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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사 원문보기 글쓴이: 신동현
단애(檀崖) 윤세복(尹世復) 선생
(1881 ~ 1960)
이 몸이 옥사한 뒤 유해를 출송(出送)거든
원컨대 동지들아 그 당시 화장하야
목단강 흐르는 물에 남은 재를 던져주
또 만일 출옥되면 갈 곳이 어디메뇨
아 백두산 기슭에 한 줌 흙이 되었다가
천진전(天眞殿) 신 건축할 제 기와 받침 하오리
- 선생의 옥중 시 가운데(1944) -
선생은 1881년 3월 29일 경남 밀양군 부북면 무조리에서 윤희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세린(世麟), 도호(道號)는 단애, 본관은 무송(茂松)이다.
선생이 태어난 때는 1876년 개항 이후 밀려오는 외세의 거센 물결에 대항하며 근대화를 모색해 가던 시기였다. 선생이 출생하기 바로 전 해인 1880년에는 김홍집을 수신사로, 그리고 태어난 해에는 박정양․홍영식 등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파견하고, 또 같은 해 김윤식을 영선사로 중국에 보내 신문물을 수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따라서 선생은 근대화라는 사회적 과제와 자주화라는 민족적 과제를 한 몸에 안고 태어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선생의 생애를 보면 이같은 민족적․사회적 과제를 방기하지 않고, 온 몸으로 안고 살아간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신분적으로 선생 집안은 경남 밀양에 기반을 둔 토착 농민이었지만, 경제적으로 밀양군내는 물론 청도․창녕․언양군 등지에 많은 농토를 가진 만석꾼으로 알려질 정도로 부유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부농의 자제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형 윤세용(尹世茸)과 함께 한학을 수학하였다. 나이 7세 때인 1886년 봄부터 15년 동안 고향의 응천재(凝川齋)라는 학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전통 학문에만 얽매어 있지 않았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선생을 전통적 지식인으로 안주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세의 침탈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었고, 또 내부적으로는 근대화를 요구하는 민중의 외침이 고조되었던 탓이다.
한국에서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놓고 다투던 청일 양국은 1894년 결국 청일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고 말았다. 나아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에는, 러시아가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여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일본과 각축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외세와 봉건정부의 침탈에 대항하던 민중층은 동학농민전쟁을 폭발시켰고, 그 물결은 질풍노도와 같이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후 이들은 의병대중으로, 또는 영학당․활빈당이라는 이름으로 반외세․반봉건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농촌에 기반을 둔 선생에게 있어 이러한 상황은 큰 충격이었다. 여기서 선생은 민중층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수용하여 조국을 근대화하는 길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그 같은 결론에 이르기까지에는 선생보다 13살 연상으로 진작부터 신학문을 공부하였던 형 윤세용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리하여 선생은 신학문을 수학한 뒤, 1903년부터 6년 동안 고향인 밀양읍의 신창학교와 대구의 협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교육 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특히 선생은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일제에게 강탈되자 이를 되찾기 위한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1909년 비밀 청년운동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한 것은 바로 그 같은 모색의 결과로 보인다.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의 주체는 민족대중이지만, 연령층으로 보아 청년층이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대동청년단은 영남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17세부터 30세 미만의 청년들로 조직되었고, 8․15 해방 때까지도 그 실체가 발각되지 않은 독립운동 비밀결사였다. 이 단체는 1907년 4월 안창호․양기탁․김구 등 서북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신민회(新民會)와 연계를 갖고 항일 민족역량을 결집하며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여기에는 선생을 비롯하여 안희제․서상일․김동삼․남형우․곽재기 등 80여 명의 동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으로도 기울어져 가는 조국의 운명을 붙잡을 수 없었고, 결국 경술국치를 당하고 말았다. 경술국치는 선생에게 큰 충격이었다. 선생은 두문불출하고 국권회복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나철이 단군을 숭상하는 민족종교로 대종교를 창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조국 독립에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선생은 대종교 교주인 나철을 찾아 나섰다. 당시 나철은 서울 간동에 거처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1910년 12월 25일 나철을 방문한 선생은 대종교의 취지와 목적 등에 대하여 듣고, 또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생각에 공감한 선생은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나철을 방문하였다. 그리고는 결국 12월 29일 대종교를 신봉하기로 결심하였다. 일제 강점의 상황에서 대종교를 통하여 민족대중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조국독립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날 저녁 선생은 본명인 세린을 국권회복의 의미를 지닌 세복(世復)으로 바꾸고, 단애라는 도호를 받은 뒤 대종교를 신앙할 것을 서약하였다.
다음해 1월 29일 나철은 선생을 참교와 시교사로 임명하여 대종교 포교에 나서도록 하였다. 이즈음 나철은 일제 식민통치 아래에서 포교활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일제의 감시와 감독 때문에 국내에서 더 이상 포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철은 선생을 서간도 지역으로 파견하여 포교활동을 벌이도록 하였다. 나철로부터 서간도 지역의 포교활동을 의뢰 받은 선생은 형 윤세용과 이 문제를 논의한 뒤, 형제가 같이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향하였다. 찬바람이 거세게 부는 1911년 2월 추운 겨울 날, 선생의 일가는 드디어 서간도로 향해 망명의 길을 나선 것이다.
서간도 환인현에 도착한 선생은 우선 학교를 세워 단군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조국 독립을 성취할 수 있는 기반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일찍 민족교육에 관심을 갖고, 국내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한 선생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서간도 환인현 서문 안에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여 대종교 포교와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동창학교는 대종교를 모태로 하는 민족학교였다. 설립자인 선생은 학생들에게, “한민족의 조상은 백두산 기슭에서 나왔다. 중국 민족이나 일본 민족은 그 지류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 국권 회복에 노력하여 부여국과 부여 민족의 독립발전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훈시하곤 하였다. 이 학교의 교장은 선생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한 예안 출신의 이원식이 맡았고, 김규찬․김동석․김진 등이 교사로 있었다. 때로는 이극로․신채호․박은식 등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이 이 곳에 머물며 교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특히 동창학교는 체육․국사․국어 등을 강조하여 교육하고 있었다. 그것은 체육교육을 통하여 독립군 전사다운 체력을 단련시키고, 국어와 국사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어는 김진이 담당하였는데, 그는 주시경 밑에서 한글을 공부하고 만주로 망명한 인물이었다. 국사는 박은식․신채호 등이 담당하였다. 이 시기 동창학교의 상황을 훗날 조선어학회 회장을 지낸 이극로는 고투40년이라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이 때 처음으로 나는 한학과 조선역사가로 이름이 높은 박은식 선생과 대종교 시교사요, 동창학교 교주인 윤세복 선생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날부터 여기에서 한어를 공부하며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등사일을 하게 되었다. 또 여기 일을 잊지 못할 것은 내가 한글 연구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함께 일보던 교원 중에는 김진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은 주시경 선생 밑에서 한글을 공부하고 조선어 연구의 좋은 참고서를 많이 가지고 오신 분이다.”
이와 같이 서간도에서 동창학교가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가 되고, 민족교육의 중심 기관이 되어가자 일제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본 영사관측에서는 선생 형제들을 협박하여 동창학교의 폐교를 종용한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이에 일본 영사관측에서는 중국 관헌들을 사주하여 동창학교를 폐교시키고, 그 곳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모두 추방하고 말았다. 때문에 선생을 비롯한 대종교 독립운동가들은 1914년 무송현으로 옮겨 갔다.
선생 일행이 이주한 무송현 백두산 기슭은 수목이 울창한 삼림 속이었는데, 이는 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이미 백산학교(白山學校)를 설립하여 이주 한인들의 자제들을 상대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던 전성규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선생의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선생의 일행은 전성규와 협력하여 백산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장래의 무장투쟁을 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여 갔다.
그런데 여기에도 일제의 마수가 미쳐 선생의 일행은 고초를 겪게 되었다. 1915년 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들에 의해 선생과 큰아들 윤필한, 그리고 전성규을 비롯한 3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인 살인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이 사건은 무송현 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조성환․신규식 등 북경과 상해 등지에서 활동하던 동지들이 선생 일행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고, 그 결과 18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출옥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선생은 대종교 2대 교주인 김교헌과 조소앙․신규식 등 30명의 만주․노령 지역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호응하여 무송현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하지만 선생은 3․1운동을 통해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평화적인 만세 시위운동으로는 민족 독립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1919년 7월 무송현에서 조직된 흥업단은 그 같은 선생의 인식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독립군 단체였다. 흥업단은 재만 동포들의 경제력을 향상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산업 진흥에 노력하는 한편,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조직한 것이었다. 대종교 교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흥업단의 단장은 김호, 부단장은 김혁이었는데, 선생은 총무로 사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특히 흥업단은 그해 12월 서일을 총재로,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하여 결성된 북간도 제일의 독립군 조직인 북로군정서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두 단체 모두 대종교 교도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업단은 인근 지역의 대한독립군비단․광복단․태극단․대진단 등 독립군 단체들과도 서로 협력하며 항일 무장투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 산하에는 송림병원이라는 병원도 있었다. 여기에는 선생의 아들인 윤필한이 의사로 근무하면서 한․중 양 민족에 대한 의료사업뿐만 아니라 독립군 단체들 간의 연락 역할도 수행하였다.
나아가 흥업단은 효과적인 대일투쟁을 위하여 인근의 독립군 단체들과 연합전선을 추진하여 갔다. 1921년 10월 흥업단을 비롯하여 대한독립군비단․태극단․대진단․광복단 등 5개 독립군 단체가 연합하여 결성한 대한국민단의 탄생은 그러한 노력의 성과물이었다. 선생은 이러한 대한국민단을 결성하는데 앞장섰고, 또 의사부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선생은 대종교 포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무송현․안도현․화전현․반석현 등지에 대종교 교당이 설치되고, 또 7,000여 명의 교우를 새로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2년 6월 대종교 전리로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독립군 단체에서 활약하면서 교세 확장에 힘쓰던 선생에게 1923년 말 대종교 2대 교주인 김교헌의 사망 비보가 전해졌다. 더욱이 놀란 것은 선생을 3대 교주로 지명하였다는 사실이었는데 선생은 김교헌을 만난 적은 있어도 대화를 나누어본 적조차 없었다.
김교헌의 유명을 받은 선생은 급히 대종교 총본사가 있는 영안현 남관으로 향하였고, 1924년 1월 22일 제3대 교주로 취임하였다. 교주로 취임한 선생은 곧 바로 대종교 교정 쇄신 작업을 추진하는 한편, 그를 토대로 항일투쟁 역량의 강화를 모색하여 갔다. 하지만 이때 일제는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단체와 그 지도자를 탄압하기 위한 조치를 강구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1925년 6월 중국 봉천성 경무처장 우진(于珍)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삼시궁송(三矢宮松)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이었다.
① 재만 한인의 호구를 조사․편성하여 서로 보증케 하고 연대 책임을 부담시킬 것
② 중국 관헌은 재만 한인이 무기를 휴대하거나 한국에 침입하는 것을 엄금할 것
③ 불령선인 단체를 해산하고, 그 무장을 해제할 것
④ 재만 한인이 소유한 총기․화약은 수시로 엄중 수색하여 몰수할 것
⑤ 불령선인 단체의 수령을 체포하여 일본 관헌에게 인도할 것
⑥ 중․일 양국 관헌은 불령선인 취체(取締)의 실황을 상호 통보할 것
⑦ 중․일 양국 관헌은 마음대로 월경(越境)하지 말 것
⑧ 종전의 현안은 쌍방이 성의를 가지고 해결할 것
이같은 내용의 삼시협정은 만주지역 독립군 단체의 활동은 물론 그 존립마저도 위협하는 것이었다. 특히 삼시협정 부대조항에 “대종교의 주요 간부인 서일이 대한독립군단의 수령으로 일본에 항전하였으니, 대종교는 곧 반동군단의 모체로서 종교를 가장한 항일단체이니 중국에서 영토 책임상 이것을 해산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것은 만주에서 대종교 교도들의 항일 독립운동이 얼마나 강력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대조항에 따라 1926년 12월 길림독군 겸 성장인 장작상은 대종교 포교금지령을 발포하였다. 이는 교주로 취임한 이래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확충하여 가던 선생과 대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선생을 비롯한 대종교 지도부는 포교금지령 해제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포교금지령이 쉽게 해제될 것 같지 않았다. 때문에 선생은 대종교의 최고의결기관인 교의회(敎議會)를 소집하여 대책을 숙의하였다. 그 결과 일시 일제와 중국 관리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총본사를 옮기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8년 1월 소․만 국경지역이자 대종교 지도자인 서일이 활동하기도 하였던 밀산현 당벽진으로 총본사를 옮긴 뒤, 교리 연구와 수도에 전념하여 갔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에는 한말 대동청년단 시절부터 동지인 안희제와 협력하여 대종교 근거지 마련에 힘썼다. 선생은 1931년 10월 안희제를 대종교에 입교시킨 뒤, 발해의 고도인 만주 동경성 일대에 토지를 구입하여 농장을 개척하게 하였다. 그것이 바로 1933년 설립된 발해농장(渤海農場)이었다. 발해농장 설립의 목적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주로 이주한 한국 농민들을 정착시켜 자작농으로 육성함으로써 독립투쟁의 인적․물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있었다.
이같은 발해농장의 경영 사업은 안희제가 주도한 것이다. 안희제는 만주 영안현 동경성 일대의 광활한 토지를 구입하여 수로를 개설하고, 여기에 한국 농민 3백여 호를 유치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5년 연부(年賦) 상환의 조건으로 토지를 분배하여 경작케 함으로써 자작농으로 육성하여 갔다. 또한 이주 농민들과 그들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농장지역에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한 뒤,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항일 독립정신을 고취하여 갔다.
이렇게 발해농장이 자리를 잡아가자 1934년 선생을 비롯한 대종교 간부들은 총본사를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여기에서 선생을 비롯한 대종교 지도부는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여 갔다. 그것은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통해 발해농장 한인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또 종교적 일체감을 조성하여 유사시에 조국 광복의 역군으로 삼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한 대종교 지도부의 활동으로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교도들의 항일 민족의식이 고조되어 독립운동세력으로 발전하여 가자 일제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더구나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과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연합군측과 힘겨운 전쟁을 벌이던 중이었으므로 그 위협의 무게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일제는 1942년 11월 19일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20여 명의 국내외 대종교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함으로써 민족운동뿐만 아니라 대종교 자체를 말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 불리는 일제의 대종교 탄압 사건이었다.
임오교변의 빌미는 1942년 9월 조선어학회 사건의 핵심인물인 이극로로부터 발송된 한 통의 편지였다. 여기에는 ‘널리 펴는 말’이라는 다음과 같은 글이 동봉되어 있었다.
“… 그런데 이제는 때가 왔다. 우리는 모두 힘을 발휘하여 대교의 만년 대계를 세우고 나아가야 된다. 이 어찌 우연이랴. 오는 복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도 큰 죄가 되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된다. 만나기 어려운 광명의 세계는 왔다. 반석 위에 천진과 교당을 짓자! 기름진 만주벌판에 대종학원을 세워서 억센 일꾼을 길러내자! 우리에게는 오직 희망과 광명이 있을 뿐이다. 일어나라, 움직이라!
한배검이 도우신다.”
일제는 ‘널리 펴는 말’을 ‘조선독립선언서’라고 하고, 또 ‘일어나라, 움직이라’는 구절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로 날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구실로 국내외 대종교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민족종교를 뿌리 채 말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선생을 비롯한 대종교 지도자들은 이때 피체되어 영안현 경무과에 설치된 특별 취조본부로 이송된 이후, 여러 곳으로 끌려다니며 1년 6개월 동안 모진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때문에 동지들 가운데 안희제를 비롯한 10명이 옥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뒤 선생을 비롯한 생존 인사들은 1944년 4월 27일부터 6월 26일까지 목단강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여기서 선생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무기형을 받고 목단강 액하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월 12일 소․만 국경을 넘어온 소련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석방된 뒤 선생은 만주에서 대종교 부활과 부흥을 위해 노력하다가 8․15 광복 직후인 1946년 1월 귀국하였다. 귀국한 후에도 선생은 해방된 조국에서 대종교 부흥을 위한 포교활동에 적극 힘쓰는 한편, 교리의 체계화를 위한 저술활동에도 열성을 보였다. 그러던 중 1960년 2월 13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