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우금티 영산재 봉행안
일시 2014년 10월 9일 목요일 오후 2시~5시
장소 공주시 금학동 우금티 동학혁명탑전
주관 원효사. 주최 공주불자회. 협찬 영산중재회. 공주차회
조금 이르다 싶은 감이 있지만
미리 계획을 세우고 검토하는 차원에서
올해로 두번째 봉행하는 우금티 영산재가
10월 9일 한글날로 잡혔습니다
지난해는 우금치로 사용하였는데
요즘은 우금티로 하는 추세인지라
우금티 영산재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난해는 10월 3일날 영산재를 모셨는데
이날을 전후해서는 공주와 부여에서 열리는
백제문화제와 겹치는 날이어서
10월 9일 한글날로 정하였습니다
한글날도 이제는 공휴일이 되어서
개천절 못지 않은 의미가 있다 여겨집니다
우금티 영산재에 맞추어 동학혁명탑 비석에 있는
비문의 내용을 광고용 스텐판에 제작을 하여
탑 앞에 비치해둘 생각도 해 봅니다
비석에 적힌 내용 가운데
73년에 제작되어 한자로 된 부분이 많은데다
박정희대통령. 시월유신. 오일육혁명 등 글자가
정으로 쪼아져서 알아볼수 없는 비문이 되었기에
이번 행사 경비를 아껴서 만들어 비치하면
오고가는 관광객이나 문화답사차 온 학생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관계기관에다가 그렇게 하면 좋지 않겠나
의견만 내던 수준에서 나아가 누군가 하지 않으면
나라도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지 못할 일 가운데 하나는
주차장 한켠에 급수대를 설치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공주시장님을 만나는 때 건의할 생각입니다
몇해전에 공주시에서 애를 써서
음악이 나오는 최신형 화장실을 만들고
작은 벤치 네개와 주차장을 꾸미는 등
동학혁명탑 앞을 정비하는 과정 가운데서
화장실에 사용하는 물이 모터를 이용해
지하에서 끌어 올린 청정수이므로
그 선을 하나 빼서 급수대나 세면대를 설치했다면
우금티 맑은 물을 뜨러 오는 분들도 있었을 것이고
우금티에 오신 분들의 갈증을 달래주기도 하면서
혹시라도 우금티 주변에서 야영을 하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아쉽게도
급수대는 설치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릅니다
물론 관계기관에서 앞으로 우금티사적지를 정비하고자
여러가지 계획이 있을 것으로 사료되기는 하여도
우선 당장 이용하는 주민이나 학생들 참배객들을 위한
작은 배려 하나가 관광 고도공주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라 생각합니다
지난해 행사때에는 여러 대덕 스님들과
이번에 당선되어 취임한 오시덕 시장님도 오시고
충남도의 윤석우의원과 시 의회 의원들,
관심있는 교수님들 및 지역사회 여러 인사와
많은 불자들이 기꺼이 동참하여 주셨기에
성황리에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었는데
아마도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서
우금티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힘이 되어 주실것으로 기대합니다
올해도 우금티 영산재를 위하여
충남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내포영산재의
영산중재회 보명스님과 이십여분의 스님들이
함께 오셔서 이번 행사를 봉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시련과 괘불이운및 상단 불공 후에 봉행하는
시식을 마치고 나면 사뤄올릴 영가님들의 옷을
만벌 가량 접을 종이를 준비하려 하였는데
이 바지저고리용 종이는 대전에 사시는
우당거사님이 지난 주에 재단하여 보내주셨으니
초하루와 칠석기도및 백중 우란분절을 전후로 하여서
불자님들에게 나누어 드리고 행사 전까지
바지저고리를 접어다 주십사 부탁할것입니다
오늘도 다녀가신 불자님이
약 이백여벌을 접을만한 종이를 가져가셨기에
여럿이 나누어 접기로 하면 그리 큰 일은 아닙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준비하여서
지난해보다는 올해가 더 성대하고 의미있게 하며
다음에는 공주시 전체의 문화축제 형태로 발전해서
우금티의 고혼들을 달래주는 행사가 되기를 발원합니다
갑오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으므로
올해가 동학혁명 발발 12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일갑자로 치면 벌써 두번의 갑자가 지나는 시간입니다
우금티의 모습은 시간을 지나면서 달라졌지만
그날의 함성과 열정만큼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고
앞으로도 조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는 견인차가 되고
뒤에서는 힘차게 굴려주는 수레바퀴가 되어서
미래를 밝히는 자주와 자유와 자립의 함성이 될것입니다
10월 9일 우금티의 날이 좋으면
스크린 인쇄로 조성하여 만든 괘불이 아닌
잘 조성된 원효사의 괘불을 내걸고 영산재를 봉행하겠습니다
다음은 우금티 비문 내용입니다
우금치(티) 비문 앞면 내용
인내천과 사민평등의 종지아래 후천개벽의 혁명정신으로 무장하고
동학교주 전봉준이 호남의 만석보 기슭에서 수천의 농민군을 편성하여
첫 봉화를 든 것은 갑오(서기 1894년) 정월 10일. 20일께는 다시 대거하여
백산을 점거하고 습격해오는 관군을 격파하면서 승승장구 .4월말에는
전주성까지 함락하게 되니 혁명의 성공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하였다.
그러나 청일 양국의 무력간섭 아래 이 나라의 국권마저 위협받게 되자
정부 측이 먼저 화해하기를 청하니 우국애민의 일념에서 동학군은
마침내 양보하여 전주성을 내어주고 그 여력을 지방 조직에만 기울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군국주의 일제의 엄청난 야욕은 돌연
남의 나라 주권을 침해 독점하고자 날뛰게 되니 정녕 국가의 명맥이
통틀어 풍전등화가 되고 말았다. 이에 한동안 후퇴했던 동학군은
드디어 항일 구국의 독립군으로 재무장하고 총궐기하였다,
남북접이 호응 합세하여 20만의 대병력을 논산평야로 집결시키고,
전봉준과 손병희 두 통령의 작전지휘아래 서울까지 진격하는
주요거점으로 공주성부터 공략하게 되었다.
그 결과 10월 하순부터 전개된 공주성의 대공방전은
이 우금치(티)를 중심으로 날이 갈수록 처참하고 가열하게 됐다.
한 고지의 주인을 4.50차례나 바꾸어 가면서 세계전사에
유례없는 격전을 되풀이하였다.
그리하다가 새로 투입된 일본군의 증원부대가 근대의 무서운
살인무기 기관총으로 연속 맹사격을 퍼 붓게 되니 악전고투하기
3일 만에 동학군은 막대한 희생자를 내인 채 전우들의
시산혈하를 넘어서 11월 11일 논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대망의 혁명 사업이 여기서 좌절당하고 계속되는
추격과 살육 속에 위국단침조차 알아줄 이 없었다.
그러나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 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 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이 탑을 세우노니
오가는 천만대의 후손들이여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서기 1973.11.11
제자題字 대통령 박정희
글 문학박사 이선근
글씨 양재한
동학혁명 위령탑 건립위원회 세움
우금치(티) 비문 뒷면 내용
감사문
이 나라 이민족을 도탄에서 건져내는 동시에 이미 혼탁해진 조정을 과감하게
바로잡고 보국안민의 대업을 이룩하기 위하여 이 내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동학혁명군의 10여만 영령들을 달래고자 이 고장 공주의 갸륵한 이창덕 동덕이
누구보다 앞장서 온 정성을 바치게 되니 천도교 중앙총부는 그 뜻을 더욱 널리 펴서
성취시키기로 결정하고, 금년 6월 25일 이선근 박사를 위원장으로 동학혁명군
위령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한 다음, 이 사실을 삼가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
품신하였던바 대통령 각하께서는 위원회가 앙청한 명예위원장과 제자의
휘호를 기꺼이 수락하시고, 특히 금일봉까지 하사하시어 이일의
거국적인 의의를 더욱 빛내주시었다.
여기에 이 고장 공주의 관민 여러분과 전국 각지의 뜻있는 인사들과 동학의 후예인
천도교인들이 물심양면으로 알뜰한 정성을 모아서 일찌기 혁명군의 마지막
결전장이었던 공주읍 우금치(티) 이 자리에 위령탑을 세우기로 마련하고,
지난 9월 21일 기공한지 50일 만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일을 위하여 크게
진념해주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와 회무발전을 보살피며 탑문을 지어주신
이선근 박사는 물론이요, 이 탑의 설계 감수를 맡아주신 정인국교수와
글씨를 써주신 양재한 동덕 여러분께도 우리 천도교를 대표하여
충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해둔다.
포덕 114년 11월 11일 천도교 교령 최덕신 심고
*붉은 색 글씨.쪼아져서 알아볼수 없는 글자
-공주 상왕산 원효사 심우실에서-
(글:해월스님 사진:李海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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