焉耆回族自治县 (2) 바이두백과 번역
<출처 : http://baike.baidu.com/view/49134.htm>
【社会发展】사회발전
焉耆县现辖三镇、五乡、二国营牧场。驻县单位有河南油田、兵团农二师工商企业、农业团场,以及巴州直属骨干企业等。改革开放以来,焉耆地区经济发展迅猛,经济实力逐年增强,人民安居乐业,生活水平不断提高。
언기현에는 삼진, 오향, 두 개의 국영목장이 있다. 현소재지에는 하남유전, 군수농이사 공업기업, 농업조합 및 파주직속의 중요기업등이 있다. 개혁개방이래, 언기지역경제발전은 매우 빨리 이루어졌고, 경제적인 역량또한 매년마다 증강되었다. 인민들은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였고, 생활수준 또한 꾸준히 증가하였다.
焉耆是南北疆重要的物资集散地之一,是相邻的和静、和硕、博湖等县和兵团农二师八个团场的商贸中心。这里交通便捷,通讯发达。境内314、218国道和南疆铁路交错汇集,横贯南北,与库尔勒机场相距60公里,航空运输也十分便利。邮电通讯实现了数字微波,光缆传输等现代化手段,程控电话和无线移动电话把焉耆和世界紧密相连。
언기는 남북신강의 중요물자가 모여있는 곳 중의 하나이다. 화정, 화석, 박호(박사등호)와 병단농이사의 팔개 단장의 상업교역중심과 근접해 있다. 이곳의 교통은 편리하고, 통신이 발달하였다. 경내에는 314, 218 국도와 남신강철도가 서로 교차하는 곳으로 가로로 남북을 관통하고, 쿠얼러 공항과 60km떨어진 곳에 있어, 항공운수역시 매우 편리하다. 전자통신은 숫자의 마이크로웨이브를 구축하였으며, 광케이블 송신등의 현대화 수단, 유선전화와 무선 이동전화가 언기를 세계와 끊임 없이 연결시켜준다.
焉耆物华天宝,水土丰沃,自然资源十分丰富。自古以来,闻名遐迩的焉耆马就盛产于此;被自治区权威部门命名为“焉耆甘草”的优质野生甘草遍布境内,畅销国内外。发源于天山南麓的开都河自西向东,流经全县,蕴藏着巨大的水力和水利资源,开都河上游建设的大山口水电站,为焉耆地区的经济发展,提供了充足的电力保障。焉耆盆地的石油储量可观,石油勘探取得突破性进展,已被国家正式命名为“宝浪油田”,石油工业的发展前景大有可为。现以探明的矿产资源有:石油、天然气、煤炭、水晶、云母、铜、红柱石、绿柱石、稀土等几十种,储量丰富,品位上乘;野生药用植物有甘草、紫草、党参等100多种。
언기는 물자의 보고이며, 물과 토양이 풍부하며 비옥하고, 천연자원이 매우 풍부하다. 옛 부터, 유명한 인근의 언기마는 이곳에서 많이 생산되었다. 또한 자치구권위부에 명명되어진 우수한 품질의 야생감초는 경내에 널리 보급되었고, 국내외로 왕성하게 팔리고 있다. 천산남록의 개도하가 서에서 동으로 발원하고, 현 전체를 흐른다. 거대한 수력과 수질자원을 가지고 있어, 개도하 상류에 건설한 대산구 수력발전소는 언기지역의 경제발전을 위해 풍족한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언기분지의 석유 매장량은 가히 주목할 만하다. 석유탐사는 많은 진전을 얻고 있고, 이미 국가에 의해 정식으로 “보랑유전”으로 명명되어져, 석유공업발전 전방이 매우 낙관적이다. 현재 탐사된 광물자원은 다음과 같다. : 석유, 천연가스, 매탄, 수정, 운모(돌), 동, 홍주석, 녹주석, 희토등 몇 십종으로 매장량이 품부하며, 품질또한 상급이다.
야생약용식물에는 감초, 자초, 당삼등 100여종이 있다.
【历史沿革】역사연혁
清康熙、乾隆年间,朝廷派兵屯驻巴里坤、哈密、吐鲁番,多次出兵讨伐准噶尔。当时除随军来的有部分陕甘回族兵丁外,还有随军差役及赶车吆驴运输器械、粮袜的陕甘回民,以及随军作生意的回民小商贩。
청강희, 건륭년간, 조정에서 병사를 파견하여 파리곤, 합밀, 토로번에 둔전을 세우고, 여러차레 출병하여 준가르왕국을 토벌하였다. 당시에 군으로 온 일부의 섬서,감숙 회족병정들외에 군을 따라온 부역들및 운수기계와 식량을 운반한 섬서와, 감숙의 회족민들, 군인들에게 장사를 하던 소상인들이 있다.
乾隆二十三年(1758),清廷平定准噶尔叛乱后,清政府在“屯兵戍边”的同时,实行“移民实边”方略,自嘉庆至咸丰的60余年中,从陕、甘一带迁至北疆不少民户,这些人中有些以后流落到焉耆。由于开都河水源充足,河两岸土地肥沃,牧草遍地,牛羊成群,是个适于生存的好地方,人们便定居了下来。
건륭 23년 서기 (1758) 청연평정년간에 준가르가 반란을 하였을 때, 청정부가 둔전병으로 그곳을 멸한 동시에, 전면적인 정책의 일환으로 이민정책을 실시하였고, 가경으로부터 함풍까지의 60여년중, 섬서과, 감숙일대로부터 북신강으로 적지않은 민호들이 이주해 왔다. 이 사람들중에 일부는 후에 언기로 들어왔다. 개도하의 수원이 풍부하고, 강의 양 연안의 토지가 비옥하며, 목초가 여기저기 널려있으며, 소와 양이 무리를 지어다녔기 때문에, 살아가기에 매우 좋은 지방이었고, 사람들은 곧 이곳에 정주하기 시작하였다.
据现年80岁的回民老人马俊说:他的老家在陕西,迁住焉耆至今已是第八代。他的爷爷在世时,给子孙们讲全家迁来焉耆的情况:先住北疆,后听到人们讲焉耆富庶,平地上流淌着一条大河水,城四周是割不完的柴草,庄稼地边能放牛羊,是个过日子的好地方,便举家来到此地。那时每年都有十户、八户的人迁来。以后清政府从临潭、固原地区迁来制船的木匠和船夫,还在这里修了礼拜寺,回族人口逐渐增多。道光二十三年(1843),经喀喇沙尔办事大臣全庆奏请清廷撤回屯兵丁口302人,改招西宁、临夏、固原、平凉一带来此的回民商贩眷属近百户耕种屯兵田。以后不断有退伍的兵丁留下来,在这里务农、放牧、经商、营工谋求生存发展。世代相传繁衍不绝,逐渐变成当地的土著,自称口外人。
금년 80세의 회족노인 마준의 말에 따르면: 그의 본향은 섬서이고, 언기로 이주한지 이미 8대가 흘렀다. 그의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때에, 자손들에게 온 가족이 언기로 이주해온 일을 이야기 해주었는데 : 먼저 북신강에 살다가, 사람들이 언기가 풍요롭다는 말을 들었는데, 평지에 큰 강이 흐르고, 성의 사방에는 다 베지못한 뗄감과 나무, 잡초들이 있고 농작물이 있는곳에 소와 양을 방목하였는데, 매우 살기 좋은 곳이어서, 즉시 온 가족이 이곳으로 왔다.
당시에 매년 모두 10호, 8호의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그 후에 청 정부가 임담, 고원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옷 배를 만드는 목수와 뱃사공으로 이곳에서, 예배사를 수리하여서, 회족인구가 점차 증가하였다. 도광 23년 (1843), 객라사이를 거쳐 대신 전경진이 청조정에게 회족둔전병 302명을 철수하게 하여 다시 서녕, 임하, 고원, 평량일대로 온 회족상인들의 가족은 근방의 백호경종 둔전병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에 끊임없이 군역이 끝난 병들이 이곳에 그대로 남았고, 이곳에서 농업과 유목, 상업 공업으로 생계를 꾸리고 발전하였다. 세대가 대대로 매우 번성하였고, 점점 현지의 토호로 변해갔다. 자칭 장성 이북사람이라 하였다.
光绪三年(1877),陕西渭南回民起义领袖之一白彦虎(后投靠阿古柏侵略者)与清军对抗15年,终遭失败,在清兵追击下,通过焉耆西撤。清军把浩罕侵略者阿古柏从乌鲁木齐、哈密、吐鲁番各城裹胁的回族、蒙古族群众及白彦虎余部安置在焉营。左宗棠请示清廷设立抚揖善后局,资助这些人在此地定居生活,主持抚揖善后工作的费道周,还从关内招募回民数百户,资助耕牛、农具、种子及生活物资,让其定居。仅此两项共安置回民男2200余丁、女1600余口。这是迁入焉营的最大的一批陕西回民,这些人初到焉耆经营农牧业和商业。
광서 3년 1877년 섬서위남회족들이 영수 백언호(후에 아고백에 의탁하는 침략자)와 봉기하여 15년간 청군과 대치하였다. 결국은 실패하였고, 청군의 추격아래, 언기를 통하여 서부에서 흩어졌다. 청군은 호한침략자 아고백을 우루무치, 합밀, 토로번 각성의 협조한 회족, 몽고족의 무리들 및, 백언호의 남은 잔당들을 언기에 안치하였다.
좌중당은 청조정에게 청하여 무읍선후국을 설치하고, 이사람들이 이곳에 정주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으며, 무읍선후공작의 비용을 책임지고 지지하였다. 그리고 관내로부터 회족 수백호를 모집하여, 밭갈 소, 농기구, 종자및 생활물자를 지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주하게 하였다. 대략 안치한 회민 남자가 2200여명, 여자가 1600여명이다. 이 숫자는 언기영으로 이주한 가장 큰 규모의 섬서회족민이며, 이사람들은 처음에 언기에서 농업과 목축업 상업에 종사하였다.
光绪二十年(1894),青海回民领袖马琳、韩文秀、马骥、刘同春(又称刘四、刘四伏)、冶诸麻等率数万群众,反对清政府的民族压迫和苛捐杂税在河湟起义,在清军追剿堵击下,转战于循化、河州、狄道、西宁,后出水峡,取道青海柴达木,受尽饥寒之苦,辗转到新疆罗布泊,在和尔昂(地名),刘四等战败被俘,义军失败,清政府收抚数千人。这批人员先被安置在尉犁蒲昌一带,后转移铁干里克。因该地当时沙荒遍地,人烟稀少,年年欠收,人们生活困苦,不多几年,部分人逃走。光绪二十九年(1903),焉耆知府刘嘉德将他们迁到开都河南岸水草肥美的马场台(原是官办养马草场),并将此地命名为抚回庄。现在城南郊的西宁回民,就是这部分人的后裔。
광서 20년 1894, 청해 회민 지도자 마림, 한문수, 마익, 유동춘(유사,유사복이라고도 칭한다.)야저마등이 수만의 군중을 이끌고, 청정부의 민족박해와 과도한 세금납부에 반발하여 하황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청군이 추격하여 토벌하자, 전쟁은 순화, 하주, 적도, 서녕으로 소식이 다시 반란이 일어났고, 후에 수섬으로 나아가 청해의 자달목을 점령하고, 배고픔과 추위를 지겹도록 격었으며, 결국 신강의 라포박을 전전하다가, 화이앙(지명)에서, 유사등이 패전하여 포로가 되고, 의병은 실패하였고, 청정부는 수천의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돌보아주었다.
이들은 먼저 위리포창일대에 안치되었으며, 후에 철간리극으로 이주하였다. 당시에 그곳이 모래가 뒤 덮여 경작할 수 없는 지역이 대부분이 었고, 인구는 희박했으며 매년마다 빚이 늘자, 사람들의 생활은 점점 곤궁해 졌다. 몇 년이 가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망가고, 광서 29년(1903), 언기지부 유가덕이 그들을 개도하의 남안인 초목과 물이 매우 풍족한 마장태(본래 말이 먹을 풀을 기르던 곳)으로 이주시키고, 그곳은 무회장으로 명명하였다. 현재 성의 남쪽 교외의 서녕회민이 그 후예들이다.
民国17年(1928),甘肃固原地区回族新老教派掀起争战,不少人流离失所,有些人流入焉耆定居。民国22年(1933),随马仲英人疆的回族兵,部分留居在焉营。民国28年(1939),甘肃固原发生大地震,有不少固原回民来焉耆寻亲落户。国民党军队人疆后,有不少开小差和被裁减的回民官兵也在焉耆落户。新中国成立后,更有不少甘肃、青海和宁夏的回民寻亲访友,来此落户。
1953年第一次全国人口普查时,焉耆县有回族人口9112人。到1990年第四次全国人口普查时,全县回族人口达24209人。
중화민국17년(1928), 감숙고원지역의 회족 신노교파가 전쟁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들이 집없이 유랑하고 있었는데, 일부 사람들은 언기에 들어와서 정착하였다. 중화민국22년(1933), 마중영의 회족군인들의 일부는 언기에 남아 거주하였다. 민국28년 (1939) 감숙고원에 대 지진이 발생하여, 적지않은 고원의 회족들이 언기에 와서 친지를 찾고 눌러 살았다. 국민당군인이 신강에 들어온 후, 많은 수의 탈영병과, 해고당한 회족관병 역시 언기에 정착하였다.
신 중국이 성립된 이후, 적지않은 감숙, 청해 그리고 영하의 회족들이 친지와 친구를 찾아와서 이곳에 정착하였다.
1953년 제 1차 전국인구조사에서, 언기현 회족인구가 9112명이었다. 1990년 제4차 전국 인구조사에서, 회족의 총인구는 24209에 달했다.
<출처 : http://baike.baidu.com/view/49134.htm>
첫댓글 (윗글)도광 23년 (1843), 광서 3년 (1877),광서 20년 1894,광서 29년(1903), 중화민국17년(1928), 에 회족의 이주와 반역진압 사건이 있었는데, 이 기간동안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하였던 것을 청과 중화 민국의 역사로 조작 시킨것으로 추정됩니다.
(1851~64).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