 전, 마카오의 라자리스트 장상은 북경 선교 재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우선, 북경 선교지의 정확한 상태를 알아야 했다. 그들은 물리에게 그 일을 맡겼다. 물리의 북경 잠입이 그렇게 결정되었다. 1835년 2월이었다. 북경으로 가는 길은 위험했다. 서양인 선교사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중국인 라자리스트 한요셉(韓若瑟, Joseph Han, 1772-1844) 신부가 동행했다. 북경 남쪽 고안현(固安縣) 출신이었다. 북경 인근 지리에 밝은 이였다.
그들은 주로 밤에 이동했다. 은밀하고 신속하게 움직여야 했다. 들키지 않으려 여러 가지 방법을 썼다. 물리는 밤마다 누런 찻잎으로 얼굴을 물들였다. 배와 마차 속에 두꺼운 담요도 깔았다. 물리는 거기 들어가 거동이 불편한 병자로 가장했다. 다행히 별 탈 없이 북경에 닿았다. 당시 일을 물리 신부의 서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서술은 꽤나 상세했다.
1860년경 정복사 묘지 풍경. 프랑스 라자리스트 파비에(Alphonse Favier, 1837-1905) 신부가 쓴 책 “Péking : histoire et description”(impr. des Lazaristes au Pé-T'ang, 1897) 270쪽 삽화다. 파비에는 북경교구 제13대 주교(1899-1905)였다. (이미지 출처 = Alphonse Favier, “Péking : histoire et description”, 1897)
정복사 묘지에서 사흘간 머물다
1835년 7월 12일 파리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북경에서의 일을 보고했다. 라자리스트 총장 살로르뉴(Dominique Salhorgne, 1757-1836)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거기엔 정복사 묘지에 머문 일도 담겨 있었다. 사흘 간의 체류였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묘지의 전체 모양은 장방형으로 크게 두 부분입니다. 앞쪽은 거처고 뒷쪽이 묘지였습니다. (....) 비석 몇 개는 이미 쓰러졌고, 몇몇은 심하게 부서져 있었습니다. (....) 믿기지 않은 광경은, 북경교구가 수많은 어려움을 겪은 후에도, 우리 선교사들의 영광스런 표지가 거기 여전히 솟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때는 6월이었다. 초여름 햇볕 아래서 묘지는 소슬하게 빛났다. 묘지의 마지막 보수 작업이 1777년에 있었다. 북당 예수회가 해체되고 2년이 지난 후였다. 그때 북당 선교사들은 더 이상 예수회가 아니었다. 당시의 보수 작업은 일종의 유언장 같은 것이었다. 사라져 가는 역사를 돌보는 마지막 손길이었다. 그 후로 58년이 지났다. 스러진 묘비들 사이로 퇴락한 풍경이 선연했다. 지난 시간의 풍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1835년 정복사 묘지의 모양과 구조. 물리 주교의 묘사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1835년 7월 12일, 라자리스트 총장 살로르뉴(Dominique Salhorgne, 1757-1836)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물리는 묘지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했다. 묘지는 장방형으로 앞쪽에는 거처가 있었고 뒤쪽이 묘지였다. ㄷ자 모양의 거처를 보면 오른쪽 방에 ‘도서관’이라 표시되어 있다. 거기에 북당에서 옮겨 온 장서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 "歷史遺踪 - 正福寺天主敎墓地", 文物出版社, 2007, 20쪽)
페레이라, 북경 선교지의 마지막 풍경
1821년에 즉위한 도광제(道光帝)는 부친의 금교 정책을 고수했다. 그는 어떠한 선교사도 조정에 들이지 않았다. 1826년 10월에 북경 주교 세라(Verissimo Monteiro da Serra, 高守謙, ?-1852)가 포르투갈로 떠났다. 남은 이는 이제 한 사람이었다. 포르투갈 라자리스트 페레이라(Gaetano Pires Pereira, 畢學源, 1763-1838)였다. 남경 주교였던 그는 세라의 뒤를 이어 북경 교회 재산을 관리했다. 남당과 책란(柵欄) 묘지 그리고 정복사 묘지였다. 다행히 그것들은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돌볼 이가 더는 없었다.
페레이라는 1838년 11월 2일에 사망했다. 죽기 전에 그는 교회 재산을 또 다른 선교사에게 맡겼다. 북경 러시아 정교회 수장 모라체비치(Вениамин Морачевич, 魏若明)였다. 남당 도서관의 장서와 책란 묘지 재산권이 그에게 넘어갔다. 페레이라는 마지막까지 남당을 지켰다. 그가 죽자 남당은 청 관리의 손에 넘어갔다. 집이 철거되고 성당은 폐쇄되었다. 북경 선교지의 최후였다. 그 마지막 풍경에서 물리가 까메오처럼 등장하고 있다. 페레이라가 죽기 3년 전이었다. 그가 정복사 묘지에 머문 건 고작 사흘이었다. 짧은 머무름이었지만 묘지에서 그가 받은 인상은 강렬했다.
2016년 6월, 정복사 성당 옆 공터. 정복사 묘지가 있었던 곳이다. 묘지는 의화단 운동(1900) 때 피해를 입었지만, 1907-17년 사이에 복구했다.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에 다시 큰 피해를 당했다. 묘지는 파괴되었고, 묘비는 건축자재로 사용되었다. 묘비를 다시 찾은 건 1990년대 초였다. 어느 중학교 체육관을 보수하던 중 묘비들을 발견했다 한다. 북경시 문물국(文物局)이 묘비들을 보존했고, 현재는 북경석각예술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오현석
주께서 주신 것, 주께서 가져가시니
물리는 어떻게든 묘지를 지키려 했다. 서만자에서 그는 궁리를 거듭했다. 그 와중에 사건이 터졌다. 산서(山西)의 신자 하나가 북경으로 오는 도중 체포되었다. 그의 짐 속에서 천주교 물품이 나왔다. 정복사 묘지 간수에게 전하는 물건이었다. 그 역시 신자였다. 관원들이 곧 묘지에 들이닥칠 것이었다. 묘지 앞쪽 거처에는 북당 선교사들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1827년 북당이 몰수되기 전에 옮겨 온 것이었다. 그 책들의 존재를 물리도 직접 확인한 적이 있다. 황급히 숨겨야 했다. 신자들은 모든 책을 땅에 묻었다. 묘지 앞뜰 흙무더기 속에서 북당의 책이 그렇게 썩어 갔다.
조사는 다섯 달을 넘겼다. 북경과 인근의 신자들이 줄줄이 불려 갔다. 몇은 수감되고 몇은 유배되었다. 정복사 묘지는 몰수되었다. 값나가는 물건은 모두 팔려 나갔다. 나무와 벽돌마저도 하나 둘 사라져 갔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담장과 돌문, 묘비와 제단뿐이었다. 묘비들이 온전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리는 탄식했다. 1838년 9월 18일, 대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주께서 주신 것, 주께서 가져가시니. 이는 주님의 뜻이라. 주님의 이름 찬미 받으소서!”(“Dominus dédit, Dominus abstulit: sicut Domino placuit ita factum est; sit nomen Domini benedictum!”)
북경석각예술박물관에 전시된 정복사 묘지의 선교사 비석. 정복사 묘지의 시작과 거기 묻힌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청 제국의 안뜰 10’편(2023년 9월)에서 다루었다. ©오현석
전몰자 기념비 위에서
1860년 북경조약은 19세기 선교의 신호탄이었다. 청 조정은 북경의 모든 천주교 재산을 돌려주어야 했다. 북당과 정복사 묘지도 포함되었다. 당시 물리는 직예북부대목구 주교였다. 직예(直隸)는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이다. 그는 프랑스 선교회의 중심을 서만자에서 북당으로 옮겼다. 북경 선교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는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기획했다. 준비하는 손길이 바빴다.
10월 28일, 조약이 체결되고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책란 묘지에 사람들이 모였다. 남당 포르투갈 선교사 묘지였다. 물리는 거기서 전사자의 장례 미사를 집전했다. 북경 전투에서 사망한 영국-프랑스 군인을 위한 미사였다. 성대한 행사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권대신, 연합군 고위 장성이 모두 참석했다. 장례 미사였으나 어찌 보면 승리의 기념식이기도 했다.
같은 의식이 정복사 묘지에서도 있었다. 그해 11월, 물리는 프랑스 군인 드 다마스(Count Albert-Marie de Damas)의 장례 미사를 거행했다. 북경 인근 장가만(張家灣) 전투에서 사망한 이였다. 정복사 묘지에는 전사자를 위한 기념비가 섰다. 북경의 천주교 묘지 두 곳이 이렇게 다시 문을 열었다. 선교사나 중국인 신자의 장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약한 아이러니다.
전사자 기념비는 기품 있었다. 매의 형상이 휘장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나폴레옹 3세의 상징이었다. 선교 자유를 쟁취한 승리의 기념비였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런 건 아니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수치스런 조형물이었다. 패배의 기억을 아로새긴 비석이었다. 결코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감정이었다. 묘지 주변에는 상반된 두 기운이 낯설게 떠돌고 있었다. 19세기 선교는 그 불협화음 사이를 아슬하게 줄타기했다. 중국의 20세기가 의화단 운동으로 시작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저만치, 훌쩍 밀어 보낸 시계추가 이내 되돌아오고 있었다. 한껏 밀어낸 꼭 그만큼의 힘이었다.
1860년 정복사 묘지에 세운 전몰자 기념비. 파비에의 책, “Péking : histoire et description” 269쪽 삽화다. 기념비에는 북경 전투에서 사망한 프랑스 군인의 이름이 새겨 있다. 옆면에는 나폴레옹 3세의 휘장인 매 형상을 새겨 넣었다. 이 기념비는 물리 주교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그에게 영-불 연합군 사망자는 선교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들이었다. (이미지 출처 = Alphonse Favier, “Péking : histoire et description”, 1897)
지금의 정복사 성당. 조립식 성당과 공터가 있던 자리에는 새로운 성당이 들어서 있다. 건축 공사는 끝났지만 준공 검사가 남아 있다고 한다. 지난 12월 초에 방문했을 때 모습이다. 봄에는 문을 열 것 같다. ©오현석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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