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 앉은 뒤 15분만에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란게 고작 저거다. 뭣보다 담배냄새를 싫어하고 민감하기까지 한 내게 담배를 허락받으려는 그 가상함까지 마음에 들지 않아 힘껏 째려봐줬다.
하지만 철판을 백겹은 겹쳐깔은 그 얼굴은 내 찡그린 얼굴에도 아랑곳없이 싱긋 웃어대기만 한다. 그 느글맞은 모습에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화를 내봤자 내 손해란 건 오랜 세월간 경험을 통해 터득한터였다.
"...맘대로."
내 말과 동시에 능숙한 솜씨로 담배를 가볍게 물고 불을 붙인다. 그리고 후우, 하는 한숨소리와 함께 가늘고 길게 내뱉어지는 담배연기가 어쩐지 씁쓸한 기분까지 내포한 듯 보여 내 마음은 더더욱 무거워졌다.
#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몇가지 [짧은 이야기] #
"보자고 한 이유는?"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물어보는 것이 심술궂은 반화의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좋을대로."
"우리오빠랑 왜 헤어진거야?"
내 질문에 반화는 짧아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새 장초를 꺼내 불을 붙인다. 그리고 다시 한숨과 함께 내뱉어지는 연기.
"지금 우리오빠가 어쩌고 있는지는 알아?"
하지만 역시 말이 없다.
반화와 말을 하고 있으면 어쩐지 묘한기분이 든다.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어쩐지 사람이 아닌 어떠한 다른 생물, 혹은 죽어버린 무생물에게 나 혼자 말을 거는 그런 느낌이 들고마는 것이다. 그래서 난 반화와 오랫동안 이야기 하는 것을 언제나 꺼리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할만큼 반화와 있는 것은 편한 일이다.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마치 혼자인듯한 자유로움과 혼자가 아니라는 안정된 기분이 동시에 느껴지며 침묵 그 자체를 하나의 의사소통인양 받아들이게 된다. 아마도 이것이 누가봐도 아웃사이더, 그 단어자체와도 같은 반화 주변에 항상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일거라 생각한다.
"벌써 이틀째야. 회사도 안가고, 밥도 안 먹고 그냥 방에 박혀있어. 내가 아무리 불러도, 부모님이 구슬려도 계속 그 상태야. 그래서 보자고 한거야. 오빠가 그렇게 된 이유라도 알지 못하면 내가 먼저 답답해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라구."
내 하소연에 창을 향해 살짝 틀어져 있던 시선이 올곧게 날 향했다. 반화는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는 습관이 있는 데 이것이 또한 묘하다. 뭐랄까. 반화의 시선을 받고 있으면 마치 그 시선안에 갇히는 기분이랄까, 아니면 반화의 시선으로 인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랄까. 뭐가됐든 결론은 반화에겐 아무 생각도 없다는 거지만.
"Feel이 사라졌어."
"무슨 소리야?"
"니 오빠한테는 더 이상 아무 Feel도 느껴지지 않아. 그래서 헤어지기로 했을 뿐이야."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반화, 그 자신만이 정의내린 단어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신기한거겠지만.
"행복해지는 데는 몇가지 조건이 필요해."
"조건이라니?"
"Feel과 리듬. 이 두가지가 없으면 행복은 성립되지 않아."
"반화야, 난 지금 너랑 말 장난하자는 게 아냐. 우리 오빠가 그렇게 된 이유가 듣고 싶은거라고."
답답함에 반화를 재촉했지만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그것이 듣고 싶지 않다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인거다.
"Feel이란 건 느낌이야. 물건을 사거나 무언가를 하거나 사람을 만날 때는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지. Feel이 제대로 오는 것들은 절대로 날 실망시키지 않아. 내게 상처주지 않아. 후회하지도 않아."
옛날에 반화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분명 반화는 자신이 상처받는 것을 지독히 싫어한다고 했었다.
"리듬은 일을 하거나, 공적인 일에 필요해. 능률을 높이고, 확실하게 집중할 수 있게 해주거든. 미칠것 같은 기억도 리듬만 타면 얼마든지 잊을 수 있어."
느릿하게 늘어지는 말투만큼 느릿한 동작으로 물을 조금 들이킨 반화는 세번째 담배를 물었다.
"그래서 행복해지는 데는 Feel과 리듬이 필요해. 그래서 난 Feel이 오는 사람과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모을 수 있어. 리듬만 탄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고,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어. 그래서 니네 오빠를 만났던거야. 그리고 그래서 헤어진거야. 그게 다야."
자신이 할말은 이게 전부라는 듯 다시 반화의 시선은 창밖을 향했다. 그리고 그 묘한기분도 나를 떠나 창밖으로 옮겨갔다.
"그게 뭐야. 오빠는 널 정말 좋아한단말야. 너랑 헤어지고 저렇게까지 충격을 받았을만큼 오빠는 널 많이 좋아한다구.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이유로 헤어질수가 있어? 니가 그러고도 내 친구야?"
오빠가 불쌍하기도 하고, 지독하게 덤덤한 반화에게 화가나기도 한탓인지 말이 막 나갔다. 하지만 입을 다물 생각은 들지 않았고, 오히려 화만 더더욱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이런 난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반화는 그저 그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만 빙그레 지어보일 뿐이었다.
며칠 후, 난 오빠가 다른 여자도 만나고 있었단 걸 알게 되었다. 반화는 그걸 알게 되어 이별을 선언했고, 어쨌든 반화를 많이 좋아하던 오빠는 충격으로 방안에 틀어박히게 되었다고 한다.
때때로 난 반화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상처받는 게 무서워 타인을 쉽게 믿지 못하는 그 모습을 그저 여유롭고 무덤덤하다고 넘기곤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행복해지는 데 조건을 달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강해진단 건 불가능하거나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지 않을까.
사과하고 싶은 마음에 아까부터 계속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지만, 반화의 전화는 계속 꺼져 있는 상태다..
첫댓글 하아,,강한사람은 사실,정말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백호교님 소설 정말 멋져요! 오늘 백호교님 소설 눈아프게 읽었습니다..! 모두 다 가슴이 찡하네요..
무슨 조건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