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된 자정운동 / 고우 스님
승가는 세속 사회와 달리 힘으로 통치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정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잘못된 것을 징벌하고 경책하기보다 자꾸 좋은 면을 부각시켜주고
긍정적인 면을 보고 개개인이 스스로 잘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불이 밝아지면 어두움은 저절로 사라지듯이,
그것이 바로 우리불교에서 하는 자정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여러 스님들이 자성청정을 실천하는 결의를 한다는 것에
참으로 바람직한 생각이라고 저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지 자정을 위한 노력은 있었습니다.
나쁜 일은 하지 말고 선행을 해야 한다고 어디서나 말합니다.
불교에도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법을 말합니다.
칠불통계(七佛通偈)에 자정기의란 말이 나오지요.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義 是諸佛敎)'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자정은 다른 사회의 자정과는 뭔가 다른 것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금강경에서 말하고 있듯이
일체법에 대한 무아를 이해하고 선행을 하는 그것이 불교라고 말합니다.
제가 마음속에 늘 담아두고 학인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그 세계를 발견하게 되면 그 자리가 세탁기 역할을 한다'
이런 말을 합니다.
부처님과 우리가 다른 점은 우리는 형상을 볼 때
그 형상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부처님은 형상 말고 한 가지를 더 보았습니다.
그것을 저는 본질이라고 하는데, 반야경에서는 그것을 공이라고 합니다.
공(空), 바로 이것이 부처님 깨달음의 전체가 아니겠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압축하고 압축하면 뭐가 남겠느냐 물으면
'마음'이다 '부처'다 '자성'이다 '불성'이다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더 압축해 보라고 하면 마침내 '공'이라는 말로 귀결됩니다.
모든 불교를 압축하면 바로 공이 되고 공마저도 압축하면
그것은 말로 알 수 없는 체험의 세계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색은 형상 있는 모든 존재를 총칭해서 하는 말입니다.
수상행식은 정신이고 이 오온이 공한 줄 알면
모든 고통 에서 벗어난다고 반야심경에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무조건 좋은 일을 하라고 하지만
금강경에서 말하는 것은 일체법이 공한 줄 알고 해야 한다고 합니다.
공을 이해하는 것이 불교 전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이 바탕이 될 때,
이해하는 폭도 훨씬 더 넓고 깊어질 뿐 아니라
그 실천도 효과적으로 전개될 수 있습니다.
불교는 공을 이해하고 체험하는 데서 여러 가지 방편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공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부족합니다.
공에 대한 믿음이 신념화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불교가 제대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움직이고 왔다 갔다 하는데
이것이 왜 공입니까?
불교에서는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합니다.
자동차도 수백 개, 수천 개 부품이 모여서 자동차가 됩니다.
단일로 혼자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연기현상인 공을 알면 절대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가리는
분별이 없어지게 됩니다.
분별이 정말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죠.
이데올로기 갈등, 종교 갈들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최근 우리 불교계 일각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불교계 안팎이 정말 시끄럽습니다.
봉암사에서는 자정운동으로 참회도 했습니다.
이런일이 일어나게 되기까지 단서를 불교계에서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다툼에 있었습니다.
대립과 갈등을 정화해서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출가한 우리가 또 그 길을 밟으며 세속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두어서 되겠느냐 자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에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닭 벼슬같은 것을 다투다가
세속 사람들에게까지 그렇게 피해를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정운동을 하는데,
그 방향은 불교의 근본이 무아이고 공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해야 하고
공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 깊어져야 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출처] 나홀로 절로 | 작성자 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