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 최진동 홍범도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전투)by 도생 2017. 3. 26.
안무, 최진동 3형제, 홍범도, 김좌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사 최대 승리 청산리대첩(전투)
청산리대첩(전투)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간 일본군 5천여 명과 대한독립군 연합부대 약 2천여 명이 맞붙어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로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가장 큰 승리다.
1920년 6월 7일 대한제국 군대 교관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안무 장군의 <국민회군>, 청나라 군대 간부 출신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3형제의 <군무도독부>, 평민 항일의병장 출신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안무, 최진동 3형제, 김좌진 장군은 모두 군 간부 출신이었고, 유일하게 홍범도 장군만 평민 의병장 출신이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 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하여 일본군 헌병순찰대와 관공서 등지를 기습하여 일제 군경을 사살하는 등 피해를 주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독립군 부대의 게릴라식 습격으로 피해를 보자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 추적에 실패하자 무고한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삼둔자에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대패한다.
일본군은 월강 추격대를 편성해 대대적으로 독립군을 추격해 오지만, 봉오동에서 매복하고 있던 안무, 최진동 3형제, 홍범도 장군 등의 독립군 연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에 의해 또다시 무참하게 대패하고 도망간다.
북간도에는 독립군 부대 북로군정서군이 있었다.
대종교 신도 중심으로 만들어진 북로정서군은 서일이 총책임자가 되고, 북로정서군 사령관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 김좌진 장군,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 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출신 다수가 북로정서군 지휘관과 부대 간부를 맡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선 독립군 부대에 여러 차례 피해를 보고,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하자 간도 지역의 조선 독립군을 섬멸하려고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한다.
일본군은 당시 중국 땅이었던 간도에 들어가기 위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마적을 돈으로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한다.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은 훈춘성에 있던 중국 군인과 민간인, 조선인 등을 마구잡이로 살해하고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여 방화하고 살인하게 한다. 일본군은 훈춘사건이 조선 독립군의 소행이라고 우기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간도로 들어간다.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중국 측의 소식을 받은 조선 독립군 부대는 근거지를 이동하게 된다.
안무, 최진동 3형제, 홍범도 장군의 연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은 지형이 험하고 나무가 울창한 백두산 인근으로 이동하게 된다.
청산리대첩(전투)은 훈춘사건을 빌미로 간도에 들어온 일본군과 독립군 연합부대 사이에 벌어진 모든 전투로 백운평, 천수평, 만록구, 어랑촌, 완루구, 맹개골, 서구, 천보산, 고동하 전투 등 10여 차례의 전투를 말한다.
청산리전투(대첩))에 투입된 일본군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고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일본이 말하는 조선독립군 토벌작전에 투입된 일본군 전체 병력은 2만 명에서 2만 5천 명 선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안무 장군의 대한의군,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장군 3형제의 군무도독부,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김좌진 장군의 북로정서군과 의군부, 한민회, 광복단, 의민단, 신민단 등 군소 독립군 연합부대 총 병력은 최소 3천 명에서 최대 5천 명에 이를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이 청산리대첩(전투)의 주력부대였다.
안무, 최진동 3형제,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장군과 수많은 무명의 독립군이 연합해서 승리를 거둔 청산리대첩(전투)에서 독립군 병력과 일본군 병력, 독립군과 일본군의 피해가 자료와 학자에 따라 차이가 크다.
안무, 최진동 3형제, 홍범도, 이범석, 김좌진 장군 등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보다 무기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을 이용하면서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항일독립무장투쟁사에서 가장 큰 전과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