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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4: 4 자기 나무 아래 앉을 것이며 - 미 4: 5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미 4: 4 자기 나무 아래 앉을 것이며 -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
1]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세상은 약탈자와 침략자로 인해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평안히 거할 수 없다.
그러나 메시야 왕국에서 자연스럽게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밑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평안히 쉴 수 있다는 것은 솔로몬 시대에 누렸던 평화롭고 번영된 나라를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선지자 스가랴가 선포한 메시야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 왕상 4: 25 -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 슥 3: 10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메시야 왕국에서는 이스라엘이 솔로몬의 통치 시대에 누렸던 것처럼 번영과 평화가 넘쳐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힘이 있는 자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지배하며 약탈하지만, 메시야 왕국에서는 의롭고 공평하신 메시야가 평화로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2]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이는 앞서 언급된 모든 말씀을 보증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모든 것이 황폐해질 것이라는 선언을 들은 유다 백성들에게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본문의 말씀은 전혀 믿기지 않을 사건이었다(Calvin).
그러나 그것은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결코 변개 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이 약속은 변치 않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보증이다.
미 4: 5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
본 절은 미가가 예언한 메시야 시대의 사건들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의 사건임을 시사한다(Smith).
미가 선지자가 본 절에서 '만민'을 언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2절의 '많은 이방'과 연결되는 것으로 유다 백성의 삶이 필연적으로 이방 국가들과 상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방 국가와 유다는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Smith).
1]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이름'(쉠)은 그 이름 소유자의 인격, 본질, 속성, 영예 등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만민'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 곧 우상의 능력으로 살아간다.
2]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는 메시야 왕국에 들어간 자들이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며 여호와의 능력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McComiskey, Delitzsch).
* 슥 10: 12 -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전능하심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성품을 드러내셨다.
메시야 왕국을 소유할 여호와의 백성들은 만군의 주가 되신 전능하신 여호와의 능력 안에서 행하게 되므로 온전한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상의 빛이 되자.
미 4: 1-5
심판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가지거나, 심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성경은 늘 선지자들을 통해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미가 선지자 역시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결코 주의 백성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과 회복을 주시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하여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가 구원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미가는 1-3장까지는 혹독한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당시의 백성들이 미가의 메시지를 귀담아들었다면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이 되었음을 마음으로 정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였다.
이 같은 메시지는 환희와 감격을 가져다주었다.
죽었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에 살 수 있다는 메시지는 모든 사람의 삶에 희망이 되었다.
우리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전해 졌다. 즉 예수님을 영접하면 살길이 열린다는 것으로 환희와 감격을 가져다주는 메시지였다.
절망으로 가득 찬 곳에 희망의 메시지가 전달된 것이다.
미가 시대에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소위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의 것을 착취하고 심지어 선지자들도 거짓 예언으로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런 절망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구원 메시지가 전해졌다.
본문의 메시지는 예전에 선포된 메시지와 전혀 다른 것을 보여 주었다.
매우 가혹하던 분위기에서 구원에 대한 기대로, 메시지를 듣는 대상이 부패한 예루살렘 지도자들이었던 것으로부터 신실한 남은 자들로 바뀌어졌다.
3장 9-12절 말씀은 시온이 죄로 물들었으므로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선포했으나 4장에서는 시온이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으로 가득 찬 곳이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또한 성전의 산은 광야와 같이 되었지만, 그날이 오면 여호와의 전의 산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악행은 세상의 으뜸이지만 시온은 세상의 모든 산들의 꼭대기가 될 것이다 라고 했다.
비록 이스라엘은 시온을 죄인들의 소굴로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시온을 자기 가르침의 중심지로 삼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수수하여 부당한 판결을 일삼았지만, 여호와의 통치는 공평하고 합리적이어서 모든 사람을 만족케 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런 말씀의 비교를 통해 주님의 백성들이 갈망해야 할 진정한 통치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시온이 세상의 중심지가 되어 여호와의 통치가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시온이 무엇 때문에 세상의 중심지가 됩니까?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다. 가나안에는 예루살렘보다 훨씬 높은 산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도 시온이 가장 높은 산으로 군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즉 누가 있는지가 그곳을 으뜸이 되게 만든다.
집도 마찬가지다. 그 집에 누가 사는 것이 중요하지, 그 집의 크기나 건축 자재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같은 이치이다.
기독교인의 삶이 매력적이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와 함께 하시며 그의 삶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삶 속에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을 소망했던 것을 본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이제 자신 안에는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수님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자신 된 것은 예수님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즉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은 자신이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예수님께서 존경받을 만한 분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이 빛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시온이 영화롭다고 하는 것은 믿는 자들의 가치가 믿는 자들 때문이 아니라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신을 죄인 중 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그분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존재 가치는 오직 주님을 통해 빛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선지자들은 이 같은 사실을 끊임없이 선포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여호와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민족을 초월 하고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미가 선지자는 온 세상 민족들을 초청하고 있다.
이제 초청에 임하는 것은 열방의 선택이며 몫이다. 초청을 받아들이면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게 되지만 초청에 임하지 않으면 자신들만 손해이다.
열방이 초청에 임하는다는 것은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열방이 순례의 길에 오른다는 것은 자신의 본거지를 떠나야 한다. 떠나지 않고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
성도의 삶이 그렇다. 내가 익숙해 있는 환경에서 떠나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버리고 싶지 않지만 버려야 할 때도 있다. 이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근거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만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이 같은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롯의 아내였다. 그는 구원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해, 더 좋은 것을 얻지 못하고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에도 이런 자들이 있다.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때를 놓치는 자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인 백두산에 가면 천지라는 호수가 있다. 이 천지에서 시작해서 좌우 양편으로 두 개의 큰 강이 흐르고 있다. 왼쪽으로 흘러내리는 것은 황해로 연결되는 압록강과 동쪽으로 흘러 동해로 연결되는 두만강이다.
그런데 백두산 천지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조금만 서쪽으로 기울어지면 압록강으로 흘러가게 되고 반대로 조금만 동쪽으로 기울어지면 두만강으로 들어가게 된다.
처음은 천지라는 호수 속에 있었지만 얼마 뒤에는 수 천수만 리 떨어지게 되고 만다. 그 이유는 서로 간에 선택한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가는 길이 달랐기에, 그 결과도 역시 엄청나게 달라지고 만 것이다.
이처럼 어느 길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내가 다다르는 종착역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본문 1절에서 미가 선지자는 이방인들이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습을 “몰려가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표현은 강물이 범람하여 밀려오듯이 예루살렘을 향해 오고 있다는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대한 갈증이 단숨에 예루살렘으로 오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편안하고 익숙한 자리를 박차고 하나님의 도를 배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또한 그들은 시온에서 배운 말씀으로 시온에 머무르지 않고 말씀과 율법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갔다.
즉 2절 하반 절에 말씀하기를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라고 말하고 있다.
시온이 그들을 양육하는 훈련 장소였다면, 세상은 그들의 사역지였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 교회는 우리가 훈련받는 훈련 장소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지는 세상이라는 사실이다.
나의 가정, 학교, 직장이 나의 사역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망각할 때 우리는 신앙인으로써 바른 삶을 살지 못한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부르셨다. 문제는 상당수의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소금과 빛은 될지언정 세상의 소금과 빛은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일주일 내내 교회 중심으로 생활하고 교회 행사를 중심으로 삶을 꾸려 나가는 성도들을 목격하게 된다.
이들은 교회 생활에 바빠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시간이 없다. 교회 생활이 보람 있고 재미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물론 교회 생활을 즐기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교회 생활이 현실 도피나 성도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일을 회피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워서 남에게 전달해 주어야 한다. 나도 깨달아야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끊임없이 나누어주어야 한다.
시온에서 훈련받은 백성들은 흩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자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교회 안에만 안주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흩으셨던 것을 본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훈련을 통해 잘 양육 받아 세상 속에 나가 그들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라고 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성도가 되기 위해서 교회 생활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이제 세상에 나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내가 훈련받은 대로 양육 받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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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