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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적 체험, 정서의 기록: 텔레비전 드라마 40년
정영희 (고려대학교 강사)
1. 들어가는 말
텔레비전 장르 중 드라마는 대중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으며 ‘텔레비전의 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1963년 광고방송이 허용되면서 드라마의 편성을 늘인 것도 시청자들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대중적 인기와 사뭇 다르다. 사회적 관심만큼이나 큰 비난과 멸시에 노출되어 있으며 한 때는 학문적 연구가치도 인정받지 못했다. 인간의 삶과 감정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소설, 영화나 연극과 다를 바 없는데 유독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해서는 경멸적인 것은 주요 시청자가 여성이라는 점과 더불어 그 문화물의 일상성, 평범성이 원인이기도 하다. 역사를 돌아보면 일상성, 평범성이 특징인 문화물은 동시대에는 항상 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정통성도 공인된 문서나 예술품을 통해서만 부여되었고, 그러다 보니 정통 역사서나 박물관의 전시물을 통해 재구성된 역사만을 진정한 역사로 인정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실록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고 공인된 문서나 시화, 공예품 등을 통해 그 시대의 경험과 삶의 양식을 추론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역사의 편파성에 노출되어있다는 사실을 종종 간과한다.
문화의 일상성, 평범성에 가치를 부여한 것은 레이몬드 윌리암스이다. 그는 문화를 정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과정으로 ‘평범한’사람들의 ‘체험된 경험’으로 정의하였다. 윌리암스는 ‘문화는 일상적인 것이다’(Raymond Williams, 1989:3)라고 주장하면서, 인간들이 일상의 실천과 경험에서 상례적으로 접하는 것들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는 이 문구를 사용하여 특수한 감수성의 배양을 통해 극소수에게만 의미 있는, 삶에 대한 특별한 형태의 엘리트 문화에 반대하였다. 말하자면 문화는 특권층의 배타적 영역이 아니라 모든 일상의 실천방법에 대한 포괄적인 영역이라는 것이다. 텔레비전의 여러 가지 장르 중에서 드라마는 그 소재나 주제의 대부분이 수용자의 일상생활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 수용자들의 보편적 경험 및 정서와 더 밀착되어 있다. 따라서 텔레비전 드라마는 객관적인 사회현실과 일상 속에서의 체험된 경험의 기록된 형태로서 역사와 경험, 정치와 이데올로기 이 모든 것들을 일상성의 수준에서 담아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삶의 총체적인 방식(a whole way of life)’으로서의 문화라는 이해 속에서 일상성․ 평범성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며, 그 일상이 기록된 형태로서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한국사회와 정서 구조(structure of feeling)의 변화를 추적한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기술의 발전, 제도적 환경의 변화(정치․경제․사회적 규제의 문제 등), 수용자의 변화(노동과 여가 패턴의 변화, 시청환경/시청습관의 변화), 상품으로서의 드라마로 텔레비전 드라마 자체의 성격 전환 등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와 드라마 자체의 성격 변화는 내용과 형식의 변화를 동반했다. 단막극-주간극-일일극-주말극-특집․대형극 순으로 등장한 형식의 변화와 계몽․계도, 반공, 새마을, 애정․불륜, 근대사, 왕조사, 사회현실, 신세대 애정 등의 소재의 변화는 어떤 면에서는 시대적 요청의 결과이다. 그러나 주지할 것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변화는 외부적 조건의 결과만도, 사회․수용자와 동떨어진 드라마 자체의 성장결과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텔레비전 드라마의 변화를 텔레비전 드라마를 둘러싼 외부환경의 결과로만 이해하며 사고의 폭을 제한시킨다. 한 사회와 시대의 특수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드라마의 외적 조건이 중요하지만, 그러한 이해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사회․수용자에게 요청받기도 하고 요구하기도 하며 능동적으로 맺어가는 텔레비전 드라마 자체의 적극성을 간과한다.
이 글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특수한 시기의 정치․경제․사회라는 문화적 조건과 거래․ 조응하는 능동적인 생명체로 이해하고, 텔레비전 드라마가 그 시기 사회구성원들의 실제적 체험을 담아내며, 그 구성원들이 소통과 교감을 위해 의존하는 그것 즉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의존하는 정서 구조를 담고 있다는 사고에서 출발하였다. 한 드라마가 인기가 있다는 것은 그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한 그 시대만의 특수한 정서에 호소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 호소력을 상실하면 드라마는 외면받는다. 한때 즐겨보던 드라마의 외면, 금기되고 터부시 되던 소재가 드라마적 요소로 등장하는 것 등을 포함한 텔레비전 드라마의 변화를 통해 한국인의 정서 구조의 변화를 재구성해보았다. 윌리암스의 ‘정서 구조’는 분절적이고 경직된 설명의 이면에 언표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으나(김영희, 1993) 내면 깊숙이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어 더 근원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객관적이고 명료하게 표상된 관계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언표되지 않는 심연의 것들도 포함한 문화분석의 개념을 통해 우리의 실제적 삶과 체험이 용해되어있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역사적 변화를 살펴보았다.
2. 텔레비전 드라마에 관한 기존연구
한국에서 텔레비전 드라마 연구는 1980년대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석․박사 논문 중심으로 보면, 1980년대는 드라마에 나타난 여성상, 성 차별, 여성 이미지 등에 대한 내용분석이 많았고, 1990년대 들어와서는 드라마 텍스트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이나 민속지학적 수용자 연구로 전환된다(정재철, 1997). 텔레비전 드라마 연구의 대부분은 특정 드라마의 이데올로기 분석, 담론 분석에 제한되어 있으며 역사적 분석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 활발해졌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역사에 대한 최근 연구로는 최선열․유세경(1999)의 논문인 ‘텔레비전 드라마의 역사성 연구: 정치적․경제적 변화요인을 중심으로’와, 김승현․한진만(2001)의 저서인《한국사회와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다. 이에 앞서 오명환(1994)은 화제작 중심으로 드라마의 변천과정을 분석하였고, 표재순(1992)은 드라마의 소재 변화를 연대기별로 고찰하고 있다. 차범석(1985)이 1961~1984년까지 드라마의 주제를 중심으로 분석한 글도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역사적 변화를 고찰한 최선열․유세경, 오명환, 표재순, 차범석의 연구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하나의 생물체처럼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그 방향을 중립적으로 제시하여 사회적 의미의 해석을 절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사회적 조건(정치적, 경제적)에 민감한 수동적 산물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한 편의 드라마에는 한 시대, 한 세대 혹은 그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와 사상 등의 요소가 일상의 생활요소와 함께 용해되어 집단적, 총체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제작자나 방송사의 개별적인 취향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전체 사회의 산물이며, 한 사회에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가하는,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는 사회적 생명력의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현실에 끊임없이 반응하고 때로는 갈등 조정의 해법을 마련함으로써 현실세계에 관여하는 능동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 글은 변화하는 사회와 텔레비전 드라마, 도전받고 갈등하며 새로운 전통을 형성해가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변화를 사회적 맥락에서 인간과 제도의 개입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텔레비전 드라마 자체의 능동적 대응에 가치를 부여하며 분석한 것이다. 따라서 텔레비전 드라마를 사회현실의 반영물로 보는 관점과 능동성․적극성을 강조하는 구성적 관점의 경계를 넘어, 현실사회의 긴장과 갈등을 조율하고 조응하며 살아가는 능동적 문화물로 본다. 그러한 해석을 위해 레이몬드 윌리암스의 ‘정서 구조’ 개념을 사용하였다. ‘정서 구조’는 인쇄매체, 특히 소설분석에서 윌리암스가 사용한 개념이며 윌리암스의 학문활동에서 핵심개념이다. 그는 그 개념을 19세기 초 영국소설에 적용하여 당시의 시대적 특성과 새로운 세대의 등장, 사회전반의 지배적인 정서 구조를 재구성하였다.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분석에 한 공동체가 교감과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의존하고 있는 정서 구조(Williams, 1977/1982), 사회․텔레비전 드라마․수용자간의 교감과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하는 접점으로서의 정서 구조 개념을 사용하여 텔레비전 드라마의 역사적 변화에 대한 보다 총체적이고 다면적인 이해를 기대해보았다.
3. 연구문제와 연구방법
이 연구의 목적이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나 주제, 형식의 양적변화의 유의미성을 파악하는데 있지 않으므로 계량적 방법이나 가설검증의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특수한 시기의 사회적 맥락에서 드라마의 개별 프로그램들이 어떤 공유된 특징을 보이는지 살펴보고, 특징들의 기저를 이루는 지배적인 정서 구조가 무엇인지를 추적하기 위해 이해와 해석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해의 방법은 순수하게 귀납적 작용도 연역적인 과정도 아니며, 총체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역량을 구현하는 과정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다시 전체에서 부분으로의 왕복하는 과정이다(Polkinghorne, 1983/2001:309). 해석의 방법은 현상에 대한 대안적 이해와 ‘경험적 해석을 통해 개념을 풍부하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1) 연구문제
윌리암스는 ‘정서 구조’를 ‘확장된 커뮤니케이션 체계(a system of extended communication)’(O'Connor, 1989:68)로서의 소설에 적용하여 분석하였다. 소설은 쓰여진 시기의 시대적 특성을 반영하는 사회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유사하다. 소설과 텔레비전 드라마는 공동체의식을 반영하고 사회성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닮았으나, 생산자의 개인적 특성과 스타일이 더 강조되는 소설과 텔레비전 드라마는 조금 다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의미는 프로그램 생산자의 고유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텍스트 내에 구체화되어 수용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전규찬, 1997). 텔레비전 드라마의 생산은 제작자의 몫이지만 수용자도 특정 드라마에 반응하고 평가하며 그것은 다시 제작자들의 시청자 인식에 영향을 주어 유사한 드라마의 생산과 유통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텔레비전 드라마는 제작자와 생산자의 구분없이 사회구성원 전체의 요구와 욕망을 반영한 공동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산물에는 필연적으로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널리 공유된, 교감과 커뮤니케이션이 의존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이 용해되어 있다. 윌리암스는 이것을 ‘정서 구조’라고 부른다(Williams, 1977).
본 연구는 윌리암스의 ‘정서 구조’개념을 사용하여 우리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특수한 사회조건에서 수용자와 교감하고 커뮤니케이션 해 온 접점을 찾아내기 위한 시도이다. 그 목적을 위해 다음과 같이 연구문제를 설정하였다.
<연구문제>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본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정서 구조는 무엇이며,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가?
윌리암스에 의하면 한 시기 혹은 한 세대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며, 그 문화는 그 시기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집단적인 경험과 가치 및 정서들의 총합체인 그들의 특수한 정서 구조에 근거한다. 이러한 윌리암스의 견해는 계급의 특수성보다는 정서 구조의 세대적 특성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Milner, 1999:112). 그런 의미에서 정서 구조는 한 시기의 문화, 혹은 한 세대의 문화를 특징짓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회, 한 시기에는 하나의 문화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특정한 문화가 지배적이려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로부터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 동의가 지속되는 동안은 지배적인 문화로 유지되다가 그 동의를 상실하면 잔여문화가 되거나 과거의 문화로 전락하게 된다(Williams, 1977). 사회구성원들의 동의란 갈등성을 전제하고 있으며, 복수의 정서 구조들은 나름대로의 헤게모니 투쟁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투쟁의 결과 헤게모니를 잡은 정서 구조가 그 시대, 혹은 그 시기의 지배문화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배는 영속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떠오르는 문화에 의해서 대체되거나 혹은 그 문화를 포섭하여 다른 형식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즉 문화는 고정적이지 않고, 정서 구조 또한 고정적이지도 않으며 수동적이지도 않고 유동적으로 현재적 체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배적인 문화와 잔여적인 문화 및 부상하는 문화는 한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를 지향하며 문화의 장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게 된다.
우리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서 그 시대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교감하는 보편적인 정서 구조를 재구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관여하는 사회적 힘들의 관계변화를 통해, ‘정서 구조들’간의 긴장과 갈등을 통해, 변화하는 정서 구조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변화가능성에 열려있는 개념을 사용한 이러한 분석은 제도를 앞서는, 명료한 형태의 변화를 앞서는 ‘징후’를 발견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대안적 해석 뿐 아니라 우리의 임박한 미래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2) 분석대상과 절차
분석대상은 1961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의 줄거리이다. 드라마의 줄거리나 요약된 내용은 각 방송사의 연감과 드라마 편람에서 추출하였다. 드라마의 변화와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40여년 동안 방영된 드라마 전체를 대상으로 하였고, 드라마의 사회적 의미와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분석하는데는 사회적 반향이 컷거나 높은 시청율을 기록한 드라마를 선별하였다. 그리고 전체 줄거리나 내용을 중심으로 드라마가 전달하는 주제의식과 가치관에 대한 전반적 검토가 이루어졌다. 드라마 줄거리는 1960~70년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1980년대 자료도 많이 남아있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경우는 방송잡지, 신문 등 2차 자료에 언급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해당 시기의 텔레비전 드라마 텍스트 자체를 분석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수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2차 자료를 의미있게 다루었다. 이것이 드라마의 역사적 추적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 중에서는 최선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드라마 40년을 추적하다보니 ‘깊게’보다는 ‘넓게’보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분석은 세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①우선 40년 역사를 몇 개의 시기로 구분하였다. 이 과정에서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시기구분한 기존문헌들을 살펴보고 구분의 적절성을 탐색한 후, 본 연구의 목적에 맞게 시기를 재조정하였다. 텔레비전 드라마 분석을 위한 시기구분은 연구문제와 강조점에 따라 다양하다. 오명환(1994)은 텔레비전 방송사 출현을 기준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주장한 반면, 표재순(1992)은 방송환경의 변화시점들 중 텔레비전 드라마 편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구분하였다. 방송과 텔레비전 드라마의 시기구분에 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정치적 변화나 방송 정책, 방송제도의 변화를 기준으로 분류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텔레비전 드라마의 변화도 선형적인 성장 혹은 발전의 과정으로 간주하고 중립적으로 묘사한다. 김승현․한진만(2001)의 구분은 좀 예외적이다. 이 구분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둘러싼 외적인 환경(정치적 상황, 방송제도 등)과 사회적 조건을 고려하면서도 그러한 환경이 실제 텔레비전 드라마에 미친 문화적 영향력을 신중히 고려하여 각 시기의 분기점을 정하였다. 이 연구는 그 구분을 활용하여 한국 드라마의 40년을 8개 시기로 세분화하였다. 그리고 각 시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환경, 제도, 일상적 경험 등을 고려하여 그 시기를 특징화하였다. 여기서는 특수한 시기에는 하나의 지배적인 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다양한 힘 간에 갈등도 고려되었다. ②그 다음은 구분된 시기별로 주요 드라마의 줄거리를 분석하여 각 시기의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내용적 특성을 포착하였다. 분석에서는 드라마의 형식보다는 주제와 이데올로기적 역할의 공통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③마지막으로 현실사회와 각 시기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병치시켜, 특수한 현실적 조건에 텔레비전 드라마는 어떻게 조응해왔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텔레비전 드라마의 그러한 조응방식에 그 시대의 사회구성원들이 널리 공유한 지배적인 정서 구조로서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한 사회, 한 시기에 하나의 문화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 듯이 한 시대의 문화가 의존하는 것도 하나의 정서 구조만은 아니다. 여러 개의 ‘정서 구조들’은 특수한 시기의 유력한 의미로 존재하기 위해 헤게모니 갈등을 겪으며 그 과정에서 지배적인 정서 구조의 형태가 형성된다(Williams, 1977/1982). 따라서 분석을 통해 구성해 낸 지배적인 정서 구조를 그 시기의 사회구성원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시대와 시대에 중첩된 정서 구조와 대립하는 힘들의 긴장을 통해 변해온 역사의 과정을 되밟아 보면서 텔레비전 드라마의 대안적 미래를 상상해보았다.
4. 텔레비전 드라마, 정서 구조의 변화
1) 규율적 통제의 시대, 열성적으로 동조하는 드라마(1962~1964)
1960년대 전반기는 한국사회가 경제성장과 경제자립, 조국의 근대화를 모색하는 격동기였다. 조국근대화가 거대한 국가적 목표인 동시에 하나의 사회적 규범처럼 위치해가는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제도를 통해서 뿐 아니라 전통사회 전근대적 특징들과의 단절을 독려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통해 규율적으로 통제되었다. 이 시기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정부시책에 적극 동조하여, 계몽․계도극, 반공극을 통해 정부의 목적의식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국영매체로 개국한 KBS의 독점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원형개발, 틀짓기의 시기이기도 하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무엇을 담아야하는지에 대한 지배적 의견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몽의 도구로, 새로운 문화예술매체로서의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전자를 지향하는 당국의 의지와 계몽에 대한 사회의 암묵적 함의로 텔레비전은 관과 제도에 열성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생산을 둘러싼 의견들만 분분했지 소비의 면에서는 텔레비전 문화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시청자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들을 어떠한 의심도 없이 순수하게 이해하고 해석하였다. ‘열성적 동조’는 현실사회에 대한 텔레비전 드라마의 의식․무의식적 반응일 뿐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사회구성원들의 암묵적 합의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계도와 계몽이 지배집단과 텔레비전 드라마의 욕망인 동시에 전쟁과 기아를 경험한 시청자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절실하고 숙명적인 과제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예물․연극․영화를 담는 또 하나의 매체, 혹은 ‘이야기 매체’로서의 텔레비전 드라마라는 인식이 없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사회적 목적의식에 강하게 노출되었다. 도시 주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시사성있게 다룬 <서울의 뒷골목>, 교통안전․독서․불조심․방범․방첩 등 계몽적 소재를 ‘영이’의 시각에서 다룬 <영이의 일기>, 반공극 <실화극장> 등이 대표적이다. 그 외 텔레비전 드라마의 실험무대로 활용된 <금요극장>, 외국소설을 드라마화한 <명작의 문>과
2) 소외와 갈등의 시대, 통속과 순수의 드라마(1965~1969)
1960년대 초반이 새로운 질서의 강제적 구축이 특징이었다면, 후반은 그 새로운 질서에서 소외와 갈등이 서서히 나타난 시기이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개발과 성장에서 비켜나 있던 피지배계층의 소외와 그로부터 발생된 갈등은 이 시기 현실사회의 특징이다. 경제개발의 재원확보를 위한 한일협정과 야당․학생들의 반발, 다가올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사회문제로 가시화될 도시빈민의 출현, 농업기반붕괴로 인한 쌀값 폭등․폭락, 인플레 등으로 겪는 도시서민들의 일상의 고충, 그리고 전후 새로운 세대 등장으로 그들 중심의 청년대중문화와 전통적 가치관의 갈등 등이 이를 대표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도시빈민과 농촌소외는 암울하고 음습한 시대의 시작을 예고했다. 이 시기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어떠했는가? 소외와 갈등의 시기에 텔레비전 드라마는 ‘통속과 순수’를 통해 현실사회에 조응하며 수용자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1964년 TBC가 개국하면서 반공․계몽의 목적극이 지배적이었던 드라마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오락성과 흥미성이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TBC는 ‘철저하게 재미있는 방송’(오명환, 1995:87)을 지향하면서 국영방송인 KBS가 시도하지 못한 형사극․범죄극도 시도하였다. TBC의 등장으로 비로소 텔레비전 드라마는 제도와 목적을 초월하여 일상성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우리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 평범한 인간관계, 작은 사건 등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통해서 미시적인 흥미를 느끼고 평범한 것에서 매력을 발견하는 일상성(김포천, 1998:6)도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또한 일연속극이 생겨나면서 드라마는 매일 연결되는 스토리를 중심으로 일상적으로 접하는 문화물이 되었다. 기술적으로도 생방송에 의존하던 1960년대 초반과 달리 제작기술이 발달하면서 텔레비전 드라마는 다양한 소재와 형식을 개발할 수 있었다.
국민․사회인․ 가족과 가정에 대한 바람직한 상을 제공함으로써 삶의 방향을 제시하려는 계도성 목적극이 여전히 강력하지만, 일상의 삶과 현실생활을 다룬 드라마들이 소소한 오락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엿보기의 즐거움을 제공하기라도 하듯 복잡한 애정과 불륜을 다룬 드라마가 속속 등장하였다. 홈드라마 조차도 불륜과 일탈이 뒤섞여 있어서 드라마의 윤리성 문제가 제기되어 조기 종영하기도 했다. 일일극과 홈드라마가 정착하고 애정 드라마가 관심을 끌며 일상․통속을 담아내었지만, 한편으로는 문예물을 극화한 단막극류가 안정되면서 소외와 갈등을 ‘통속과 순수’양면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이 시기는 문예물을 드라마로 각색하여 방영하면서 순수와 격조를 추구하고, 일일연속극을 통해서는 통속적이고 세속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통속과 순수의 양면’(차범석, 1985)의 드라마 시대로 정의할 수 있다.
3) 규제와 억압의 시대, 순종과 저항이 병존한 드라마(1970~1974)
1970~1974년은 유신과 반유신, 대기업 중심의 경제논리와 노동운동, 대학생 중심의 청년문화와 당국의 단속 등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표출된 불만은 제도의 힘을 통해 강력하게 통제되었다. 농촌근대화 10개년계획(1970) 국가비상사태 선포(1971), 퇴폐풍소일소를 위한 방송시책(1971), 유신선포(1972), 가정의례법제화(1973)등을 거쳐 사회전반을 억압과 통제의 환경으로 만든 정점인 긴급조치(1974)까지 ‘규제와 억압’이 현실사회의 특징이었다. 규제와 억압의 현실사회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는 ‘순종과 저항’이라는 모순적인 내용들을 풀어내었다. 1960년대 초반처럼 열성적으로 동조하지는 않지만 반공드라마와 새마을 드라마의 이데올로기적 역할, 역사적 인물을 통한 1인 영웅극, 사필귀정․권선징악 주제의 수사극, 희생적인 개인상의 이상화(<아씨>, <여로>등)등은 정치이데올로기를 공고히하고 바람직한 사회인상, 개인상을 생산함으로써 목적의식을 수행했다. 반면 복잡한 애정관계를 다룬 불건전한 멜로물과 특히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갈대>류) 현대사회의 병폐와 모순을 다루기도 하였다. 시대적 민감성을 드러내는 드라마(<박마리아><이풍진 세상><두 얼굴>등)들이 생산되어 불송출되거나 사상성 시비에 휘말리고, 조기종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때부터 한국의 드라마 역사에서 사회비판적 내용이나 정치현실 비관적 소재가 소극적으로나마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민감한 정치적 사건과 이념을 다룬 이 시도는 주로 MBC에 의해 이루어졌다. 외압으로 중도하차하였으나, 국가비상사태선포(1971), 유신선포(1972)등의 강력한 억압체제에서는 이러한 시도 자체가 저항의 의미를 충분히 담고 있었다.
4) 억압과 저항의 시대, 일상․통속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드라마(1975~1980)
1974년의 긴급조치로 학생운동을 비롯한 반유신․반정부운동이 잠시 소강되었다. 그러나 1977년 다시 시작된 반유신 운동은 1970년대 초반보다 더 체계적이고 강력하였고 권력의 억압 또한 강화되었다. 이 시기는 외래어 사용 금지(1976), 히피․장발 단속(1976) 등 사회통제뿐 아니라, 드라마기준제정(1977), 코메디 프로그램 폐지소동(1977), 외화 사전심의결정(1978), 장발연예인출연금지(1978)등 방송에 대한 직접적 규제가 강화되었다. 1979년 10․26으로 긴급조치의 효력이 소멸될 때까지 사회전반과 언론은 철저한 통제에 놓였다. 그러나 억압의 강도만큼 저항도 거세고 조직적이었다. 대중문화에서도 사회적 불평등이나 갈등, 모순을 묘사하는 움직임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는 ‘일상․통속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현실사회가 강력한 통제․ 억압의 힘과 그에 대치한 저항의 힘이 팽팽한 가운데, 텔레비전 드라마는 정부의 직접적 규제 속에서 정부정책에 부합하는 목적극(<실화극장><일요사극>
5) 희망과 좌절의 시대, 현실적응을 애쓰며 한편으로 고발하는 드라마(1981~1986)
10․26으로 한국사회는 잠깐 동안 민주화의 기대로 부풀었다. 잠깐의 몽상으로 끝난 ‘서울의 봄’이후는 희망 후의 좌절이라는 점에서 유신시대의 좌절과는 다르다. 현실사회가 ‘희망과 좌절’로 특징되는 이 시기, 텔레비전은 현실적응과 고발의 드라마를 양산하고 있었다. 신군부의 등장 이후 명백하게 정변의 정당성을 암시하는 드라마(<개국><조선왕조 500년 시리즈-추동궁마마>등)가 많았고, 성공한 기업인의 경제정신을 다루면서 정부의 경제안정화 정책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기여하는 드라마들이 나타났다. 또한 도-농간의 화합을 모색하는 농어촌 드라마들이 생겨났다(<전원일기><해돋는 언덕><고향>등). <한국인의 재발견 시리즈><매천야록>등 민족정신을 담은 드라마를 방영하여 민족정체성함양에도 기여했다. 이러한 드라마들은 대부분 정권의 요청에 의해 장려된 정책 드라마들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방송 자체가 소극적 자발성으로 만든 면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 텔레비전 드라마는 정치적 희망 후 좌절의 한국사회 분위기에서, 일정 부분 권력의 요구에 스스로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드라마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치․경제․법정드라마 등 새로운 포맷이 개발되며 여러 시도가 있었다. 이 시기에 시도된 정치드라마들은 정경유착이나 권력형 비리를 다루면서 정치적 민감성을 야기했다. <제1공화국><야망의 25시>등이 권력 결탁과 금권 비리를 다루어서 논란이 되었고 조기 종영하였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1960~70년대처럼 이상적인 가족이나 가정상을 제시하는 것을 멈추고 그대로의 현실에 적응해갔지만 때때로 현실사회의 문제들을 직시하고 고발하였다(<굴레><해저무는 들녘에>등 사회현실극).
6) 정치․문화 과도기, 현실 폭로 혹은 처세를 모색하는 드라마(1987~1991)
1987년 한국사회의 또 한번의 전환기를 맞았다. 정권의 위기 돌파 일환으로 나온 6․29선언은 새질서의 필연성의 증거인 동시에 기점이었다. 누적된 반정부운동과 권력형 비리에 노출되면서 정부는 정국 전환을 위해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직선제 개헌과 정치인들의 사면․복권으로 한국정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1987), 월북작가의 해방전 작품이 해금되며(1988) 사회적으로도 각종 규제가 약화되는 시점이었지만, 언노련 발족(1988), 전대협의 발족(1988), 전교조 결성(1989)등 노조와 사회단체가 결성되면서 군사문화의 권위적 특성과 민주화의 분위기가 사회 곳곳에서 크고 작은 충돌을 경험하는, 정치․문화 과도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시기 텔레비전 드라마는 현실 폭로와 그 안에서의 처세를 보여주면서 사회․수용자와 소통하고 있었다. 군사문화의 권위적 특성과 민주화 요구가 충돌하는 과도기적 사회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는 금기시된 주제를 다루었고, 나아가 그 허구성을 들춰내는 적극성을 보였다. 1970~80년대 한국사회의 의식을 규정한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는가하면(<우리들의 조부님><어머니의 노래>등) 현대산업사회의 파괴된 모습을 폭로하였다(<지포리에서 생긴 일><침묵의 도시>등>). 또한 지극히 현실적인 비극인 인신매매, 미혼모, 철거민들의 삶을 다루면서 사회현실을 고발하였다.
그런 반면 그러한 사회현실 안에서의 삶의 방식, 소시민적 윤리 등을 보여주면서 처세의 방법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뿐 만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 자체가 변화하는 한국사회에 적응하며 처세의 방법을 터득해가고 있었다. 정치현실과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드러내는 고발성 프로그램들이 활발한 반면, 코믹터치로 심각성의 무게를 줄이기도 하고 6․25나 일제 등의 민족수난기도 낭만적으로 전유되었다(<여명의 눈동자>). 권위주의와 민주화의 두 가치가 충돌하는 현실사회에서 드라마의 반응도 다양화되어, 이때는 현실사회고발극, 일상극, 애정물 등이 비교적 균형을 이루었다. 현실사회의 갈등이나 문제를 드러내기만 하지 않고 그 안에서의 처세까지 보여주며 소시민적 윤리를 구성해갔다(
7) 문화정치의 시대, 순응과 일상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드라마(1992~1995)
한국사회에서 이데올로기 정치가 마감되고 ‘경성정치에서 연성정치로’(박길성, 2003) 접어들어면서 바야흐로 ‘문화정치’가 시작되고 있었다. 독재타도, 민주화 등의 거대담론이 사라진 자리에 유력한 의미로 자리하기 위한 헤게모니 갈등이 일상의 소소한 부분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대립하는 각 집단들이 미디어를 통한 문화정치에 몰입하면서 미디어의 역할도 확대되었다. 1970, 80년대의 경제성장, 1980년대의 대학교육과 자율화 등으로 인해 능동적 문화소비자로 성장한 젊은 세대가 부상하면서 이 시기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세대변화의 특성이 나타났다. 드라마 40년사에서 이때처럼 세대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인식된 때도 없었을 것이다. 수용자층이 다양해지면서 청년을 위한 드라마(<질투><걸어서 하늘까지><마지막 승부><사랑을 그대 품안에> 등)와 중․장년을 겨냥한 드라마(<한명회><장녹수>등)로 나누어졌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더 이상 사회갈등이나 모순을 심각하게 다루거나 비판하려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에게는 ‘정치’, ‘그 시대’의 암울함보다는 그 시대의 ‘이야기’만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듯했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사실성, 진실성, 교육성보다는 오락성과 흥미성, 상품성으로 경쟁하고 있었다.
일상 속에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정권정당화를 위해 장려되었던 사극이 퇴조하였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다양한 집단과 세대를 인식하고 현실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반영하나, 공통적으로는 심각하게 이야기하기를 지양하였다. 정치현실극은 사라지고 상품으로서의 드라마 인식이 강하게 묻어났다.
8) 경제․문화적 좌절기, 즐거움과 현실유지를 희망하는 드라마(1996~현재)
1970~80년대 정치적 좌절을 경험했다면 1990년대 후반은 경제적으로 큰 좌절을 겪은 때이다. IMF로 중산층이 붕괴되고 삶의 기본 조건까지 위협받으며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를 지탱했던 ‘중산층’의식이 무너졌다. 실질적인 삶의 조건과 ‘중산층’으로서의 정체성이 위협받은 ‘경제․문화적 좌절’의 시기에 텔레비전 드라마는 해결되지 않는 현실문제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다. 분열은 분열로, 모순은 모순 그대로 둔 채 즉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며 현실유지를 희망하였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이미 상품으로 인식되고 시청자보다는 ‘소비자’를 겨냥하는 이때, 무거운 주제나 의식있는 사회성 드라마를 요구하기는 어려웠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무시할 수 없는 소비자인 청년세대에게도 심각하고 어두운 지극히 현실적인 주제는 ‘우리’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일 따름이었다. 1990년대 초기부터 유행한 트렌디 드라마, 시트콤, 코믹터치 홈드라마들도 현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일제, 6․25, 격변의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은 민족의 시련을 이야기 하거나 부패정치를 고발하기보다는 애절한 사랑의 무대가 되고 낭만적으로 전유되었다. IMF로 복고풍의 시대극과 가족․가정의 의미를 부각시킨 홈드라마가 잠깐 유행하나, 텔레비전 드라마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잊지 않았다. 1970~80년대 드라마가 현실적 묘사를 통해 사회와 삶을 들여다보기에 집착했다면, 이 때의 드라마는 현질서 속의 안정과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구차한 현실로부터의 탈출을 유도하였다.
이상으로 1962년부터 2002년 현재까지 한국사회의 변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본 정서 구조의 변화를 고찰해보았다. 그 내용을 <표 1>로 정리했다.
1961년 이후 한국의 텔레비전 문화를 규정하는데는 정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정치체제 만을 결정적 요인으로 볼 수는 없지만 상당한 부분에서 결정력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1960년대 초반은 명백하게 권력에 동조하는 드라마를 지향했고, 후반은 TBC개국으로 일상성․흥미성이 중요해졌지만 여전히 권력에 협조할 수 밖에 없었다. 1970년대 전반 또한 억압체제와 지시에 순응하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은 정책홍보(새마을 운동․반공 등)와 ‘민족사관정립’이라는 이름으로 내분봉합에 동원되었으며, 1980년대 초반은 정권 정당화에 기여하였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현실정치에 노골적으로 동원되지 않고 정치․사회의 비리와 모순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였다. 그때도 권력비리를 폭로하고 현실사회를 비판했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권력에 동원되고 자율적, 타율적으로 협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텔레비전 드라마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현실사회와 조응하여 그 시기를 독특한 방식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방영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텔레비전 드라마는 당 시대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상황과 동떨어져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하나에 완전히 굴복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역사적 변화를 외적 조건의 변화만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명시화된 객관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객관적이고 명료하게 표상된 관계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특수한 시기의 일상적 삶과 문화양식을 지배하는 사회전반에 널리 공유된 보편적인 어떤 것을 통한 이해, 정서 구조의 변화로 설명해보았다.
5. 나오는 말
우리는 종종 체험되지 않은 우리의 과거를 역사서에서 찾곤 한다. 그러나 한 시대의 삶은 반드시 역사서를 통해 기록되는 것은 아니며 불변의 이상적, 미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고급예술을 통해서만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시대의 정신과 삶이 체험적으로 녹아있는 대중적인 문화물이 그 시대의 삶의 역사를 가장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객관적인 사회현실 뿐 만 아니라 그 시대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인 인간의 능동성이 개입할 수 있는 열려있는 공간이다. 그것은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의 것도 만든 사람의 것도 아니며, 시청자 만의 것도 아닌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특수한 시대를 살아가며 그 시대인 만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정서 구조를 통해 소통하고 교감하는 공동체를 구성한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그 공동체의 산물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저속하고 무가치하며 비사회적인 삼류 텍스트로 간주하는 일반적인 인식과 학문적 가치를 폄하하는 인식은 드라마 자체를 비난하는 것을 넘어서, 이 시대의 사회구성원들이 소통과 교감을 나누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체계에 대한 폄하이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것, 특히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는 말이 더 이상 지적 우월성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텔레비전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생산에 끼어들지 못하는 것, 그것은 사회적 소통능력의 결여일 수도 있다.
레이몬드 윌리암스에 의하면 대중문화의 성공에는 언제나 대중들의 욕망과 불안이 담겨 있다. 드라마는 전파를 타는 순간 이미 만들 사람의 의지에서 벗어나 익명의 다수의 일상 속으로 파고 들며, 전달(transmission) 뿐 아니라 수용(reception)과 반응(response)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앞서 텔레비전 드라마를 분석함으로써 재구성해낸 정서 구조와 그 흐름은 텔레비전 드라마에 제한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우리의 정서 구조이다. 우리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당시대의 지배적인 정서 구조를 서로 확인하고, 그 안에서 불특정다수와 소통하고 교감해 온 것이다. 윌리암스는 소설에 대해 ‘소설을 생산하는 것은 사회도 아니고, 사회의 위기도 아니었다....소설은 아직은 역사가 아닌 임박한 미래의 다양한 경험으로부터 유래했다’라고 말한다(Williams, 1970:11). 이를 텔레비전 드라마에 적용하면 텔레비전 드라마를 생산하는 것은 사회도 아니고 사회의 위기도 아니며, 아직은 역사가 아닌 곧 다가올 임박한 미래의 다양한 경험이다. 이러한 점에서 해석하면 드라마는 단순한 과거경험의 산물이 아니며,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를 말하는, ‘더 이상 아닌 것’, ‘진행 중인 것’과 ‘아직은 아닌 것’이 섞여있는 열려있는 개방적 공간이다. 그리고 다양하고 이질적인 집단들이 지배적인 가치와 의미규정을 위해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투쟁하고 있는 헤게모니 투쟁의 장이 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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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이 글은 2005년 완료된 필자의 박사학위논문(고려대학교)을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2) 방송광고가 시작되면서 시청자를 지속적으로 유입시키기 위해 단회로 끝나는 단막극보다는 일일연속극의 비중을 확대되었다. 같은 프로그램을 매일 저녁 동일시간대에 배치하는 띠편성도 텔레비전 시청을 습관화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였다.
3) 1980년대 이전까지 텔레비전 드라마는 학문의 대상으로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울고 짜는’ 여성드라마는 예술성과 진지함이 결여되어있다는 인식이 그 이유다. 또한 학자들 대부분이 가부장적 전통과 가치관에 익숙하였기 때문에 여성장르로 폄하된 텔레비전 드라마는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연구된 것은 1980년대 이후 등장한 대중문화이론, 새로운 문화관, 여성운동의 영향이 크다.
4) 텔레비전 드라마는 따로 떨어진 공간에 흩어져 존재하는 수용자들에 의해 소비된다는 점에서는 개별적이지만, 공유된 정서의 통로를 통해 집단적으로 체험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 또한 특수한 시기의 사회조건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시대만의 특수성을 반영한 기록물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폄하된 인식은 그 문화물의 기록적 가치를 간과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수사반장>이나 <전원일기>같이 오랫동안 방영된 드라마를 통해 한국사회의 역사적 변화(생활양식, 가치관, 사회갈등 등)를 추적해 볼 수 있다. 1971년 시작된 <수사반장>은 방영초기에는 생활고로 인한 단순범죄가 주요 소재였다.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한 생계형 범죄가 주 소재였으며, 범죄에 대한 처벌과 인간애 사이에서 갈등하는 수사관의 모습에서 친근감을 느끼기도 했다. 술 마시는 폭력적 아버지를 처벌해달라는 시청자의 요구가 있을 정도였다(이연헌, 1990).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와서는 사기, 도박, 유괴, 변태적 살인, 떼강도, 마약 등 강력범죄가 소재의 다수를 차지하였다. 급기야 ‘범죄와의 전쟁’선포 이후에는 모방범죄의 발생을 우려하여 종영하였다. <수사반장>이 실제 범죄에서 소재의 대부분을 가져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방영된 내용의 변화를 통해 한국사회의 가치관과 지향점, 사회적 갈등의 변화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사반장>을 통해 공적 영역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다면 <전원일기>를 통해서는 한국인의 정서, 가족의식 등을 포함한 사적 영역의 변화를 추적해 볼 수 있다. 농촌현실을 비판하며 사회성을 띠기도 했지만, 배경이 가정(전통적 가족관계)에 제한되었다는 점에서 덜 사회적이다. 방영 초기에는 이농으로 전통적 생활방식과 결별한 도시민의 보편적인 정서와 갈망에 평온하고 안락한 공간으로서의 ‘농촌’을 제공하며 시청자들의 각별한 지지를 받았다. 3대로 구성된 가족관계와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화합과 조화를 모색하는 <전원일기>가 강한 ‘정서적 리얼리즘’을 전달하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 시청율이 하락하다가 2000년을 앞두고는 더 이상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전통과 근대의 단절에서 오는 상실감과 공허감, 3대가 어울리는 전통적 가족관계의 경험도 없는 새로운 세대가 드라마 시장으로 유입되었음에도 그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탓이다. 그 결과 <전원일기>는 수용자와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소통의 근간으로서의 한 세대의 보편적인 정서 구조에 호소하는데 실패하였다.
5) 윌리암스는 정서 구조를 ‘언어’와 ‘체험된 것(lived)’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시켰다.(Williams, 1979:163). 즉 정서 구조는 경험과 언어 사이의 끊임없는 접합의 지대이고 중재의 형식이라는 것이다(ibid.). 연극을 예로 들면 대본은 언어에 해당하며 배우의 실연은 체험된 경험이다. 윌리암스의 정서 구조는 바로 그 두 가지가 만나는 접점이고 중재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6) 이러한 연구들은 특수한 시기에 특정한 드라마 형식 혹은 장르가 지배적이었다는 증거로 실증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드라마의 생산에 영향을 준 외적인 요인을 고찰한다는 점에서, 혹은 특수한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적 변화를 감지한다는 점에서 그 외형적인 변화나 흐름을 잘 설명하고 있다.
7) ‘정서 구조’에 대한 윌리암스의 정의와 문화분석 개념으로서의 유용성 및 윌리암스의 활용에 대한 논의, 개념에 대한 연구자의 이해는 정영희(2005a:29~44, 2005b:5~8)를 참고하세요.
8) 드라마 줄거리는 김승현․한진만(2001)의 저서《한국사회와 텔레비전 드라마》의 부록을 참조하였다. 이 책은 드라마 자료가 첨부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2종류로 발간되었는데, 그 자료는 각 방송사의 연감, 드라마편람 등을 취합하여 정리한 것이다.
9) 과거 드라마들은 시청률이라는 객관적 데이터가 없는 경우가 많고,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처럼 체계적으로 축적되어 있지 않아서 선택이 용이하지 않았다. 시청률이 낮았다고 해서 무의미하다고 판단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방송관련 잡지나 당시의 신문기사에 자주 언급되고, 학위논문에서도 자주 다루어진 드라마들을 우선적으로 선별하였다. 꼼꼼한 작업이었지만 누락된 것도 없지 않을 것이다.
10) 분석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정영희(2005a:16~23, 2005b:11~15)를 참고하세요.
11) TBC 개국당시의 편성방향은 KBS가 시도하지 않은 새 포맷의 개발, 외화 및 해외프로그램의 과감한 도입, 프로그램의 대중성 제고 ․하루 5시간 편성 ․ 오락성과 공익성의 조화(오명환, 1995:87) 등으로 정리된다.
12) 드라마의 사회적 역사가 다른 예술품의 사회적 역사보다 훨씬 더 접근하기 쉬운 것도 이러한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Williams, 1961: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