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보글(John Bogle)
‘시장의 움직임에 순응하라’
세계적 뮤추얼펀드 회사 뱅가드그룹의 창업자 존 보글(John Bogle)이 1976년 처음으로 인덱스펀드를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습니다. 실제로 ‘VIT(뱅가드500지수신탁)’가 출시될 당시 모집된 돈은 1,100만 달러(약 95억원)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존 보글은 단호했고, 인내심이 강했습니다. 아무리 천재적인 펀드매니저도 증시의 장기추세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 믿었고, 최소 위험으로 최대 수익을 올리기 위해 비용은 낮고 세금 효율성이 높은 인덱스펀드가 효율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오늘날 뱅가드그룹은 피델리티에 이어 2,50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가진 세계에서두 번째로 큰 펀드회사가 됐습니다. 영국의 넬슨 제독이 1798년 모선 ‘뱅가드’호를 타고 이집트의 야음을 틈타 나폴레옹 함대를 궤멸시켰듯 수익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승리의 요인으로는 ‘더 낮은 수수료’ 등 비용을 낮춘 것이 주효했습니다. 독설가였던 존 보글은 늘 펀드회사들이 높은 수수료로 투자자들을 ‘착취’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신 존 보글은 투자자들에게 이메일로 각종 정보를 공지함으로써 우편, 인쇄비용을 수십억 달러씩 절감했습니다. 그 역시 아내와 함께 차를 공유했고, 재산의 상당 부분을 자선단체 등에 기부할 만큼 검소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업계평균비용의 3분의 1 수준을 늘 유지시켰습니다. 존 보글이 좋은 펀드의 요건으로 꼽은 네 가지 요인은 낮은 회전율, 낮은 비용, 세금 효율성, 한 자리를 지키는 펀드매니저였습니다.
1949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보글은 졸업논문주제로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은 개념인 ‘뮤추얼펀드’를 택했습니다. 이후 투자업무를 행하면서 투자자들이 이득을 거둬야 한다는 지론 아래 투자자들과 편지를 자주 주고 받았습니다. ‘펀드 주주들을 위한 지침’에선 신중할 것, 절약할 것, 적극적일 것, 회의적일 것 등 네 가지의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밤샘 근무로 30세란 나이에 심장발작을 일으켰던 보글은 의사의 충고에도 계속 일에 파묻혀 살다가 1996년 심장 이식수술을 받았습니다. 그제서야 20년간 몸담았언 펀드운용에서 손을 떼고 리서치센터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존 보글의 투자철학은 아주 단순합니다.
‘남들보다 높은 수익을 얻으려 하지 말 것.’
이유 또한 단순합니다. 남들보다 높은 수익을 얻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시장을 이기려 하기 보다는 시장의 평균수익을 얻으려는 투자자를 보통 ‘수동적 투자자’라고 부릅니다. 반면 시장의 평균수익보다 높은 수익을 얻으려는 투자자를 ‘능동적 투자자’라고 부릅니다.
보글은 1974년 뱅가드그룹을 창업한 이래 수동적 투자법을 설파해 왔습니다. 시장보다 높은 수익을 얻으려는 시도는 성공가능성도 거의 없거니와, 오히려 잦은 거래로 비용만 높아진다고 보글은 주장해 왔습니다.
개인투자자는 말할 것도 없고, 전문적 펀드매니저들의 실적을 들여다봐도 해마다 시장수익보다 높은 수익을 얻는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거래비용을 제하고 난 실질수익에서는 능동적 투자자의 수익률은 시장평균수익률보다 오히려 낮다고 합니다.
이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보글이 제안한 투자법은 지수형펀드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美 증시의 대표지수인 S&P(Standard & Poor’s)500과 동일한 수익률을 얻는 뮤추얼펀드를 처음으로 만들어 낸 것도 보글의 뱅가드그룹입니다. 뱅가드그룹의 펀드는 주식매매를 최소화했기 때문에 수수료도 다른 펀드에 비해 저렴합니다.
보글의 투자철학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고, 뱅가드의 지수형펀드도 빠른 속도로 성장해 왔습니다. 1970년대에 100억원 정도에 불과했던 뱅가드펀드의 자산은 1990년대 말에는 100조원을 넘어섰습니다.
그렇다고 능동적 투자자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루 종일 주식 사고 팔기를 반복하는 데이트레이더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펀드매니저라고 불리는 사람 중 능동적 투자자가 아닌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습니다.
보글의 생각이 맞다면 펀드매니저라는 직업 자체가 없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
보글의 투자철학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효율적 시장가설’과 일치합니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면 현재의 주가는 주식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포함하고 있고, 주가가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평균보다 높은 수익률을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남들보다 높은 수익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론은 남들보다 높은 수익을 얻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수십억대 연봉을 받고 사는 현실과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이론이 틀리고 보글의 투자철학도 쓸 데 없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것인가? 아니면 이론을 예언처럼 받아들이고 현실에 눈감아 버릴 것인가?
현실을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이론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경제학의 효율적 시장가설은 ‘No Arbitrage’, 즉 위험없이 수익을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남보다 높은 수익을 얻으려면 남보다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건은 남보다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추가위험을 감수해야 하는가입니다. 추가위험이 아주 크지 않다면, 추가위험을 감수하고 높은 수익을 얻었더라도 남보다 투자를 잘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처럼 아주 작은 추가위험으로 고수익을 얻을 가능성을 ‘통계학적 아비트리지’라고 합니다. 물론 통계학적 아비트리지가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보글과 같은 수동적 투자자들은 통계학적 아비트리지도 다른 아비트리지와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반면 능동적 투자자들은 이 같은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능동적 투자자와 수동적 투자자 중 어느 게 맞고 어느 게 틀린지를 단정짓기는 힘든 듯 싶습니다. 이는 선택의 문제일지 모릅니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하던 자신의 선택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필요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