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도 모팔모도 모두 울었다
고구려의 철기군 생성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모팔모는 주몽으로부터 새 나라를 세우려는 소서노를 도와주라는 당부를 받고 고구려를 떠나게 됐다.
당초 무기가 아닌 농기구를 제조하고 싶어 했던 모팔모는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됐지만 주몽이 철들기 전부터 충정을 맹세해온 터라 이별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두 뺨 가득 흘러내리는 모팔모의 눈물은 최종회의 감동을 더해주기에 충분했다.
http://news.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200703/05/newsen/v15935933.html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 http://news.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200703/07/newsen/v15956027.html
http://blog.daum.net/cury123/3489848?nil_profile=blog
소서노 예소야 -모두 아름다운 고매한 인격
http://blog.daum.net/cury123/3489848?nil_profile=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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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신데렐라는 주몽을 배워야 한다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phs9163&folder=10&list_id=7641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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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 부인이 남하할 때 고주몽께서 군기대장-야장을 붙여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결국 온조와 비류가 백제를 건국하는 힘은 이들이 보유한
우수한 철기에 근거합니다. 하남위례성에 처음 자리잡았을 때 주변의 열 개 부족을
통합해 내는 힘이 이 우수한 철기들이었고 그래서 처음 이름이 십제였다가 나중에
세력이 확대되어 백개 부족을 정리하였기에 백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 건국당시 한반도 중부지방은 아직 북쪽의 선진문물이 도입되지 않은 시기라서
청동기와 철기가 혼재되어 있는 수준이었으며 철기는 아주 극히 미미하게 사용되고
그 질도 아주 낮은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단지 병장기에 국한되지 않고 이 기술은 곧 농기로 전환되어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
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이루었고 그것이 주변을 쉽게 복속시키는 근거였습니다.
주몽이 대화 중에서 야장의 농기를 언급하는 내용을 보고 그래도 이 시나리오 작가도
조금은 공부를 하였구나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온조가 남하하면서 어느 길로 왔을까요?
아직도 역사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일설에는 서쪽 평야길도 이야기 되지만
제가 보는 관점으로는 동해안 길이었을 확률이 높을 것 같습니다. 평야 쪽에는 이미
토착세력들이 광범위하게 진을 치고 있어서 그냥 쉽게 남하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차라리 동해안 바닷가를 따라서 이동하는 것이 더 편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왔다고 어거지를 부리지는 못하겠고,
하여튼 그런 생각이 듭니다. 현재 강릉이나 춘천지방에 그 당시 예와 맥국이 존재하였던
흔적들이 나오는데 이들에게 철기를 전수해 주면서 지금 서울쪽으로 한강을 따라 내려왔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온조가 서울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북한산에 올랐다는 점입니다.
서해안을 따라 내려왔다면 도읍을 정하기 위해 북한산을 오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현재 고양 정도에서 머물렀겠지요. 비류는 강따라 인천-미추홀로 내려가 나라
를 세웠지만 풍토병에 걸려 다시 동생인 온조가 있는 하남위례성에 와서 죽습니다.
덕분에 역사상으로 북한산 최초로 등반기록을 남긴 분이 바로 온조대왕이 됩니다.
백운봉에 올랐다고 하나 사실은 그 옆의 만경대에 올랐겠지요. 등반장비도 없던 시절
백운봉에 쉽게 오르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멀리 조망하는데는 만경대 정도도
아주 훌륭한 조망터가 되기 때문입니다.
동명성왕이 최초로 도읍을 정하였던 흘슬골성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해발 높이가 730미터 정도였습니다. 북한산 백운봉 높이 이지요.
그쪽은 산성 위가 아주 너른 평지로 되어 있는 반면에 북한산은 날카롭습니다.
아마 그래서 한수 남쪽으로 이동해서 위례성을 짖고 고구려의 전통에 따라
배후에 산성을 두기 때문에 남한산성을 확보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몽 마지막 회를 바라보면서 다시 고구려 발해가 떠오릅니다.
빨리 시간 내어서 다시 한번 한바퀴 돌아보아야 겠다는 생각이지요.
상경용천부에서 동경용원부 중경현덕부는 가 보았는데 남경남해부는 현재
북한 북청쪽으로 추정되어 있어서 가 보지를 못하였습니다.
벌써 2002년 동북공정 이야기가 나오기 전이었는데도 동경성에서는 한국인
접근금지가 되어 있었고, 상경성에서는 사진촬영을 제한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어느정도까지 통제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점점
심해질 것은 분명합니다.
집안의 통천문에 올라 다시 하늘에 술 한잔 받치고 고구려 식으로 제도 모시고
싶고, 한 살이라도 젊고 힘 있을 때 좀 더 돌아다녀야 겠지요.
회원님들 힘 내시고,,,화이팅!!
그런 의미에서 이번주 일요일 북한산 십이문 종주나 한판 벌여볼까요??
감사합니다.
발해유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