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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18)
성도의 교제② : 성도의 교제에 대한 신앙고백62)
말씀 : 사도행전 2:42-47
그리스도교회는 한 몸 된 지체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 성령 안에서 교통하는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신앙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한 부분을 보면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하며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코이노니아란 용어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권속으로 이루어져 가족적인 성격을 지닌 사랑의 공동체인 까닭에 성도들 간의 친밀한 관계가 강조된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단어가 코이노니아다. ‘교통’, 또는 ‘교제’를 뜻하는 코이노니아는 바울 서신에서 전반적으로 볼 수 있는데,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있게 되는 성도들 간의 친밀한 관계에 사용되고 있는 용어다. 바울은 명사에 해당되는 ‘코이노노스’라는 말을 협력적 사역에 있어서 ‘동반자’의 의미로 사용하였다(고전 10:18이하, 고후 1:7, 8:23). 또 동사 ‘코이노나인’은 다섯 번 쓰였는데 특히 외적인 행동과 관련하여 ‘함께 나누는 행위’를 뜻하거나 또는 ‘경제적 물질적인 기부’를 의미한다(롬 15:27; 빌 4:15; 엡 5:11; 롬 12:13; 갈 6:6). 13번이나 사용된 ‘코이노니아’라는 말 자체는 앞에서 쓰여진 동사들과 함께 어떤 목적이나 행동에 대한 동참을 뜻하는 것이 제일 우선되는 의미다. 예를 들면, 성령 안에서의 참여 또는 교제, 믿음에로의 동참, 그리스도의 고난에의 동참, 복음사역에의 종사, 경제적 지원 등을 말하는 것이다(빌 2:1; 고후 13:13; 몬 6; 빌 3:10; 고전 1:9; 빌 1:5; 갈 2:9; 롬 15:26).
‘교제’를 의미하는 이 ‘코이노니아’란 말의 간단한 의미는 ‘공통됨’, ‘함께 함’이다. 요한일서 1:3절을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요한은 1절과 2절에서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여기서 다시 언급하고 있다. 복음의 선포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니”라고 말한다. 복음의 목표는 ‘교제’에 있다. 복음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의 가족에로 그리고 서로를 한 가족에로 이끌기 원하시기 때문에 선포하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의 교제는 서로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제’란 말인 ‘코이노니아’의 본질이다.
교제의 기초
우리가 성령 안에서 이 교제를 하는 것은 구원이란 기초가 있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1:3절을 다시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교제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사람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다른 사람과도 교제한다. 우리가 교제를 갖는 것은 교제를 갖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사회 경제적 지위를 갖고서 동일한 삶을 형태를 살고 있다든지, 또는 동일한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교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공통된 근거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가 동일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 있는 자녀들이라는 데서 찾아진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고동치고 있는 것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심장의 고동이다.
교제의 본질
따라서 교제의 기초는 ‘구원’이다. 그리고 교제의 본질은 ‘함께 함’이다. 일단 그리스도인이 교제 안에 있게 되면 그는 흥미로운 책임들을 갖게 되는데, 그것들은 모두 ‘함께 함’이란 용어 아래 잘 요약될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점을 잘 말해 준다. 사도행전 2:41절에 따르면 복음의 초청을 받아 3천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죄 사함을 받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의 선물을 받은 자임을 나타냈다. 이것이 신약 교회의 탄생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행 2:42). 여기에서 우리는 함께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본다. 교회는 그 생명을 가지면서 교제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것은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써 살아가는 삶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그의 참 제자가 되고 그분에게 속해 있는 자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데 힘썼다.
둘째,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 모두가 구원을 받았으며 또한 그들 모두가 계속 성장해 갔다. 그 성장은 그들의 신앙 인격에서 두드러졌으며, 또한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 드러난 인물을 보면 '믿음과 성령과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 그런 예루살렘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 하였으며 그래서 ‘믿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여졌다.
셋째, 이들은 함께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서 공유하는 삶을 살면서 구원을 실증 있게 누렸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문자적으로는 ‘팔고 있었고’이다)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문자적으로는 ‘나눠주고 있었고’이다)”(행 2:44-45)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바나바는 어떤 사람의 도와 섬겨 그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소유인 땅을 팔기까지 하였다(행 4:36-37). 이렇게 서로에 대해 사랑에 가득 차서 서로 나누는 놀라운 반응을 보였고, 이는 교회 안팎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교회 안으로는 ‘기쁨과 순전한 마음’이 있었다(행 2:46). 그리고 교회 밖으로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 인격으로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으로서 귀감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들을 칭송하였다(행 2:47).
교회에서 행해진 이 사랑의 열쇠는 겸손에 있다. 빌립보서 2:3-4절에 보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했다. 교제의 기초는 구원이며, 교제의 본질은 함께 하는 데 있는 데 이 교제는 겸손하게 자신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데서 희생적인 사랑을 행하게 된다.
교제의 속성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자가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자와 갖게 된다. 이 교제는 ‘성령 안에서’ 갖는다. 이 말은 성령으로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 교제는 우리가 힘쓰기도 해야 하지만 인위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분의 인도를 받아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믿음이 없이는 이 교제는 불가능하다.
이 교제는 생명 없는 사람들과 직접 관련된 일, 예를 들면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의 합석, 불신자와 짝짓는 일 등을 뜻하지는 않는다(고전 10:14-22, 고후 6:14-7:1). 그것은 성도들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성령 안에서 갖는 교제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상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듯이, 믿는 자가 불신자와의 교제는 불가능하다. 여기서의 교제는 사회적인 관계성과 그에 따른 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라는 이 관계성을 떠나서 ‘나 홀로’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다(요 8:12). 우리는 구원받았을 때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되었으며, 또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냄”을 받았다(골 1:12-13).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 5:4-5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한다. 빛은 어둠과 결코 같이 있을 수 없다. 빛과 어둠이 성질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때에도 어둠 가운데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 있다면 우리는 빛 가운데 있는 것이다. 우리가 빛 가운데서 어둠에 속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을 선택할 수 있지만, 우리는 빛 가운데서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양심 앞에 완전한 책임을 지고 또 완전히 드러내 놓고 빛의 자녀답게 사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6-7절에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다. 여기서 7절의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하는 것인데 문자적으로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교제를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즉 빛의 속성을 띠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있는 사람이며, 그 속성을 믿음의 공동체에서 발휘해 나가야 한다. 결국 이것은 ‘성령 안에서 함께 교제’하는 것이 된다.
‘교제 바깥에’의 문제
그런데 종종 우리는 ‘어떤 성도는 교제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가령 성도들이 서로 모임을 갖고 귀한 시간을 가지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런 자리에는 항상 적극적인 사람과 적극적이려고 노력하는 사람, 소극적인 사람, 거의 참여하지 않아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중에서 소극적이거나 거의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서 그런 말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가 그렇다고 해서 그는 ‘교제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 취급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일 경우 교제 바깥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같은 그리스도인들끼리의 교제를 잘 갖지 않는다는 것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가 진정 그리스도인일 경우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영원히 지속할 것이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그가 만일 교제 바깥에 있다고 하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교제 바깥에 있다는 것은 그의 구원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무개는 교제 바깥에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연합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지만 어떤 그리스도인도 교제 바깥에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는 사람은 그가 교회란 연합된 세계에서 살 때 필연적으로 다른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는 사람 간에 교제에 힘써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란 ‘믿음의 공동체’란 것이 조직체가 아닌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조직체는 함께 모였을지라도 저마다 제 각각으로 있을지라도 존재한다. 심지어는 뿔뿔이 흩어지는 일도 벌어진다. 그러나 유기체는 그렇지 않다. 유기체란 ‘함께’ 공생공존해야 생명이 유지되고 지속되지 만일 다른 지체로부터 떨어지면 그때부터 그 떨어져서 개별적으로 있는 그 지체는 생명을 잃는다. 그래서 결국은 생명이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갖는다.
그런 것인데도 불구하고 ‘함께’ 되어서 ‘성령 안에서 친밀한 교제’에 소극적이거나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교제를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요한일서 1:4절에서 우리는 그 답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아무개는 교제 바깥에 있다’고 말하는 대신에, 우리는 ‘아무개는 그가 주님께로부터 받았으며, 또한 그와 더불어서 누리는 기쁨을 상실했다’라고 말해야 한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인 이상 영원히 잃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회복하기까지는 그는 그 기쁨을 상실한 자로서 기쁨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만일 그가 이 기쁨을 잃은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한에는 그는 영적 기쁨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제에 관심을 제대로 가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힘 있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지 못한다. 도무지 신앙 생활하는 데 있어서 행복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영적 침체도 그래서 겪는다. 우리는 이것을 다윗의 시에서 본다. 다윗은 그의 참회의 기도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나에게 당신의 구원을 회복시켜 주소서’라고 하였는가? 아니다. 그는 시편 51:12절에 보면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말했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의 은밀한 것이 결코 아니다. 부부간에 누리는 기쁨이 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부부의 관계의 기쁨이다. 또한 그 기쁨은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기쁨이다. 부부만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에 누리는 기쁨이 없이는 그 가정은 행복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갖는 친밀한 교제를 잃지 않아야 한다. 주님과 갖는 교제는 형제보다 더 친밀하다(잠 18:24). 또한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갖는 친밀한 교제란 바울의 표현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빌 4:1)이기 때문에 갖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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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이 글은 부천개혁교회 이천우 목사의 글을 조금 수정했다.
*강의자 : 손재호 교수
*본글은 2024년 8월 16-17일에 부천개혁성경신학교 2024년 봄학기 집중강의 겸 부천개혁교회 제직교육을 '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란 주제로 실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