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희 1952년 5월 23일생
1976년 성우전자 공업주식회사 입사
1983년 성우전자 공업주식회사 퇴사
1987년 호주로 이민

모든 사람들에게는 지나온 과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과거, 어두운 과거, 두번다시는 생각하고
싶지않은 추억등 자기들만의 이야기 꺼리가 있습니다.
어쩌면 필자가 외국이 아닌 고국에서의 평범한 삶이였다면 당연히 친구들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할것입니다.
19세때의 학창시절이 지나간 날짜를 따진다면 10년마다 강산이 변한다는데 족히 네번은 됩니다.
간간이 고국을 방문해 자주만났던 친구들을 제외하곤 길거리에서 어깨를 마주치며 스쳐 지나가도
모를 정도로 잊혀질 만 한 친구들도 많았을 그런 세월입니다.
나의 글을 (자칭 자서전)시작하면서 감히 부탁을 드립니다.
오로지 친구 하나가 외국에서 오랜세월을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한 모습으로.....
덧붙여 나의 이야기속에서 좋은 이야기들은 살짝 들어내 사랑하는 친구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겨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청소년기**
2009년 5월 화창한 고국의 봄날! 허연 밀가루! 처절하게 찢겨 너덜 너덜해진 검정교복을 휭하니 교문위에 걸쳐놓고 교정을 떠나온지 40여년후!
교정앞엔 그동안 두어번에 걸쳐 농업과 종합이 모두 빠진 학교명이 걸려 있었다.
환갑의 나이에 졸업생으로 모교를 찾는 나의 마음이 어떤 모습일까?.
어차피 얼굴을 알아보는 당시의 선생님은 아무도 안 계실것이 확실하니 마음을 푹 놓고 서무실(행정실)을
찾았다. 고등학교 졸업시 56명중 최하위였던 석차와 서너번의 무기정학과 함께 요주의 불량학생으로
적색 펜으로 기록된 성적표를 확인하는 순간! 지난 6년여의 학창시절의 필림이 꺼꾸로 되돌아갔다.
국민학교 당시의 성적이 12등 정도였으니 자칭 바보 천치는 아닌셈이고 보면 분명히 문제가 있기는
있는것이 확실하다.
6,25사변시 방위군 출신의 아버지께서 군 사단내 PX에 빵종류를 납품하는 즉 군납사업을 시작해서
작은 마을에서 끼니 걱정은 하지않을 정도였다.
중학교 시절엔 도시락 대신 빵을 싸가지고 가 친구들과 바꾸어 먹을 정도였고 한동안 교내 매점에도
납품을 하기도 했다.
사업의 호조에 힘입어 장남인 형님과 누님이 서울의 대학과 고교로 유학을 떠나고 세째인 나는
양평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제빵 과정은 거의 수제공으로 많은 일손이 필요했고 동네 아낙네들이 종업원으로 채용되었다.
8남매중 서울로 유학떠난 형님과 누나, 그리고 남아있는 형제들중 여동생과 어린 남동생들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바쁜 납품 일정을 맞추는 오버타임에 부족한 인력을 보충할수 있는 유일한 액스트라 일꾼은
중학생인 나 뿐이였다. 방학이 오는것을 두려워 할 정도로 공부에 전념할수 있는 상황이 아닌속에서도
다행히 성적은 꾸준했다.
나의 미래가 어두움의 그늘에 휩싸이기 시작하는 계기는 여기서 부터 시작되었다. 8남매의 자녀들을
모두 서울로 유학 보낼 정도로 사업이 승승장구 하는것은 우리들의 바램이였고 어느날 공장장의
실수로 군납 계약이 최소되는 불운이 중3 졸업과 맞물려 사업에 위기가 다가왔다.
집안 정세 파악에 판단력이 부족했던 나는 졸업이 가까워 올때쯤 형님 누님과 같은 서울의 고교로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성적은 국민학교때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서울로 진학하는데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문제는
본교의 고교 입학 신입생 지원율이 미달에 가까운 상황에서 해결책으로 담임 선생님들을 통한 학부모의
회유정책이 풀 가동되었고 동시에 기울어진 군납사업의 부진으로 이미 유학중인 두 자녀의 학비에
부담을 느낀 아버지의 어쩔수 없는 결정앞에서 농업에 필요한 전답이 한평도 없는 우리 집안의 구조상
농고로의 진학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나의 강한 논리는 바람앞의 등불이 되었다.
전후기 입학식이 모두 끝날때까지 농고 진학을 거부하며 시험도 치르지 않고 한가닥 희망인 후기까지
버텨보았지만 별무였다. 결론은 KO패. 정작 오갈데가 없는 말 그대로 진퇴양난 속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입학식이 끝나고도 한참후에야 양평농고 1학년 농업과의 신입생이 시작되었다.
적성에 전혀 맞지않는 농업관련 과목이 80%가 넘는것과 벼 한포기도 심을수 있는 논 한평도 없는것은
고사하고 소 한마리도 키우지 않는 우리가정 상황과의 궁합은 맞출래야 맞출수가 없는것이였다.
또 다른 미래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것은 고1때의 춘계소풍날이 시발점이 되었다.
이제까지의 전쟁은 1차전이였고 고교를 진학한지 불과 서너달만에 2차전이 바로 시작된것이다.
이런 현실을 두고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는것일까?
교실과 칠판의 거리보다 전답의 실습장과의 거리가 더 가까웠다.
짜여진 농업고의 교육정책은 어찌보면 농업 대국으로의 길잡이 역활에 전혀 손색이 없을만큼 확실한
교육정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 정책은 바로 산 교육을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간과한 학구파들을 위한
참 좋은 실업고 정책임에는 가타부타 이의를 제기할수 없겠다.
농업 전문 분야에서 성공한 동창들중 김영호,이용기,이규태,조병용 등 산 증인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봄소풍**
나의 기억으로는 매년 봄소풍의 장소로 옥천의 사나사와 신내 개울가가 단골로 지정되었다.
당시엔 전교생이 차량으로 소풍을 가는건 불가능이였고 도보로 한시간 이내에 가고 오기에도
적당한 거리였다. 중3 사나사 봄소풍때의 에피소드하나, 국민학교때와는 달리 숨겨진 보물을
찿아 선물을 받는 댓가로 노래를 부르거나 장기자랑을 해야 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게도
기회가 왔다. 그런데 아무리 구상을 해봐도 마땅이 부를만한 노래 제목이 떠 오르지를 않았다.
결국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고 난 큰목소리로 음악성을 넣어 이렇게 외쳤다.
“ 노래~시작했다~~ 노래~ 끝났다~~” 불과 십여초 만에 끝난 어처구니 없는 나의 졸속 노래끝에
모두가 박장대소하며 사나사 계곡이 뒤집어졌다.
또 다른곳, 이곳은 개군면 신내리로 십리길이 넘는 비포장 길을 돌고 돌아 크고작은 자갈들이
주변의 수초와 함께 널려있는 개울가로 중학교 시절부터 단골 지정 장소였다. 볼거리도 전무한
그곳에서 때우기식의 의무적인 년례행사를 치뤄야 하는 소풍은 단지 나 뿐만이 아니고 대다수의
학생들과 선생님들께서도 동감이었을 것이다.
즐거움이 없는, 좀 과장된 표현을 쓰자면 소풍길이 아닌 고난의 길이였다고나 할까?
드디어 YP16과의 인연이 시작된 운명의 날이 밝았다.
전쟁(?)끝에 진학한 양평농업 고등학교 1학년 토요일의 봄 소풍날 아침!
늘 기차로 통학하는 우리들은 (나를 포함한 5명, 15회졸업)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의기투합하여
소풍장소를 신내 개울이 아닌 창경원 동물원으로 바꾸어 1박 2일 일정으로 다녀오기로 즉석에서
합의하고 곧바로 아신역에서 학교쪽이 아닌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전교생들이 영양가 없는 고난의 길을 행진하고 있을때 우리들은 마치 천국성에라도 입성한양
창경원과 동물원을 돌아 다니며 우리들만의 값진(?) 산 교육을 ….
우리들은 토요일에 이어 다음날 일요일까지 완벽한 도둑 소풍을 소화하고 청량리역에서 양평행
저녁 막차에 올랐다.
당시엔 대다수의 선생님들께서 가족은 서울에, 선생님 자신들은 양평에서 지내야하는 주말
기러기 선생님들이셨다. 토요일 오후가 되어야 서울로 상경하고 다음주 월요일 학교 출근을
위해 일요일 밤 열차로 하향하는것이 일반화 되어있었다. 지금이라면 수시로 왕복하는
전철까지 개통되어 편리해진 출퇴근이 가능했을텐데…
청량리를 출발한 열차가 한창 달리고 있을때 우리들은 비어있는 좌석을 찿기위해 열차안을 이칸에서 저칸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아닌 지극히 당연한 일들이 눈 앞에 다가왔다.
뒤쪽에서 어디서인가 자주 듣던 낮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 강철희!”
부르는 소리에 깜짝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계속
첫댓글 새
옛날 기억들을 상기 시켜주는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 집니다...
그랬써구나 그래 그시절이 생각난다,, 형제가참많네 부모님께서 힘이드셨겠네..
할수없이 학교를 입학 했지만
학교란곳(고교)은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단계임에 틀림없음이 사실이다
나도 농업과목은 별로 무관심이었고...그래도 소중한것은 좋은 친구들과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을
배우고 익혔음이 더 중요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 토대위에 오늘을 향해 살아 갈수 있었고 그로 인해 차분한 삶을 살아낼것이기 때문이다
철희 !! 잘 읽고 있다네...
그렇지
그 울타리가 아니였슴 우리들 YP16 인연이 어떻게 지속되었겠나
과거를 들추는건 마음을 평온하게 함이라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농과를 가고싶어서 갔나요? 학교는 거기밖에 없어서 같지요, 영구씨 말이 맞지요 3년이라는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면서 성장하고 기본을배웠지요 한우명 선생님이 무섭고 때리기도 많이했지만 우리가 푯대를 향하여 올바로 가도록 늘 일깨우셨던 말씀들이 생각납니다,,,
가장 가슴이 아픈것은 한우명 선생님께 효를 못다한 것입니다.
다음 글이 기다려지는군요. 꼭 재밌는 연속극 기다림같이.....
월요일부터 금욜까진 출근하고 토요일은 아이들 학교(토요 스포츠) 픽엎하고 주일은 교회에 출석하고 머리속에 담겨진 이야기인데 통째로 넣을수도없구 걱정입니다!! 그래도 시작을 했으니 끝을 맺어야지여~~
바다 건너 오는 소식이 참 궁굼 합니다. 주말 연속극 아님 미니 시리즈로 보내세요. 들녘에 봄아지랑이처럼 아련히 생각나는 시간들이 새삼 즐겁고 소중합니다. 글구 고맙습니다. 잃어버리고 살았던 시간들이 참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건강하셔야 우리 맘을 즐겁게 하지요
어깨에 중압감을 느낌니다. 09처럼, 기쁨이님처럼 잘하지 못한 학교성적을 이번기회에 만회하는 기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