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4.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롬 3:21~24
*제목; 로마교회에 보낸 사도바울의 편지(6) 믿음이란 무엇인가?
1. 율법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3년 고생하면 30년이 편하다.”
고등학교 3년을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 향후의 30년이 편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진정 그렇습니까?
3년 열심히 공부하면 30년이 진짜 편해집니까? 그럼 3년 공부 안한 사람의 인생은 진정 엉망이고 힘이 드는 것입니까?
맞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든, 공부를 하지 않았던 다 힘이 든 것입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인생이 편하고 쉬운지? 모두가 정색하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인생이란 자체가 다 힘든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온전한 헌신, 놀라운 충성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자녀들의 “행복”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힘들다는 인생 가운데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아니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됩니다.
그 분이 우리 삶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결국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생의 행복의 문제는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믿음이 있는 자는 행복합니다. 믿음의 주이신 주님이 우리를 행복케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불행하십니까? 믿음 없이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제 돌이키십시오.
그러면 인생의 행복을 완성하는 방법이 예수님을 믿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바로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면 됩니다. 그런데 율법을 준수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태평양을 수영으로 건너는 사람과 같습니다. 두 사람이 있다고 칩니다. 한 사람은 수영을 아예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수영선수입니다. 이 두 사람이 태평양을 수영으로 건넌다고 했을 때 결과는 어떨까요?
익사하는 시간의 차이일 뿐입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곧 익사할 것입니다. 수영선수는 몇km 혹은 몇 십km를 수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지쳐서 익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이 주는 한계요, 율법 앞에 선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 밖에, 예수님을 믿는 길 밖에, 구원의 길, 행복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2.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결정하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27절’입니다.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3:27)
우리의 구원에 우리가 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자는 결코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만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있고, 그래서 교만으로 치닫고 있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를 인정함으로 구원의 자격을 얻게 된 것입니다.
‘구원파 이단’은 이 구원에서 예수님을 쏙 빼버리고, 믿음만 강조합니다. 믿음이 또 하나의 자기 자랑, 자기 의가 된 것입니다. 정확하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으로 고백하는 이를 구원의 백성으로 인정해주시는 것뿐입니다.
두 번째, 믿음이 있으면 더 이상 율법은 필요 없습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31절’을 봅시다.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믿음을 가지면, 우리의 구원에 우리가 한 일이 하나도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이후에는 더욱 더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를 알 수 있는 두 번째 구별법입니다.
세 번째, 사실 믿음은 목숨을 건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 이후, 로마황제는 자신의 우상화에 혈안에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식민지 사람들이 자신을 “신”으로 부르도록 요구합니다. 이를 어기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입니다.
모든 식민지 백성들은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들의 믿음의 고백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죽음을 택하는 결정”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은 예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고, 이것이 진정으로 사는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처럼 목숨을 건 믿음입니까? 아니면 입에만 남아 있는 값싼 고백일 뿐입니까?
믿음은 내 생명과 삶을 주님께 맡기는 행위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요, 나의 왕이시기에, 또한 이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에 죽음을 무릅쓰고도 이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있기에, 말씀을 더욱 더 집중해서 지킵니다. 이를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이 중생이 바로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이러한 믿음, 이러한 순종이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3. ‘believe’ vs ‘believe in’
그래서 ‘값싼 지적 믿음’(believe)와 ‘예수님께 내 생명을 맡기는 믿음’(believe in)을 구분합니다. “believe in Jesus Christ”(오직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한 권사님에게 결코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사위입니다.
그는 애지중지 키운 자신의 무남독녀 외딸과 결혼한 사람입니다. 결혼한다고 했을 때, 권사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딸보다 훨씬 못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딸이 사랑한다고 하니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혼 한 후 몇 년이 지나서, 이 사위가 그만 바람을 피다가 걸린 것입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이혼하지 않고 화해해서 지금은 잘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그 남자를 용서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 권사님은 이 사위를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딸을 아프게 한 나쁜 놈이었기 때문에 10년이 지난 후에도 용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용서가 됩니까?
이를 안 그 교회의 목사님이 권사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권사님을 용서하신 것을 믿습니까?
그 용서를 믿는다면, 회개하고 돌아온 사위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이 바라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믿음 없는 자가 아니라 믿음 있는 자로 서셔서,
자기 자랑과 교만을 버리고,
감사로 인해 더욱 더 순종하는,
목숨을 걸고 주님을 왕으로 고백하는 참된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삶이란 원래 힘든 것입니다. 이 삶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 뿐입니다. 그 분을 구주로 고백하면, 그 분이 우리 삶에 오셔서 회복시키시고, 우리 삶을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삶의 행복의 문제는 바로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란 오직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과 교만이 없어집니다. 믿음이란 그래서 더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원래 생명을 거는 결단입니다. "Believe in"(믿음대로 예수 안에 사는 것)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