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 생가를 찾아서
그다지 춥지 않은 소한을 넘긴 일월 첫째 목요일이다. 그제 산행을 같이 다녀온 벗과 강변 트레킹을 나섰다. 이번에도 마산역 동마산 병원 앞에서 함안 대산으로 나가는 농어촌버스를 타기로 했다. 날이 덜 밝아온 새벽에 마산역으로 나가 번개시장 들머리에서 김밥을 마련해 약속 장소에서 벗을 만났다. 교외로 나가는 새벽 농어촌버스는 회사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다수 타고 내렸다.
우리는 버스가 칠원 읍내에서 시골길을 달려간 대산면 소재지를 지난 구혜에서 내렸다. 남강 하류를 가로지는 송도교를 건너니 의령 지정면이었다. 마산마을에서 강둑을 따라 산언덕 교회를 지나 다시 강둑에서 둔치로 내려 자전거 길 따라 걸었다. 4대가 사업 때 남강은 낙동강 지류라 포클레인이 모래를 퍼내지 않은 데라 둔치 경작지가 온전히 남아 하천 생태가 보존된 지역이었다.
남강 하류는 오래 전 남강댐을 건설하기 이전에는 여름이면 강물이 수시로 범람했을 상습 수해지역이었지 싶었다. 남강댐이 건설되어 통영이나 거제까지 안정된 식수를 공급하고 지리산권에 비가 많이 오면 남강의 물은 사천만으로 흘러 보내 홍수 걱정을 들고 수력 발전 전기도 생산하고 있다. 이후 4대강 사업까지 마쳤으니 강변 모래밭은 옥토로 바뀌어 비닐하우스 농사를 잘 지었다.
산모롱이와 제방을 따라 걸으니 아침 햇살이 퍼지는 풍광이 황홀할 만큼 멋졌다. 강변의 모습은 햇볕 방향이나 안개 유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졌다. 건너편은 내가 몇 차례 걸었던 대산면 장포 들판과 강둑으로 용화산 북향에는 함안 조 씨 문중의 합강정과 반구정이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찾아가는 남강 하류 지점은 한강으로 치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같은 곳이다.
강 언저리에는 의미 깊은 빗돌이 두 개 서 있었다. 홍의장군 곽재우 업적을 기린 보덕각과 정인홍 휘하 장수 손인갑과 그 아들의 순절을 기리는 쌍절각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을 함락한 왜구 본진은 밀양과 청도를 거쳐 새재를 넘어갈 때 일부는 뱃길로 낙동강을 거슬러 남강으로 진입했다. 의병장 곽재우가 이순신이 옥포에서 거둔 승리보다 하루 먼저 거둔 승전 현장이었다.
우리는 정려각 앞에서 배낭을 풀고 앉아 잠시 쉬면서 43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전투 모습을 그려봤다. 두 갈래 물길이 합수하여 흐르는 동쪽은 남지읍으로 아파트들이 아스라이 보였다. 쉼터에서 일어나 강둑을 따라 걸으니 4대강 사업으로 정리된 둔치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행정당국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발상지답게 공원 이름이 ‘호국 의병 체험 숲’으로 명명했다.
강변에 형성된 충적토 농지엔 성산마을이 위치했다. 성산마을에서 낙동강 본류를 거슬러 오르는 자전거 길이나 산책로는 없어 내륙으로 들었다. 강변이지만 산골 같은 곳이 두곡리였다. 그곳은 해방 직후 북한의 어문 정책을 수립한 인물인 이극로 선생 태생지다. 그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해방을 맞아 이념이 달라 북쪽을 선택한 분단의 아픔이었다.
마을 어귀에는 이극로 집안 전의 이 씨 무덤에는 같은 항렬인 ‘나라 이름 노(魯)’자가 눈에 띄었다. 동구에는 마을회관을 비롯한 공원을 조성하는 중이었고 두곡교를 지난 남향 대나무 숲 아래 이극로 선생의 생가가 나왔다. 마을의 길 이름도 이극로 아호 ‘고루’를 딴 ‘고루길’로 붙여져 있었다. 한 노인을 만났더니 예전엔 전의 이 씨 집성촌이었는데 근래는 타성도 귀촌해 왔다고 했다.
산 고개를 두 개 넘으니 한국전쟁 낙동강 전선 최후 보루였던 박진이었다. 박진교를 건너 월평에서 나오는 군내버스를 타고 남지로 갔다. 벗의 초등학교 동기가 운영하는 강변 민물횟집에 들려 향어회를 시켜 맑을 술을 비웠다. 근처 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는 후배가 합류해 그간 밀린 안부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해는 서산으로 기울었다. 시외버스로 마산 닿으니 어둑했다. 2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