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평양냉면에 견주는 ‘진주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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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시대부터 메밀을 이용해 메밀국수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천수답에 의존했던 옛날에는 비가 안 와 파종기를 놓치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파종 후 2개월이면 수확하는 메밀을 파종했다.
필자가 1998년도 중국의 도문 지역을 여행하다 북한에서 넘어온 ‘조선의 민속전통-1식생활풍습편(북한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4년 1월 25일 발행)’을 보게 됐다. 식생활문화를 연구하는 필자로서 반가운 김에 책을 읽어 보다 눈에 띄는 내용이 있었다. 바로 “냉면 중에 제일로 여기는 것은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다”라는 구절이다.
평양냉면은 알겠지만, 진주냉면은 금시초문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남한에서 우리가 함흥냉면이라고 부르는 함흥식 물냉면은 ‘농마국수’, 비빔냉면은 ‘회국수’라고 씌어 있다는 사실이다. 평양냉면과 진주냉면만 냉면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성우 ‘한국요리문화사(교문사, 1985)’에도 “옛날부터 찡하다는 표현의 평양냉면이 유명했지만, 이 평양냉면에 견줄만한 진주냉면은 남국적인 맛으로 유명했다”고 진주냉면 기록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평안도나 경상도 산간 지방은 계단식 다랭이 논과 밭이 많아 타 지방에 비해 메밀농사를 많이 지었고, 메밀국수 등 메밀로 만든 음식이 잘 발달했다.
추운 겨울 산간지방 등지에서 먹던 메밀국수가 평양과 진주라는 도시의 기생문화의 야참음식으로 자리 잡으며 ‘냉면(冷麵)’이라는 고급스러운 이름을 얻게 됐다.
필자가 1999년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조사한 바로는 1800년 말에 진주목(晉州牧)의 숙수(熟手) 한 분이 관영(官營)에서 나와 옥봉동 개울가에서 진주냉면을 뽑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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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냉면 |
당시 진주시내에는 북 평양기생, 남 진주기생이라고 불릴 만큼 미색(美色)과 재색(才色)이 뛰어난 관아의 진주 기생과 숙수(요리사)들이 조선이 망하면서 권번과 요정(料亭)으로 나와 기생문화가 발달했고, 이들은 돈 많은 왜인(倭人)이나 지주(地主) 등 한량들과 함께 기생놀이를 하고 야심한 밤에 냉면집을 찾아 냉면을 밤참으로 먹었다고 한다.
특히 요정이 많고 기생들이 많이 살던 진주시 옥봉동과 가까운 냉면집들이 장사가 잘됐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기생문화와 냉면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당시 기생뿐만 아니라 일반 부유한 가정집에서도 냉면을 배달시켜 먹어 냉면집에는 배달을 주로 하는 남자 하인들이 서너 명씩 있었다고 한다.
1939년 실화를 바탕으로 쓴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잃어버린 계절’ 187페이지에는 진주냉면을 좋아하는 일본인 교사 구사마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한 줌밖에 안 되는 메밀국수에 볶은 고기를 가늘게 썰어 넣어 배와 생강으로 맛을 여민 육수로 된 이른바 진주냉면이 구사마의 호물(好物)이었다. “이 냉면 기가 막혀!” 구사마는 냉면 두 그릇을 먹곤 “진주를 떠나면 영영 이 맛있는 냉면을 못 먹게 될 텐데…”하고 숙연히 한숨을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첫댓글 진주라 천리길! 한번 가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