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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바로 알기
(마태 6:9-13)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기도 중의 기도요, 주기도문을 통해서 기도를 배웁니다. 기도를 배우면서 알게 되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도 기도하신다는 사실(롬 8:26, 8:34)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으로 들어갑니다. 기도를 통해서 매인 것을 풀고 닫힌 문을 엽니다.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어떤 기도도 말씀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말씀 안에서 기도해야 하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하고, 말씀을 따라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하나님께 바로 기도하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가 명확해집니다. 그 삶의 길이 비록 좁은 문과 좁은 길일지라도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기도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단에 빠질 수밖에 없고, 기복적인 초보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주기도문 바로 알기’라는 제목으로 수요 성서연구 산상수훈 19번째 시간에 나눴던 말씀을 요약하여 나눕니다. 그 이유는 몇 년 전부터 한국교회에 ‘주기도문’에 대한 약간의 혼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 번역의 역사
한국교회에서는 오랫동안 개역성경을 사용해 왔습니다. 개역성경이 주를 이루던 한국교회에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새번역성경이 등장하게 되었고 개역성경을 개정한 개역개정판이 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번역본 성경 중에서 새번역성경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어체로 되어 있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325년 니케아(Nicaea-현재 터키의 이즈니크)을 새번역으로 번역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런 움직임은 당시 한국교회의 신선한 흐름으로 인식되고 추진됐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만 100년 이상 잘 고백해온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급작스럽게 바꾸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한국 교회 전체의 공감대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 논란의 와중에 한국의 성서보급을 담당하고 있는 기독교성서공회는 새찬송가 개편과 더불어 개정개역, 새번역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모두 게재합니다.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모두를 배려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새찬송가의 보급 때문이었습니다. 새찬송가의 보급으로 얻어질 막대한 출판이익 때문에 기독교출판계 사이에서 법정공방이 진행되었고, 교단별로도 분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총회본부 문서선교부장으로 있었기에 이 부분들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결론은 돈 문제와 결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교단별로 어떤 번역본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책을 결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성경책을 보급되었고, 개교회별로 알아서 선택하여 사용됨으로 혼선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모두 개정개역판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새번역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도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아직 우리 한국교회의 교단과 기독교단체는 이런 중요한 기도문과 신앙고백문 조차 하나로 합의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가운데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2. ‘주기도문’의 번역 중에서 혼선을 일으킨 부분들
나라이 임하옵시며 – ‘나라이’를 ‘나라가’로 번역한 부분
대개 주의 나라 - ‘대개’를 생략하고 ‘주의 나라’
마옵시고, 주옵시고 – 마시옵고, 주시옵고
‘나라이’는 ‘나라에’라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며, 잘 사용하지 않는 구어체로서 ‘나라가’로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개’라는 말은 ‘큰 원칙으로 보건데’라는 말입니다. 영어로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이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다는 고백입니다. ‘대개’라는 단어에는 이렇게 귀한 뜻이 담겨있지만, 원본에는 ‘대개’로 해석할만한 단어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게’라는 단어가 없어도 의미상의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개역개정과 새번역 모두 ‘대개’를 삭제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옵시고, 주옵시고’는 ‘마시옵고, 주시옵고’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그냥 요즘 사용하는 단어로 바꾼 것 이상 큰 의미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혼용되고 있다는 점이고, 그래서 혼란스러워한다는 점입니다. 기왕에 주기도문을 하는데 한목소리로 토씨까지 맞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면 몇몇 단어의 차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찬송가 635장과 636장인데 635장에는 ‘대개’라는 구어체가, 636장에는 ‘나라이’라는 구어체가 여전히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찬양은 시적인 음률을 따라가므로 이런 문제까지 세밀하게 조율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의 참뜻을 알고 있으며, 구어체를 포함한 주기도문을 드리든지, 새로 번역된 주기도문을 드리든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기도문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자 이제, 주기도문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겠습니다.
3. 모범적인 ‘주의 기도’를 얼마나 깊게 알고 계십니까?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드린 기도가 아니라,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입니다.
주의 기도는 이천 년 이상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암송해온 기도문입니다. 주의 기도는 마태복음(6:9-13)과 누가복음(11:2-4) 두 복음서에 나옵니다. 마태복음의 주의 기도는 산상수훈 가운데 있고,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기간 동안, 즉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중에 말씀한 교훈에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7개의 청원이, 누가복음에는 5개의 청원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주의 기도가 누가복음의 주의 기도보다 깁니다. 그리고 몇몇 사용된 낱말들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요, 후반부는 우리 자신을 위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송영입니다. 이 구조는 십계명과 비슷합니다. 십계명도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하여 지켜야할 계명, 5-10계명은 인간 사랑에 대한 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1) 하늘에 계신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말씀으로 주기도문은 시작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의 기도 대상입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기도는 어느 곳에나 계신 하나님, 장소에 얽매이지 않으신다는 의미인 동시에, 우리에게서 멀리에 계신 분,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절대로 인간과는 다른 분(他者-절대자)이시라는 의미입니다.
2) 우리 아버지
아람어로 ‘아버지’는 ‘아바Abba’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고(롬 8:15, 갈 4:6)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축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닮아감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기쁨이 자녀의 잘 됨에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의 행복은 피조물에 행복에 있습니다. ‘아빠’라는 표현은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고백입니다.
3)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첫째 청원)
마태복음의 주의 기도에는 두 종류의 청원이 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청원(3개), 우리에 대한 청원(4개)입니다. 십계명 전반부 1-4계명이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이요, 5-10계명이 우리와 관련된 계명이었는데 이와 같은 형식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두 개의 눈이 필요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눈과 사람을 보는 눈, 하늘을 보는 눈과 세상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알 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전 존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이름을 물을 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십니다. 나는 “I AM WHO I AM.”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 7번 나오는데 모두 ’I AM‘으로 시작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10:7),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26), 나는 참포도나무다(15:1),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왕이다(요18:7).
4)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둘째 청원)
여기서 ‘나라’는 영토의 개념이 아니라, 그의 통치와 지배를 의미합니다. 이 청원은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이므로 ‘나라에 임하옵시며’로 외우면 아주 틀린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인은 이 청원기도를 통하여, 역사가 완성되는 종말의 실현을 기원하고, 동시에 불의와 죄와 불합리, 불평등이 판을 치는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이뤄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긴장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지만, 아직도 이 세ㅐ상은 마귀의 권세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5)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당신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어지이다(셋째 청원)
이 청원은 아직도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지 않고 거부되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정의가 침묵 당하고, 의로운 이들이 핍박을 받는 현실에서 우리가 드릴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리겐 교부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면, 땅은 이미 땅일 수 없다. 그때에 우리는 모두 하늘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정과 교회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왜냐하면, 그곳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6)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넷째 청원)
문자 그대로 양식이요, 밥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시면서 “사람은 떡으로 살 것이 아니다”하셨지만, 양식은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조건입니다. 이 기도는 누가 드렸을까요? 절박한 사람들의 기도입니다. 부자가 드릴 때에는 ‘더 많이 가지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나눔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먹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양식은 생명의 보존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삶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은총의 도구입니다. 양식은 친밀한 교제를 위해 필요합니다. 밥상머리교육, 식탁에서의 교제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밥통이 열릴 때 소통이 시작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더불어 식탁교제를 나누면서 가르치셨고, 그것을 즐거워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삶에서는 식탁의 교제가 매우 축소되어 있습니다. 패스트푸드는 이런 식탁의 교제를 훼손했습니다. 저는 한남교회가 식탁의 교제를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영육간의 양식, 이 두 가지가 골고루 조화로운 교회가 부흥할 수 있습니다.
7)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다섯째 청원)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이웃을 향한 용서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조건으로 먼저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무조건 용서가 주어졌기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삶이 무엇인지 말씀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용서는 한 짝입니다. 용서 없는 기도, 기도 없는 용서는 없습니다. 용서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 주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예수님이 이 당에 오신 이유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용서를 통해서 죄의 종이 된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죄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생긴 죄책감과 증오심, 복수심과 분노, 이기심과 탐욕, 열들의식과 상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용서입니다.
8)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여섯째 청원)
성경에서 ‘시험’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훈련을 위한 시험이고, 다른 하나는 유혹입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시험은 ‘유혹’입니다. 이 청원은 유혹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이 아니라, 유혹을 만나더라도 유혹을 넉넉히 이겨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유혹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동안 내내 따라다녔습니다.
인간은 땅에 살면서 하늘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탐욕을 일으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하는 사탄의 유혹은 늘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런 시험 앞에서 우리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인 온갖 부조리한 일을 하게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유혹하고자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유혹하는 이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 합니다.
9)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일곱째 청원)
‘다만’은 ‘그러나’가 더 적합합니다. 개인은 선하고 실제로 착해도, 개인이 속한 공동체가 악마적인 속성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같은 구조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기원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는, 하나님 대신에 악마의 생각을 따르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 지소서! 하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를 구원해 주셔서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 주십시오하는 청원입니다.
10) (대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송영). 아멘.
‘대개(大槪)’는 ‘큰 원칙으로 보건데’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because, for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이유 때문에라는 것으로서 ‘우리가 주기도문을 하는 이유는’이라는 뜻입니다. 원본에 없다고 제외한 아쉬움은 있습니다. 결국, 나라는 모두 아버지의 것이며, 권세도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며, 영광도 아버지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신앙인들이 이 하나님 아버지의 것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자기가 받으려 한다면 그 신앙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께서 영광받아주셔야 합니다.
11) 아멘!
주의 기도는 “아멘!”으로 끝납니다.
이 말은 아람어인데 “그렇게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또는 “예,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멘”은 모든 것이 아버지의 손에 있음을 확고히 다짐하는 것입니다. 추임새가 아니라, 우리의 확신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아멘”하지 마십시오.
이제 주기도문을 하실 때에 습관적으로 하지 마시고, 주기도문에 담긴 귀한 뜻을 묵상하면서 하십시오. 그리고 기도가 되지 않을 때에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으로 간구하십시오.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