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끝난 지 400여 년이 지난 지금. 경상. 전라도 해안에서 때아닌 거북선 전쟁이 벌어져 긴장이 감돌고 있다. 경상남도가 2011년까지 완료할 계획으로 1.440억 원을 들여 “이순신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거북선을 건조 운항할 계획이며. 전라남도는 40억 원의 예산을 들여 “명량대첩 승전 현창사업”을 추진. 거북선을 만들어 명량 해전의 전승지인 울돌목에서 운항할 계획이다.
이 외에도 여수. 사천. 통영 등 일부 기초자치단체가 경쟁적으로 나서서 거북선을 앞장세워 지역이미지를 높이고 관광 자원화할 계획을 진행함으로써 한반도 남해안에 거북선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말할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을 가장 앞머리에 떠올린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전략전술과 지도력은 임진왜란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 세계 해군사의 빛나는 고전이 되었다. 거북선 또한. 우리 민족의 가슴에 신화로 남아 있다.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만들어 왜 수군함대와의 해전에서 연전연승의 불패신화를 창조하고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413년(태종 13년)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귀 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연습을 하는 것을 보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1415년(태종 15년)에는 탁신이라는 신하가 “귀 선의 전법은 많은 적(적선)과 충돌하더라도 적이 아군을 해칠 수가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더욱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라는 뜻을 상소한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훨씬 이전인 조선 초기부터 거북선 형태의 전함을 개발. 실전에 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상대편 전함에 올라타 칼로써 싸우는 일에 능한 왜 수군을 상대로 하는 해전에서 거북선형태의 전함이 최선이라는 사실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임진왜란을 앞둔 당시에 조선 수군에 거북선이 없었으며. 거북선을 활용하여 왜 수군함대와 싸우는 전략. 전술도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또한. 건조기술을 아는 기술자나 목수도 없었다.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의 인연은 나대용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대용은 1556년 7월 25일 나주 문평면 오룡리에서 태어났다. 1583년(선조 16년)에 28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로 있다가 32세 때인 1587년(선조 20년)에 사직하고 나주 고향으로 돌아와 거북선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후 나대용은 3년여의 연구와 실험 끝에 고향동네 방죽 골이라는 곳에서 최첨단. 최신형 거북선의 조립. 건조에 성공하게 된다.
나대용은 거북선에 대한 연구결과를 가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여수에 있는 전라좌수영을 찾아 이순신 장군에게 자신이 연구. 개발한 새로운 거북선의 우수성과 활용성을 고하여 이순신 장군이 이를 채택하였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나대용을 전라좌수영 수군의 전선을 건조하는 감조 군관으로 임명. 거북선과 판옥선 등 조선 수군의 주력전함건조를 맡겼다. 이순신 장군과 나대용. 거북선의 운명적 만남이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나대용장군은 1년여 동안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인 수많은 판옥선과 함께 거북선 3척을 완성하여 1592년 3월 27일 거북선을 진수하고 운항 및 발포실험까지 마쳤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대용장군은 거북선을 타고 당포해전에 처음 출전. 돌격작전을 감행하여 왜 수군의 기세를 제압하고 전열을 무너뜨리는 등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대승을 거두는데 항상 앞장을 섰다.
삼국시대 백제의 일본. 당나라와의 해상 무역선. 통일 신라 시대의 청해진 장보고의 무역선. 고려시대의 검선. 최무선의 화통도감 등으로부터 조선기술. 항해기술. 화포기술이 전승. 발전하여왔다. 조선조 초기인 태종 때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해 병력수송과 해상전투를 모두 해낼 수 있는 판옥선이라는 전함을 연구. 개발하게 된다.
판옥선은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고 길이는 30m에서 50m 급까지이고 150톤부터 300톤까지 크고 작은 여러 형태로 건조. 운영되었다. 판옥선의 내부 구조는 2층으로 되어 노 젓는 곳과 포와 활을 쏘는 곳이 분리되어있었다.
판옥선의 장점은 전함의 크기가 커서 함포를 많이 탑재할 수가 있고 궁수 등 공격인원을 최대한 많이 승선시켜 전투에 임할 수가 있으며. 노를 젓는 격군. 포수와 궁수 등이 배의 안쪽에 가려져 있어서 왜군의 공격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다.
또한. 배가 빠르고 튼튼하여 적선과 충돌하여도 피해가 거의 없이 왜군함선을 격파. 침몰시킬 수가 있고 평저선이어서 수심이 얕은 곳에서도 기동할 수 있고 회전반경이 좁아 전략 전술적 선택의 폭이 넓다는 점이다.
이러한 여러 장점으로 판옥선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 수군의 주력전함으로 자리 잡았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선체에 거북의 등 껍질 같은 지붕을 씌운 형태로 판옥선이 그 주요 모형이다.
나대용장군은 판옥선보다 더욱 안전하며. 더욱 빠르며. 더욱 큰 전투력을 발휘할 새로운 돌격전함으로 그 시대 최첨단인 신세대 거북선을 개발해낸 것이다. 거북선은 전설과 달리 철갑선이 아니었으며. 주요특징이며. 장점 중 하나였던 것은 2층 노 젓는 공간이 1층보다 옆으로 튀어나왔다.
따라서 거북선의 노는 그리스. 로마시대의 해전영화에서처럼 옆으로 뻗쳐 젓지 않고 거북선의 진행방향과 같이 거북선 선체에 붙여 저었다. 그러므로 왜 수군의 배들 사이에서도 노가 부러지지 않으며. 배 안으로 노를 끌어들이지 않고 계속 노를 저어 거북선을 전후좌우로 움직일 수가 있었다.
왜 수군의 주력전함인 누각 선은 배가 좁고 길며. 높다. 선체의 재료로는 일본산 삼나무를 썼는데 가벼워 장거리 항해에는 유리하나 충돌 등에는 매우 약하다. 좁은 해협 등에서의 전투에서는 배 밑바닥이 V자 형태의 방형 선저여서 회전반경이 넓어 불리하다. 거북선. 판옥선과 충돌할 경우 판옥선과 거북선은 멀쩡한데 왜선은 대부분 격파되었다. 또한. 왜 수군의 주요 무기는 조총과 화살. 칼이었다.
조총의 유효사거리는 50~70m였으며. 화살 또한. 같았다. 왜 수군의 자랑인 칼솜씨는 조선 수군 함선에 배를 대고 뛰어올라야 실력을 발휘할 수가 있는데 조선 수군의 주 무기는 함포였다. 함포의 유효 사거리는 포의 종류에 따라 200~1000m였으am로 왜 수군은 근접전에 의한 유리함을 살릴 수가 없었다.
여기에 더하여 거북선은 두께 12cm이상의 소나무 판으로 만들어져 왜 수군이 아무리 조총과 활을 쏘아도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거북선이 왜선을 들이받아 파괴할 때도. 왜 수군은 거북선에 오르지 못했는데 거북선의 지붕에 수많은 송곳을 꽂아 왜군이 발붙일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당포해전을 비릇 수많은 해전에서 주로 학익진을 펼쳐 왜 수군을 격파하였다. 학이 양 날개를 펼친 형태의 학익진은 왜 수군을 좁은 수로나 섬 사이로 유인하여 포위한 다음 왜 수군 함대의 지휘부가 있는 한가운데로 거북선이 돌격하여 거북선의 전후. 좌우에 있는 왜 수군 전함에 포를 쏘고 충돌하여 왜 수군함대의 전열을 흔들어 버리고 지휘체계를 마비시켜 버린다.
이렇게 왜 수군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우왕좌왕할 때쯤 판옥선이 포위망을 좁혀 들어와 포를 쏘고 화살을 날리며. 공격하여 왜적을 소탕한다. 따라서 조선 수군은 200~1000미터 밖에서부터 왜 수군에게 효과적인 공격을 가할 수가 있고 왜 수군은 조선 수군이 50미터 안에 들어와야 공격을 할 수가 있었다.
이렇듯 전함의 크기와 종류. 조선술. 항해술. 선체 등 조선재료. 무기체계. 전략. 전술. 해안의 지형과 물때 정보. 왜 수군의 이동 정보 등 모든 면에서 조선 수군은 왜 수군을 압도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시작된 이후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왜 수군의 호남 및 서해안 진출을 막아 조선왕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내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간계에 빠진 조정의 명령으로 해임되어 권율 장군의 부대에서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1597년 7월 16일 역시 왜군의 간계에 빠진 조선수군 총사령과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 함대는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고 만다.
242척의 판옥선. 3척의 거북선 등 245척의 함선이 적의 포위 공격과 화공 등으로 대부분 침몰하였고 조선 수군 1만 7천 명 중에 648명만이 살아남았다.
원균의 패전과 조선 수군의 몰락으로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에서 풀려나 다시 조선 수군의 총 사령관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탈출에 성공한 판옥선 12척과 패잔병 648명을 중심으로 전라도 남해안 주민 중에서 수군지원병을 모집. 지휘하여 2개월 후인 1597년 9월 16일 명량 해전에서 1척의 전함을 추가. 총 13척의 전함으로 수백 척의 왜 수군 주력함대와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둔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 해전의 승리로 전세를 다시 역전시켜 왜 침략군이 패배를 인정하고 철수토록 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나대용장군은 명량 해전과 노량해전에도 참전. 이순신 장군의 분신이 되어 조선 수군의 승리에 큰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도 “창선”이라는 철갑선과 “해추선”이라는 쾌속선을 개발하는 등 한민족 역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기술자였다. 장군은 강진 현감. 고성 현감 등을 역임하였고 1611년(광해군 3년)에는 경기도 수군의 총 지휘관인 경기수사를 제수 받았다.
그러나 사천해전과 한산대첩에서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은 후유증으로 1612년 1월 29일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나대용장군은 민족의 역사 속에서 사라지다시피 했으나 이를 아쉽게 여긴 노산 이은상 선생을 중심으로 1974년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대용장군의 출생지인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에 나대용장군의 생가. 묘소. 방죽골. 장군바위 등이 있으며. 전라남도 문화재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어있다. 또한. 나대용 장군 기적비.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소충사가 있다.
소충사에서는 매년 4월 21일 나대용 장군 추모제가 열린다. 추모제는 일반적으로 고인의 탄생일이나 서거 일에 열리는데 나대용장군의 추모제는 과학의 날인 4월 21일이다. 거북선 등 전함의 연구와 활용에 평생을 바쳐 민족의 역사에 공헌한 발명가이자 조선기술자인 고인의 충성심과 창의 정신을 기리고자 한 것이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1800년대까지 조선 수군의 주요 전투함으로 계속 건조되어 작전에 참가하였다. 현재 한국해군의 8번째 잠수함의 이름이 나대용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