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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를 보는 두 가지 시각 송 재 소(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대나무는 매화, 난초, 국화와 더불어 4군자로 일컬어진다. 중국 송나라 때 임포(林逋)는 결혼도 하지 않고 항주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혼자 살면서 ‘매처학자(梅妻鶴子)’ 즉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매화를 사랑했다. 우리나라의 퇴계(退溪)선생도 매화를 무척 사랑하여 매화를 꼭 ‘매형(梅兄)’이라 부르며 매형과 대화하고 매형과 주고받은 시를 여러 편 남겼다. 난초도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등장한 이래 고결한 선비의 상징이 되었고, 국화는 도연명이 술만큼이나 사랑했던 꽃이다. 대나무도 예외가 아니어서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왕휘지(王徽之)는 집 주위에 대나무를 심어놓고 “어찌 하루인들 이 군자가 없을 수 있으리오”(何可無一日此君)라 하여 대나무를 ‘이 군자’라 불렀다. 이로부터 ‘차군(此君)’은 대나무의 별칭이 되었다. 소동파(蘇東坡)도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無竹令人俗)는 시구를 남겼다. 이렇게 ‘매형’, ‘차군’으로 의인화될 정도로 사군자는 옛날부터 선비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대나무의 네 가지 미덕, 고(固), 직(直), 공(空), 절(節) 그런데 최근 서양에서 이 사군자 중 대나무가 각광을 받는다고 한다. 국내 일간지에 의하면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가 “환경단체와 건축가들이 친환경 주택의 원자재나 바닥 및 가구의 소재로 대나무에 주목하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즉 대나무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산소를 배출하는 기능이 다른 나무보다 35% 정도 뛰어나서 친환경적이고, 좌우나 상하로 당기는 힘에 견디는 능력이 강철보다 우수하고 압착(壓搾)에 저항하는 힘이 콘크리트보다 강해서 건축자재로 적합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프레임이 대나무로 된 자전거까지 등장했는데, 탄소섬유 프레임의 자전거보다 충격과 떨림을 잘 흡수해서 장거리 주행의 피로감을 덜어준다고 한다. 그래서 프린스턴 대학의 사이클 선수인 닉 프레이는 최근 대나무 자전거를 구입했다고 한다. 뉴스위크는 이런 현상을 ‘대나무 혁명(bamboo revolution)’이라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이 서양인들이 대나무를 보는 시각은 철저히 실용적이다. 반면 동양인들이 대나무를 보는 시각은 다분히 정신적이다. 중당(中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쓴 「양죽기(養竹記)」에는 대나무의 미덕을 4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뿌리가 단단하여(固) 뽑히지 않고, 둘째 성질이 곧아서(直) 기울지 않고 똑바로 서있으며, 셋째 속이 비어서(空) 욕심을 버리고 남을 받아들일 수 있고, 넷째 마디(節)가 정절(貞節)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 고(固), 직(直), 공(空), 절(節)은 모두 군자가 본받아야 할 정신적인 덕목이다. 이 중 대나무가 지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과 ‘절’이다. 온갖 욕망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움으로써만 그 자리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대나무는 가르쳐 준다. 또 마디와 마디 사이는 막혀 있어서 서로 넘을 수 없다.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게 된다. 이것이 군자가 배워야 할 덕목이다. 예절(禮節), 절개(節槪), 절조(節操), 정절(貞節) 등의 어휘에 대나무 마디를 뜻하는 ‘節’자가 들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양인은 물질적인 실용을, 동양인은 정신적인 덕목을 서양인은, 강철보다 강하고 콘크리트보다 단단한 대나무의 속성을 발견하고 건축자재로 활용할 생각을 하는 반면에 동양인은,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를 보고 군자의 절개를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서양인은 물질적인 실용을 중시하고 동양인은 정신적인 수양을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실용을 중시하는 서양인이 대나무의 공(空)과 절(節)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새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가 지나치게 실용을 추구한 나머지 자칫 정신의 황폐함을 초래하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
첫댓글 고(固), 직(直), 공(空), 절(節), 하지만 속세란 解, 曲, 得, 變 하여야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법. 대나무로 상징되는 가치들은 고귀한 경지를 獨步하는 소수 군자들의 것이고, 산과 들에 지천으로 피었다 지는 雜것들이 품은 의미는 장삼이사들의 것이니, 우리들 눈높이를 어디에 어떻게 맞추어야 할까나. 마디와 마디를 터 道와 俗의 경계를 일통하는 '통섭론'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