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대사회, 또는 정보화 사회라고 특징지어 설명하려고 하는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어느 시기보다 짧은
시간에 수많은 사건을 접하게 되고, 그리고 더 짧은 시간 사이에서 우리는 생활의 양식과 사고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강요 속에 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산업혁명 이후 다양한 문명의 이기의 출현으로 아주 빠른 속도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그 이후에 다양한 기계산업의 발달로 우리의 일상 생활 속 깊이까지 생활의 편리함이 넘치게 들어왔음도 사실
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과거 큰 회사에서나 사용하던 컴퓨터가 퍼스널 컴퓨터(PC) 라는 이름으로 각 가정에 들어와 지금에
와서는 한 가정에서 인터넷(Internet)<1>이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전세계의 어느 곳이나 상관없이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면 아무 곳이나 도달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온 것이다.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이 문명의 수혜자인 인간은
어떤 형식으로든 변화를 강요받았음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이로 말미암아 생활의 양식이며, 사회윤리, 사회구조,
사회질서 등 인간이 살고 있는 한 사회는 어떤 형태로든 변화해 왔음은 분명하다. 문명의 발달이 가져다주는 편리함과
강제의 요구는 세부적으로는 우리의 옷 모양, 헤어스타일, 행동양식, 언어구사, 심지어 사고와 기본 욕구마저 빠른 속도로
변화하게 만들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문명의 발달로 말미암아 편리하고 안락해진 삶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와 더불어
우리에게 고민으로 와 닿는 문제들도 다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 사회를 지탱하는 사회규범의 변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인간 개개인의 가치관 변이,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며 더더욱 커져가는 카오스(Chaos)<2>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현실감 있게 느껴지는 환경파괴의 현상들 등이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를 고민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인간은 무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아주 다양한 양식을 이루며 살아왔고, 나아가 새로운 양식을
이끌어냈고, 그리고 그 양식에 따라 습관적으로 생활을 영유해 왔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식이란 무형의 것, 유형의 것
모두를 포함하는 말로서 인간의 주변에서 늘 함께 했던 다양한 모든 현상을 포함시킬 수 있다. 우리는 한 시대를 살아가며
한 사회의 모습이 어떤 식으로 변해 가는 지를 눈 여겨 보아야한다. 우리의 예술행동이 전혀 사회와 동떨어져 생각되어지고
변화되어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며, 더욱이 20세기 끝에 온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다양한 사회상황과 그의 다양한
요구사항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직감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사회의식이 어떤 형식으로든 우리의
예술활동과 디자인의 상상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그리고 이것에 대한 예견으로 미리 미래의 우리의 색깔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과제로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짧은 과거를 돌아보고 이해하는 바탕을 통해 더 넓게는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이해하고 수용하여 표현해야하는 새로운 숙제에 대하여 우리가 논해야 하는
분야인 가구라는 테마를 가지고 본 연재 칼럼을 통하여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려고 한다.
현대 가구디자인으로의 여정
우리는 근대 이후만을 놓고 보더라도 여럿의 디자인 역사 분류를 접할 수 있다. 이 분류라고 하는 것은 사실 계획되어
진행해 왔다기 보다는 한 특정 분야의 양식의 지나온 것에 대한 분석과 정리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으로 이해된다.
현대 디자인의 시작쯤으로 볼 수 있는 19세기의 모습은 대부분 자연스러움에서 온 서민 풍의 모습이거나 또는 산업혁명
여파로 발달된 철강산업의 결과인 철제의 우아한 형태, 예를 들면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제가구 및
장치들, 그리고 미국의 셰이커 종교단체에서 보여주는 시간적으로 사회적으로 한정된 공간에서 나올 법한 생활양식의 모습
들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는 디자인이 주는 의미에 도달하지는 못했고, 단지 생활의 편리함 추구와 한정적 정서를 반영
하는 자연스러움에서 나온 결과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오랜 고대부터 산업혁명 여파로 대량생산이라는 산업구조를 지닌
19세기까지는 사회 전반이 신분이라는 상징적 틀의 지배를 받아왔고, 더불어 함께 했던 그 시대의 양식이란 개개의 신분에
맞게 과장되게 치장되어 신분의 권위를 과시적으로 뽐내기 위한 형태였을 것이고, 아니면 천민 계급을 위한 아주 천박하게
아무렇게나 만든 모양새가 전부였다. 권위를 과시해야했던 귀족계급은 그들의 생활도구에 과대 망상적으로 치장을 가해
그들 스스로의 자족을 채웠고, 더불어 서민들의 부러움을 먹으며 배불러 했던 현상들이 양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우리는 가구라는 한정된 분야에서 조금은 색다른 인상을 발견하게 된다.
미하엘 토네트(Michael Thonet)<3>의 나무를 자유형태로 굽혀 구조를 염두에 두고 만든 의자의 모습에서 많은 가구
제작자 및 건축가들은 가구디자인의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사진1.1870년경 토네트(Thonet)가 디자인한 의자(제품번호-14)로 굽어 만든 목재의
사용이 돋보인다. 토네트의 제품번호-14의 조립 전 단계 부품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관심의 대상인 DIY(Do It Yourself)가구의 전형으로도 이해된다]
[사진1] 당시만 하더라도 사실 건축가들에겐 건물의 전체적 형태와 공간의 배분문제가 중요했지, 공간 안에 들어가 사용될 가구에
그다지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토네트의 가구 영향으로 아돌프 로스(Adolf Loos)나 요세프 호프만(J.
Hoffmann)과 같은 건축가들은 건축과 더불어 내부에 들어찰 가구에 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실제로 토네트의 가구제작소에 은행
을 위한 가구를 주문해 실내계획에 적극성을 띄었던 것은 실내(Interior)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라 여길 수 있다. 우리는 한때
과거의 나태함에 머물며 변화되어 가는 사회의 흐름을 거역했던 빅토리아 시대를 볼 수 있었다. 이때는 이미 기계의 발전으로 다량의
가구를 생산할 수 있었고, 디자인의 가능성 및 보다 튼튼한 구조로의 발전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계를 이용해 단지
복잡한 무늬나 문장 등을 파내 가구 원형의 아름다움을 사기보다는 각각의 기호와 취향에 맞게 장식을 변형하여 그들만의 즐거움을
위해 봉사하게 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사실 기계문명의 발달 이후 인간은 가정이라는 자연스럽고 따스한 공간의 느낌을 기계가 대신
하여 채워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믿으려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 디자인운동이 맹목적인
반항의 것이라고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이것은 한 사회가 시간의 흐름에 의하여 변화를 하듯이, 따라서 변화되고 발전되어 가는
사회 현상 속에 두고 이해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19세기말경 전통적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통의 틀에서 단지 조금 단순하면서도 공예적 상징성을 띤 가구를 제작했던 영국의
미술공예운동과는 다르게 유럽 대륙에서는 주목할만한 시도가 엿보였는데, 이를 아르 누보(Art Nouveau)<4>라고 한다.
[사진2. 1895년 헨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가 책 장정을 위해 디자인한
아르누보의 문양]
[사진2] 아르 누보는 선의 장식적인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다루었다. 기하학적 근간에 기초한 이것을 사람들은 스타일이라고 부르기보
다는 시대의 다양성을 내포한 하나의 운동이었다고 기억하고 싶어한다. 식물의 구조에서 영감을 얻고, 기하학에 근간을 두며, 장식적
성격이 강한 선과 색, 특히 일본에서 영향받은 것 같은 선적이며 색감이 풍부한 동양의 미의 인식 등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이 운동
은 과거의 스타일에 심취했던 역사주의와 기계에 대한 적절한 인식이 바탕이 된 모던 운동 사이의 과도기에서 나름의 시대갈등을 극복
하려 한 모습이 중요하게 자리 잡으며, 예술과 공예운동과 같은 양식주의 혹은 역사주의와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가구디자인
의 주류를 이루는 기능주의 사이의 과도기를 슬기롭게 이어준 점, 그리고 과도기의 양식으로서 자기 나름의 위치와 시대가 말해주는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기계의 유용성을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점이 훌륭하게 자리 잡는다. 대륙의 아르 누보에 비해 영국의 모습은
여전히 전통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점이 있었다. 물론 비슷한 인식 아래 작업을 이어갔던 찰스 레니 매킨토시(Charles Rennine
Mackintosh)<5> 의 작품세계가 두드러져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글라스고우를 제외하고는 건축이나 가구디자인에서 고유양식의 늪에
한발쯤 담그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사진3.1903년 힐 하우스(Hill House)의자.
흑단색의 참나무로 만들어진 사다리형의 등받이 모양.
헬렌스버그에 있는 힐 하우스의 침실에 디자인 되었다]
[사진3] 이 결과 오늘날도 전통가구(Stil furniture)의 맥 이외에 이렇다 할 역할이 대두되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
을까 싶다. 아르 누보가 실지로 꽃핀 곳은 벨기에다. 벨기에는 사실상의 아르 누보의 진원지로 인식되며 과거의 전통주의에서 찾으려
고 한 스타일의 모방과 범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노력한 곳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벨기에의 아르 누보를 이끌어 온 사람은 건축을
직업으로 갖고 있던 헨리 클레멘트 반 데 벨데(Henry-Clement van de Velde)<6>라는 사람이다.
[사진4. 1900년경 헨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가 디자인한 바느질을 위한
테이블과 안락의자 세트]
[사진4] 그는 건축뿐만 아니라 실내와 가구디자인 영역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웠다. 정적이며 굳어 있는 듯한 것에서 탈피하
여, 동적이며 조형적이고 구조적인 양식을 많이 사용한 것이 창조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 아마도 건축적 공간성에 기초한 이해가
잘 정리되어 나타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독특한 양상의 아르 누보 운동이 전계되었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식
아르 누보라고 불리는 분리파(Secession)<7> 양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여기에는 다분히 반항적이며 대단히 독립적인 의지를 견지한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장식은 죄이다 라고 규정한 오스트리아 건축계의 거장인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 견해로 대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5. 마르트 쉬탐스(Mart Stams)의 이름으로 의자
개발 계획을 보여주는 다양한 의자의 구조적 구성 스케치들]
[사진5]늘 그래왔던 것처럼 제1차세계대전 직후 유럽대륙에는 전후의 새로운 예술조류가 다양하게 꽃피기 시작했는데, 프랑스에서는
입체주의로, 러시아에서는 구성주의로 나타날 때, 네덜란드에서는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과 테오 반 되스부르그
(Theo van Doesburg)로 대표되는 데 스틸(De stijl)<8> 운동이 있었다. 데 스틸운동은 이전의 다른 디자인, 예술 활동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보이는데, 이는 과거의 전통에서 찾거나 자연 속에서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재해석 차원을 넘어 다분히 추상적이며
기하학적인 실험이 도입되었다는 점이 두드러져 보이고, 더불어 이전의 가구들이 가졌었던 전통적 구성구조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새로
운 실험적인 구조가 사용되었다는 측면이 주목되었다. 물론 이 당시의 가구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리트벨트(Gerrit Thomas
Rietveld)<9>의 가구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그다지 편하거나 안락한 감은 주지 못하였지만, 명확함과 견량감을 주면서 서로 밀접
하게 연결되어 있는 구조들이 이후에 나타나는 바우하우스(Bauhaus)<10> 에서 보다 더 발전적인 모습 즉 기하학적 체계보다는 기능적
인 시스템을 적절히 이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했음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 사진6. 1918년 게리트 토마스 리트벨트(Gerrit Thomas Rietveld)의 빨강-파랑 의자(Rot-Blau Stuehle) 전 단계 ]
[사진7. 트렌짓(Transit)의자. 뼈대에 옻칠을 하고, 패드를 넣은 가죽으로 시트를
만든 의자로서 아일린 그레이(Eileen Gray)가 1927년에 로키브룬(Roquebrune)에 있는
E-1027 거실에 디자인한 것이다]
[사진6] [사진7] 여기에 연결되어 독일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바우하우스이다. 바우하우스는 독일공작연맹(Deutsche Werkbund)<11>의
일원 중의 중요한 명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에 의해 설립된 학교 즉 바이마르 예술 아카데미(Waimar Kunst Akademie)와
바이마르 미술공예학교에서 유래하였다.
[사진8. 독일공작연맹의 전시 포스터.
이는 1927년 빌리 바우마이스터(Willi Baumeister)의
설계로 이루어진 한 주거 공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8] 그는 독일의 공작연맹이 추구하는 기계와 모리스가 추구하고 갈망하였던 미술공예에 대한 신념 사이의 조화로운 결과에의
도전을 이 교육기관을 통해서 실현해 보고자 노력했음을 볼 수가 있다. 이때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이라면 기계에 대한 일반적 반감과
혐오감을 극복했다는 점이고 더 나아가 기계 발전에 기반을 둔 산업정신에 예술이라는 과제를 더하여 풀어갔다는 것이 무엇보다 돋보
인다. 이를 위해서 그로피우스는 교육 과정에 실현 상황을 주기 위해 형태와 색채, 재료와 직접 연결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피교육자
모두에게 상당의 숙련을 요구하였다. 이는 그의 주장처럼 `예술은 직업을 위한 것이 아니다 라는 기치 아래 예술가와 수공예가의 구분
점 사이의 쓸데없는 오만과 낭비를 없애려고 한 노력이었다.
[사진9. 독일 데시우(Dessau)의 바우하우스(Bauhaus)에 있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의 집무실 전경.
그로피우스가 디자인한 안락의자가 보인다]
[사진9] 바우하우스의 교육은 객관성을 기본 근간으로 하여 창의적인 상상력을 실지와 연결시켰고, 기능적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명제 앞에 새로운 감각을 늘 필요하게 만들었다. 이 시대를 대표했던 디자이너를 살펴보면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 미스 반 데어 로 에(Mies van der Rohe),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를 들 수가 있는데, 이미 알고 있듯이 이들의 만든 가구의 단순함과 기능성은 오늘날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다. 1933년도에 히틀러에 의해 강제로 학교 문이 내려질 때까지 이 운동은 독일을 벗어나 전 세계에 새로운 도전을 안겨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첫 예를 스칸디나비아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우하우스의 합리주의적인 공간 창조에 바탕 하여 새롭고 유용한 형태미를 찾아 나선 기능주의(Functionalism)<12>의 발전은 1930년대 이후 국제적인 양식으로의 발전을 보게 되었 으며, 이 영향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 스칸디나비아라고 하면 지리적 특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는 이 속에 속한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즉 이 네 나라의 지리적 요소와 더불어 문화적, 역사적 유대성을 염두에 두고 이해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여기에는 오랫동안 공유할 수 있는 전통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사회 및 경제 정책과 법률을 공유하는 그러 한 실질적인 유대가 돈독한 공동 단위체로 인식되는 것이 바로 스칸디나비아이다. 이 지역의 고저 차가 심한 대륙의 모양새, 깍아질 듯 한 협곡, 약 6만5천여개의 크고 작은 호수, 그 사이사이로 나있는 울창한 침엽수림 등의 모습이 이들이 가지고 있는 외형의 자연 조건이다. 이들의 자연 조건에서 보여주는 여유로움이 그들의 예술과 디자인에 많은 영향이 있음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늘 자연에 의 경이로움에 감동을 늦추지 않았으며 자연과 자연현상, 더불어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경의가 이들에게 배어 있음을 직감할 수가 있다. 이들은 또한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기를 좋아하였으며, 세계로부터 들어오는 여러 유형의 영향들을 받아들여 그들만의 언어로 보다 강렬한 색채로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밝게 해석한 그들만의 얼굴이 있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에 가구디자인에서도 그들만의 고유한 영역과 예술적 감각들이 외부에서 온 기능주의적 발상들과 적절히 조화하여 스칸 디나비아 풍의 목재가구가 밝은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매우 감동적인 일로 여겨진다. 우리는 이런 결과를 핀란드가 자랑하는 세계적 건축가이며 가구디자이너인 알바르 알토(Alvar Aalto)의 의자들, 특히 `스타킹의자에서 엿볼 수가 있는데, 이는 그의 나무를 이용한 곡목(bent wood)에 대한 애착과 목재의 유기적 해석력의 결과로 훌륭한 디자인의 결과물이 값싸게 제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사진10. 알바 알토(Alvar Alto)의 목재에 대한 실험을 보여준 장면. 여기서
그는 기술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변형의 한계와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미적
가능성을 실험하려 하였다]
[사진11. 1935~39 사이에 Artek 회사에서 제작될 안락의자를 위한
알바 알토(Alvar Alto)의 스케치]
[사진10] [사진11]독일의 나치정권이 들어선 이후 독일에서 있었던 바우하우스 운동은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이마르 (Waimar)에서 데사우(Dessau)로 옮겨진 바우하우스는 1932년 다시 문을 닫고 베를린(Berlin)으로 옮겼으나 결국 쫓겨나다시피 문을 닫게 되었고, 몇 년 후에 이 운동에 참여하였던 건축가이며 가구디자이너들인 발터 그로피우스, 마르셀 브로이어,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이 대거 미국으로 이민의 길로 접어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늘 그런 것처럼 전쟁이 있으면 부강해지는 쪽이 있는가하면, 전쟁의 여파로 피폐해져 국가의 재건에 온 국력을 투자해야 하는 반대편의 입장도 있는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파괴 된 국가의 기간산업 및 도시의 재건에 온 국력을 기울여야 했으며, 예술적 고려나 디자인 적 창의력보다는 다량의 주택과 도로의 건설 에 온 힘을 기울일 수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미국은 전쟁의 결과로 국가가 부강해졌고, 군수산업의 여파로 공업의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이다. 유럽으로부터 이어받은 가구산업은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빠른 속도로 발전했음은 당연한 이치였고, 더불어 공업의 눈부신 발전의 결과, 과거 목재와 철제에 국한되어 제작되었던 가구에 새로운 재료가 사용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플라스 틱의 개발이었다. 형태와 기술은 새로운 재료의 개발에 의해서 연구되고 발전되듯이 플라스틱의 등장으로 디자인너들은 가벼우면서도 다양한 곡선과 곡면을 연출할 수 있는 자유로운 창작욕을 불태울 수 있었고 인체에 맞는 의자를 생산하려는 그들의 상상력을 기계의 능력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진12. 1927년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에 의해
제작되어 세계적 주목을 받았던 대표적 의자
Wassily Armchair를 이태리의 알렉산드로 멘디니가
1978년에 재해석하여 만든 변형]
[사진12]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대표적 디자이너로 찰스 임스(Charles Eames)<14>를 꼽을 수가 있는데, 그의 철제 플라스틱 의자에서 이 시대의 디자인적 상상력의 발전 단계를 직감할 수가 있다. 찰스 임스는 인체 유형에 맞고, 앉는 동작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소프트 하고 가벼운 의자를 적당한 가격에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그 후에도 몰딩된 합판제, 유리섬유의 강화합판제, 철망구조, 알루미늄제 등을 사용하여 다양한 의자들을 허만 밀러 등의 회사를 통하여 선보였다. 이후 우리는 60년대에 들어와서 새로이 등장 하는 유행의 경향을 읽을 수 있는데, 이를 우리는 팝 아트(pop art)라고 한다. [사진15] 이것은 미국에서 발생한 것으로 사회의 비판 의식과 통념들이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사회에 반사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가구에도 역시 이 영향이 나타나 가구의 구조적인 숙제나 재료에 대한 새로운 이해나 표현의 중요성보다 다분히 회화적인 얼굴이 중요시되는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 현상 으로 그치고 이후에도 간간이 예술적, 실험적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사진13. 포스트모더니즘의 거장인 미국의 건축가 마이클 그레이브스
(Michael Graves)가 1979~1981년에 디자인한 의자]
[사진14. 독일 Dauphin사의 환경을 고려한 알루미늄과 합판재의 사용과 미니멀리즘의
정신이 깃들여진 의상스케치]
[사진15. 1969~70년경 팝아트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의 비쉬의 온천장에
나타난 플라스틱 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