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독고전독서-시카고플랜] 12. 데카르트 -《방법서설》
모든 것을 의심하라
이 서설에서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이 어떤 것인지를 기꺼이 보여 주고, 또 내 삶을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 모든 사람이 각각 이에 대해 나름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방법서설》은 데카르트의 학문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에세이로,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이라는 원제목이 말해 주듯, 그의 세계관이 확고히 드러난 핵심 저작이다. 이 책은 독자들에 대한 배려로 가득하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기술 방식에서부터 그 세심함이 묻어난다. 데카르트는 이 책을 모국어인 불어로 집필했는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유럽의 지식사회에서는 라틴어가 공용의 문어(文語)였다. 데카르트는 지적 허영을 대단히 싫어한 철학자였고, 이런 그의 성향이 반영된 것이다.
데카르트는 철학사의 회의주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철학체계로 나아갔다. 그의 표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에 대해서는 무수한 주석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비교적 명확한 편이다. 데카르트는 꿈에서 지금 이 순간이 꿈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정말로 그 순간은 꿈이었다. 그렇다면 꿈을 깬 지금 이 순간도 꿈의 지속은 아닐까? 또 다른 껌이 있어서, 지금 이 순간을 꿈속의 일로 회상하는 어느 순간이 다가오지는 않을까? 이 호접몽(胡蝶夢)적 모티브가 가져다준 결론,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지금까지 정신 속에 들어온 것 중에서 내 꿈의 환영보다 더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상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1원리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는 이도 결국은 의심하는 주체까지는 의심할 수 없다는 이야기. 데카르트는 인식에 대한 의심을 갖는다는 그 자체만으로 '생각'이라는 행위가 성립한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생각의 주체로서의 존재가 증명된다. 물론 지금의 상식으로선 뭐가 그렇게 대단한 발견이었는가를 따져 물을 수 있듯, 이후 수많은 후학들에게 비판을 불러일으킨 단초이기도 하다.
신학과 철학, 그리고 과학
생각에 관한 데카르트의 논증은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적 사고를 전제하는 동시에 결론으로 순환하는 도식이다. 순수한 관념의 세계를 표상하는 데 육체를 장애물로 여겼던 플라톤의 계보로 볼 수도 있지만, 데카르트는 육체를 불필요한 것으로만 치부하지는 않았다. 두뇌는 신체의 영역일까? 정신의 영역일까? 결국 정신도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만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그렇듯 육체는 정신의 도구이다. 그는 육체를 ‘기계’에비유하는데, 인간의 육체는 동물과는 달리 영혼이 깃든 정신으로 통제되기 때문에 영혼의 일부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이는 데카르트가 견지했던 기계론적 세계관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 데카르트의 페이지가 펼쳐질 즈음에는 이미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그리고 케플러로 이어지는 전복들로 인해, 과학이 종교의 속박에 부단히 저항을 하고 있던 시대이다. 중세로부터 근대로, 사상의 전환기를 살았던 데카르트의 선택은 근대였다. 데카르트는 신앙적이고 목적론적인 중세의 세계관을 폐기하고, 시계의 톱니가 맞물린 것처럼 정확한 섭리로 돌아가는 기계론적 우주관을 표방한다.
《방법서설》이 철학사에서 점하고 있는 지위 역시 이런 가치전환의 의미이다. 중세까지의 철학사는 이성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었다. 데카르트의 철학부터 근대로 규정짓는 이유는, 그가 견지해 온 이성 중심의 세계관으로 인해,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는굴레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분명 신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지만, 생각의 능력만큼은 신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가 이전의 철학자들과 구분되는 점은 신앙적 '계시'보다 논리적 '인과'를 보다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를 열어젖힌 철학도 여전히 신학에서완벽히 벗어나 있지는 못한 실정이었다.
나는 이 완전한 존재인 신이 있다는 것 혹은 현존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 어떤 기하하적 논증 못지않게 확실하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을 인식하는 것 혹은 정신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어렵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는 그들이 자신의 정신을 감각적 사물보다 위로 끌어올리는 일이 한 번도 없었고, 또 그들이 상상을 통해서만 사물을 고찰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속에 있는 실재적이고 참된 것이 모두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면, 우리 관념들이 아무리 명석 판명하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참이라는 완전성을 갖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만한 어떠한 근거도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신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자명한데, 정신을 심도 있게 활용하지 못하는 탓에 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입장이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지닌 이성의 능력이 신에게 유래한다고 보았으며, 결국 '생각'은 주체의 존재뿐만이 아니라 존재의 원인까지 증명하는 근거였다. 이는 데카르트가 가장 비판을 받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신을 증명했다기보다는 신을 전제한 것이다. 이는 경험론이 비판했던 합리론의 고질병이기도 하다.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한 채, 전제를 근거로 전제를 증명하고 있는 순환 논증이라는 것.
그러나 그의 과학적 사고는 베이컨과 더불어 17세기 과학혁명에 중요한 공헌을 했으며, 철학의 문외한들에게도 플라톤, 니체와 더불어 철학자의 표상이라는 사실이 증명하듯 서양사상사의 주요 거점인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