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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본 황희 정승 유배지(제 12편)
■ 장수 2 덕 백장 선생 그는 누구인가?
정신재 백장 선생은 누구인가? 1342(고려 충혜왕 3년) 출생했다. 부친은 밀직부사 백인경이고 모친 밀양 박씨다. 백장 선생은 1342년에 태어 낳는데 태어난 곳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순수하고 착하며 배우기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역리(易理)를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휘는 장 이요, 자는 명윤 이요, 시호는 충숙이고 관향은 수원이다.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 등을 배우며 훗날 치국 경세(治國經世)의 기량과 절개를 지니게 되었다. 특히 역학과 경서에 능하였다고 한다. 목은 이색, 야은 길재, 정몽주를 포함한 고려삼은(三隱)에 버금가는 성리학자로 불렸다.
16세 되던 해 1357(공민왕 6) 성균관 진사시 합격하였다. 이후에 원나라 유학을 떠나 25세의 나이로 원나라 과거에서 장원급제하는 등 자신의 기량과 경륜을 넓혔다. 원나라에서 백장에게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의 관직을 내려 머물게 하려 했으나 고려를 위해서 극구 사양하고 귀국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 이부전서(吏部典書)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등 요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무신 이성계의 난으로 고려가 멸망하자 개경을 떠나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으로 가족(슬하의 3남 2녀를 두었다)을 모두 다 데리고 들어갔는데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든 선비들이 구름같이 많았다고 한다.
1396년(태조 5) 태조 이성계가 그의 학식과 덕망을 높이 사서 집현전 대제학을 제수(除授)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충남 서산 해미 땅으로 유배하게 된 것이다. 이후 태종이 또다시 이조판서 집현전 대제학을 제수하며 회유하였으나 이 또한 거절하여 1405년(태종 5) 전북 장수군 장계면 호덕동 위동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장수군 장계의 남쪽 유천(柳川) 언덕 위에 청심정(淸心亭)을 짓고 학문 연마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황희 정승이 1418년(태종 18) 봄에 장수군 장계면 월강리 도장촌으로 유배되어 왔다. 먼저 유배 온 백장 선생이 있는 곳 호덕동까지 약 2㎞지점에 있었다. 황희는 백장 선생이 운명하기 전까지 약 5개월 동안 백장 선생을 조석으로 문안해서 국정을 논의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백장 선생은 존경받는 인물이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빛 낙엽과 함께 백장 선생은 1418년 10월 15일 사망했다. 백장이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동방의 백이(伯夷)”라 부르며 의정부 영의정 겸 영중추부사 및 이부전서 보문각 대제학을 추증하고 예관을 파견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묘소는 장수군 장계면 호덕동 뒤편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 묘를 백충신묘(白忠臣墓)라 부른다. 인근에 신도비가 있고 훗날 후손들이 묘지 왼쪽 편 50m쯤에 숭의재라는 재각을 건립하였다.
백장 선생 신도비(좌측 1850년 세움, 우측 1990년 세움)
● 백장 선생 신도비
백장 선생 신도비는 장계면에서 계북면 방향으로 약 2㎞지점 19 번 국도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는 2개의 신도비가 나란히 있다. 하나는 1850년에 백장 후손들이 세운 것이고 하나는 최근에 새로이 단장하여 세운 것이다. 처음 세워진 백장 선생 신도비는 사후 432년이 지난 1850년에 자손들의 건의에 의하여 공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져 오랫동안 내려오다가 훗날 세월 흐름에 흔적이 희미하며 파손되고 비문 해석이 불분명하여 1990년에 수원 백씨 후손 20대손 백정인이 개수(改竪)하고 22대손 백준선이 근서(謹書)하여 새로운 신도비를 만들어 옆에 두 개의 신도비를 나란히 모시고 있다.
● 백장의 신도비명 해석
이 글은 신도비의 있는 그대로 옮긴다. 지금의 글자 표기와 다름을 알린다. 조선 태조가 왕위에 취임함은 천시와 민심에 순응하여 취임하였으데 여조의 구신이 수절하고 불취한자 심히 많아서 혹은 죽고 혹은 살아서 각각 직분을 다함은 동일하다. 석일에 백이가(중국 은나라의 충신) 주나라를 더럽다 하며 수양산에 은거하여 아사하였으나 문무 제신이 불문에 부치다 신왕을 비방하고 절의를 지키어 처신함을 고결히 하여 마음에 거리낌이 없이 처세하였으니 어찌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며 영예를 취하는 자와 같으리요. 정신재 백공은 입지가 탁연하니 이 또한 목은 이색, 야은 길재 군현 의로다.(군현 : 현명한 지인. 혹은 동배라는 함)
공의 휘는 장이요 자는 명윤이며 정신재는 그의 호이라. 포은 정몽주 선생께 수업하여 16세에 진사가 되고 26세에 원조에 가서 과거하여 한한림시독학사를 지내고 공민왕시에 누진하여 광정대부 이부전서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렀다. 당시 정치가 어지러우므로 공이 처자를 거느리고 원주의 치악산중에 들어가 출입을 금하고 성리의학을 연구하여 여생을 보내려 하였다. 태조가 기왕에 공의 현명을 듯고 누차 관직을 주었으나 나가지 아니함에 해미로 귀양시켯다. 이후 태종이 즉위함에 이르러 특사하여 환가케 하였으며 이조판서 집현전 대제학에 임명하고 친서로 불렀으나 공이 대답하데 충신은 두 임군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번 시집가지 아니하는 것은 서적에 소연하게 기록되어 있거늘 어찌 삼조실록의 신하로서 두 마음을 둘이요 하고 불참하에 드디어 또 남원에 이배하니 당시의 방촌 익성공 황희 역시 이곳에 적거하여 서로 심방하며 조석으낙을 삼았다.
일직희 황공(황희)을 건하데 공은 나아가 벼슬하여 시국을 구제하라고 시를지어 증여하여 가로되 누구를 섬겨 인군이 아니리요 또 이윤이 있도다. 살아서 요순 만나니 이것이 좋을 때로다. 봄이오되 홀로 고사리 꽃 이슬을 취하여 저 서산에서 주려 죽은 신에 부치도다 고하였다. 이것은 스스로 백이의 절개를 자기하고 이윤의 사유를 인용하여 황공을 권함이러라 하루는 황공이 월야에 공의집을 방문하였더니 마침 공이 출타하여 만나지 못하고 홀연히 영시성이 있어 가로되 주인은 어느곳에 갔는고 명월이 스스로 뜰에 가득하도다 창을 열어보니 그 사람을 보지 못할러라. 수일이 못되어 공이 죽었으니 이것은 신령이 먼저 슬품을 고함 일러라 부고가 조정에 들리매 조정은 정사를 휴무하고 예에의하여 치제하였으나 공의 원함이 아닐러라 남원 장계면 황곡리 병좌에 장사하다. 후에 시호를 사하되 충숙이라 하다. 원조의 휘 휘는 대사마 대장군이며 증조의 휘 천장은 정당문학이니 수원백에 봉하였다. 조의휘 연은 추밀원좌승선 고의휘 인경은 밀직사부이며 비 정부인 이씨는 대부문정공 장용의 따님이다.
공이 본조 개국공신 우의정 밀성원 박간의 딸을 취하여 3남을 낳의니 장자 형옥은 판서요 차자 여옥은 좌참찬이며 3남 명옥은 좌찬성이다. 판서의 아들 빈은 형조판서요 2녀는 송보산 김남백에게 출가 하였으니 2인이 모두 판서가 되다. 참찬의 아들 윤승은 부정이요 운비는 판윤이며 운섬은 지중추요 중현 손 이하는 다 기록치 못하노라. 타인들이 말하데 1문에 3상서가 있다고 일향이 칭송하며 다년간 흠모하여 평소에 지구와 같이 시도잦고 한담도 하고 놀고 있던 정자가 100년을 경과하였으되 기이하게도 퇴락치 아니하였다. 또 월광사에 공을 제하되 송, 김 양 상서를 배향하며 원주의 사람이 공을 죽림서원에 사하되 현판을 상덕이라하다.
아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것은 딸의 출가함과 같아서 한번 출가하면 종신토록 개가치 아니하고 한번 관록을 먹의면 종신토록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는 것이다. 나라를 팔고 임금을 배반하여 그 부귀를 도모하는자 횡행하거는 공과같은 사람은 백사 불굴의 절조를 지키어 양조(태조와 태종)의 부름의 명을 거절하여 마침내 절개를 변하지 아니하고 절개를 고려왕조에 바치니 이는 이른바 멀리 있어도 군을 배반치 아니하고 죽어도 나라를 잊지아니하는 자라 하겠도다. 성조가 관대히 용서하여 그 충절을 온전케하니 아 위대하다.
익성공 황희가 공의 행장을 저술하여 그 행적과 치적을 비술 하였으나 문적이 유실되어 전하지 못하였으니 가석한 일이로다. 공의 후손 중현이 공의 유족을 휴대하고 천리에 와서 신도비명을 청하니 돌아보건데 노후한 몸이 필과 심력이 같이 무력하나 그 성의에 감동되어 비명을 지의니 명에 이르데 장하다 백공이여 양과 충이 현저하도다. 충성함이 유래가 있으니 포은 정몽주를 스승으로하여 복종함이로다. 시국에 느낀바가 있어서 나아가 벼슬하지 아니하고 은거하였으나 그 처세한 법인즉 동일하다. 청렴 결백하여 덕의의 지조가 겸비하도다. 일편단심으로 보국에 전력하니 국가가 번영하고 인신이다 환희하다 이에 충성을 표창하고 비석을 건립하여 영원히 전하게 하노라.
- 1850년에 비명은 매산(梅山) 홍직필이 쓰노라 -
백장 선생 묘지(위쪽 백장 선생, 아래쪽 부인 밀양 박씨)
백장 선생 묘비와 묘지는 장계면에서 계북면 방향 약 2㎞지점 19번 국도변 왼쪽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는 2기의 묘와 1개의 비석이 있다. 위쪽 묘가 백장 선생 묘지이며 아래쪽의 묘가 백장 선생 부인 밀양 박씨 묘지이다. 천연잔디 위에 단정하게 모셔져 있으며 묘지 우측에 백장 선생 비석이 있다. 묘지명은“有明高麗國吏部典書寶文閣大提學白壯之墓”라고 쓰여있다. 해석하면 이 곳은 고려의 명장이요 이부전서 보문각대제학을 지내신 백장의 묘지이다. 현재의 묘지는 이전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고 하나 언제 어디서 이전했는지 알 길 없다.
1418년 10월 15일 유배지 장계면 호덕동에서 7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자 후손들이 양지바른 곳에 장지를 마련했다. 또한 부고가 조정까지 알려지자 태종 임금은 정사를 휴무하고 예관을 파견하여 예를 차리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니 백장 선생의 살아생전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 사료한다. 당시 조정에서 파견 나온 예관이 공의 치적을 훌륭히 여겨 묘지를 개성으로(당 시대 수도) 옮겨 장사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후손들은 백장 선생의 원함이 아니라 판단하여 장수현 장계면 황곡리(현 호덕 마을)에 장사하였다고 전한다. 아마도 백장 선생은 마지막 유배지 장수가 고향이라 여기고 살았으리라 짐작한다.
숭 의 재
숭의재(崇義齋)는 말 그대로 옳고 의로운 사람을 모시는 재각이다. 이 곳은 정신재 백장 선생과 그의 후손들의 추모와 제향을 모시는 사당이다. 정면 4칸이고 옆면은 2칸이며 팔작지붕으로 2003년에 새롭게 지었다. 이곳은 백장 선생 지묘에서 좌측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건물을 둘러쌓고 있는 담벼락이 단정하게 되어 있으며 입구 문이 따로 있다. 사당 안 마당 좌측에는 백장 선생 후손들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빛바랜 비석들이 세워져 있어 세월의 흔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정문 입구 좌측에는“관리사 신축 의연 비”가 있다. 내용을 보면 전북 문화재 10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정신재 백장 선생의 묘역 및 재각의 관리사에 비 가세고 벽과 천정이 누수가 되어 관리인이 기거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있어 새로운 관리사를 신축하는데 자금 마련을 위해 2003년 2월 15일 임원회의를 개최하여 임원과 각 문중 및 혈손들의 적극적인 후원금으로 2003년 6월 15일 대대적인 보수를 위하여 준공하게 된 것이다. 이 글귀로 보아 백장 선생 묘비 인근에 예전부터 관리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 수원 백씨와 장수
장수에는 고려말의 수절 신 백장 선생과 주인과 함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같이 순직한 순의리 백씨(장수 3절), 그리고 기미독립선언서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서명한 백용성 조사를 기억하게 된다. 장수에서는 이덕, 삼절, 오의를 생명처럼 기리고 있다. 장수 인물에 우연하게도 수원 백씨가 한 명씩 각각 오른 것이다.
이덕(二德) : 백장(고려말의 수절 신), (황희) 청백리의 표상
삼절(三絶) : 주논개(겨레의 여신), 정경손(향교를 지켜낸 충복)
순의리 백씨(현감의 죽음과 의리)
오의(五義) : 백용성(불교의 큰 별), 전해산(의병대장)
문태서(호남의 명장), 박춘실 (의병대장), 정인승(한글학자)
고려말 명장 백장 선생과 주인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은 순의리 백씨 그리고 조국의 독립과 계몽에 정열을 쏟았던 근세 우리나라의 백용성 스님 모두 훌륭한 수원 백씨 분들이다.
● 백장 두 임금을 섬기지는 않으리라
끝으로 김성철 관장의 유배로 읽는 한국사 60 이란 글을 소개하며 백장 선생의
소개를 마치고자 한다.
“충신 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 했소이다. 내 비록 미천한 학문이지만 고려 왕실의 벼슬아치로 영욕의 세월을 보냈소.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무슨 영달을 얻으려 한단 말이오. 허허, 스승 달가 어른의 선혈이 아직도 선죽교에 흥건히 배어 있소이다.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도 부끄럽소이다” 태조 이성계가 집현전 대제학을 제수하자 정신재(靜愼齋) 백장(白莊)은 단칼에 거절했다. 보문각 대제학 등 요직을 역임했던 백장은 스승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등 삼은(三隱)과 어깨를 견줄만한 성리학자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개경을 떠나 원주 치악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백장의 명성을 듣고 치악산으로 학문을 배우기 위해 수많은 선비들이 찾아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문동 72현을 척살하고 왕족들을 수장시킨 이성계는 백장에게 벼슬을 내려 회유하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백장은 왕의 뜻을 거역한 죄로 충남 서산군 해미 땅으로 유배되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는 말은 정숙한 여인은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貞女不更二夫)와 함께 충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덕목이었다. 하지만 시대나 역사에 따라 절대 원칙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공자는 반란군에 의탁해 뜻을 얻으려 했고 맹자는 역성혁명의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물며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었던 청백리의 대명사 황희 정승도 태종의 부름을 받았으니 이 세상에 절대원칙은 존재할 수 없었다. 어쨌든 많은 고려 유신들은 조선 초기 두문불출로 자신의 충절을 굽히지 않았기에 죽음으로 유배라는 형벌로 처단될 수밖에 없었다.
백장은 해미에서 10여 년의 귀양살이를 하면서 학문을 닦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중 1405년(태종 5년) 태종은 백장의 학식과 덕망이 아까워 이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등을 제수하면서 불러들이려 했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백장은 벼슬을 거절한 죄로 다시 전북 장수현 호덕동으로 먼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자신의 스승인 정몽주를 죽인 태종을 섬길 수는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백장에게 귀양살이는 형벌도 아니었을 것이다. 어차피 유배되지 않았어도 산속에 은거하며 살았을 삶이었다.
백장은 장수현 장계(長溪)의 남쪽 유천(柳川) 언덕 위에 청심정(淸心亭)을 지었다. 환갑을 넘긴 예순넷의 늙은 나이였지만 학문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학문 연마와 후학 양성이 남은 여생의 낙이었다. 백장이 호덕동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마지막 해인 1418년 5월 28일 황희 정승도 장수현 도장마을에 유배되었다. 도장촌과 호덕동은 2㎞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황희는 자신보다 스물한 살이 많은 백장을 조석으로 찾아 문안드리고 시국을 논하며 유배생활을 했다. 백장은 이 해 77세의 일기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백장의 부고가 이르자 태종은 동방의 백이(伯夷)라고 칭송하고 의정부 영의정 겸 영중추부사 및 이부전서 보문각 대제학을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 주었다. 유배지인 호덕동 뒤 양지바른 언덕 그의 묘소는 백 충신 묘(白忠臣墓)로 불려지고 있다.
황희 정승의 유배지 복원을 위하여 뜻을 같이 하고자 하시는 분
또한 장수문화에 관심이 많으신 분 연락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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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용표친구 공부 많이 했겠네
읽어 내려가는 나도 공부가 되는데 자료찾아서 확인하고 올리려면
신경써야 할건데 수고 많이 하시네..
겁나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했으나 부족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