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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와 보는 경주다.
경주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화려한 국가로 알려져있다.
역사,문화가 융성하던 국가였고 제일먼저 한반도에서 통일 국가를 만든 나라.
이 지역 전체가 문화 유산인 곳이다.
9월6일부터 8일까지 2박3일 일정이였는데 모친의 소천으로
연기를 하여 20일부터 22일까지로 변경하고 오늘 떠나온 것이다.
세종시에서 경주 불국사로 먼저 들렀다.
세종시에서 남청주 IC로 가서 경부고속도로 1번을 타고 청주 JC까지.
그리고 당진 영덕 간 30번 고속도로로 청주에서 낙동JC 까지 갔다.
낙동JC에서 상주 여천간 고속도로 301번으로 영천JC거쳐 다시
경부고속도로 1번을 이용 경주IC 로 빠져 나간 경로였다.
상주 여천간 고속도로상에 낙동강 근처에 이런 휴게소가 있다.
글씨들을 붙혀 써서 잘목 보면 낙동강의 성 휴게소로도 볼거같다.
왜들 띄워쓰기를 안하는지. 우리나라사람들도 잘못보면 헷갈리는데
외국사람들이 보면 어떨까. 새로 개통한 휴게소라 그런가 아주 깨끗하다.
휴게소 이름들을 보니 여기도 또한 지역간 이름으로 인해 한참께나 다투었나보다.
이름이 들어가고 안들어가고 그게 지역발전에 꽤나 영향이 있단 말인가?
역사 이름이라던지 휴게소 이름이라던지 무척들이나 지역간 갈등 요인이 되니
이런것에 초연한 자치단체들이면 않되는지. 별걸 다 갖고들 싸움박질 하니
행정이 늦어지는 건 당연지사. 상행선과 하행선의 휴게소 이름들이 자기들
지역이라고 이름들이 틀리다. 한가지 이름으로 상행 하행하면 모가 안되는지.
3시간 40분 걸리는 거리지만 쉬고 하니 4시간이 다 걸려 난 12시에서 석굴암 주차장에 왔다.
날씨가 구름이 좀끼고 서늘하다. 반팔 티를 입고 갔었는데 긴팔로 바꿔입어야만 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 있는 석굴암이라 표지석이 든든해 보인다.
석굴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1522&cid=40942&categoryId=33081
토함산 석굴암의 입구에서 그래도 기념사진은 남겨야지.
차길이 여기까지 나 있어 꼬불꼬불하며 올라오는데 한참을 온거 같다.
석굴암까지 가는길이 산 허리에 길을 만들어 꼬불 꼬불하게 가게된다.
오르막 내리막도 아닌 평평한 길이다. 길섶의 나무들이랑 바위랑들이
무언가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 나무는 꺼꾸로 보면 이와같이 사람 다리같이 늘씬한 모습같다.
우리나라 적송들은 이렇게 유연하게 생긴 모습이 어떤 때는 사람 모양같은게 많다.
바위가 놓여있는게 무언가 기도드리면서 쌓아 놓은 모습이다.
아마도 여기 부처님을 뵈러 오면서 누군가 쌓아 놓고 지성을 드린건 아닌지.
나무들이 오래되면 그걸 우리는 고목이라 한다.
어느 나무건 고목일 경우는 이렇게 속이 빈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이런걸 보며 느끼는 건 나이들면 속을 비우는게 이런 식물도 그러할 진데
인간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 하는 생각이다. 비우며 산다는건
욕심을 내지않고 산다는 것이니 자신의 처지에 맞는 행동과 삶을 살라는게지.
감로수.
이슬같이 맑고 달콤한 생명수라.
이 물로 마음속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석굴의 부처님을 친견하라는 물.
이 물 한모금에 그런 의미가 있으니 실제 그런 마음으로 하면 되리라.
이 석굴암을 예전의 석굴암같이 노천에 그냥 있었을 때 보다도
더 불안전 하다는 보고를 언젠가 신문에서 본거같다.
아직도 그런가는 모르겠다만.
서산의 마애불이 노천에 있던것을 집을 만들어 놓았다가
다시 노천 상태로 복원하였듯이 여기도 그리 하면 어떨까.
영문판으로 설명서를 만들어 놓은걸 참고하려고 담아왔다.
김대성의 직책이 Prime Minister 라고 했다.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수상이라는 직책 또는 국무총리를 그렇게 영어로 부른다.
그가 대상( 大相 )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대상이 지금의 국무총리는 되나보다.
실내에서는 사진및 비디오 촬영이 금지한다는 문구로 인해
인터넷에서 퍼온 사진을 올려본다. 실내에서 사진을 찍으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
이 석굴은 원래 개방되어 천년을 그대로 이어져 왔건만 실내를 만들어 보관하며
사진도 못찍게 만드는게 올바른 상식인지 모르겠다. 빛이 문제될것도 아닌데.
석굴암 본존불석굴암의 주인공. 당당한 체구에 근엄한 표정. 동해를 굽어보는 눈길에 신비로움이 그득하다. 완성 이후 한국 불상의 모범이 되었다.
석굴암의 본래 이름은 석불사로, 돌로 만들어 낸 석굴 사원이다. 석굴이 오직 하나고, 규모도 작다. 그래서 인도나 중국의 석굴 사원을 돌아본 사람들은 석굴암 앞에서 실망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수십, 수백 개의 석굴이 모여 위용을 뽐내는 아잔타나 둔황의 석굴 사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석굴암은 하나로서 충분히 완벽하다. 힘주고 위압할 필요가 없는 신라 장인들의 당당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김대성의 지휘 아래 신라 최고의 장인들이 토함산 중턱에 모였다. 부처님의 세계를 지상에 완벽하게 구현해 낼 수 있을까? 동해의 해돋이를 오롯이 맞이할 수 있는 이곳에 부처님을 모시고 주위에 이를 호위하는 보살, 나한, 천을 배치한다. 원형 배치이다. 부처님의 세계는 모난 것이 없는 원만한 원형. 이는 본존불을 중앙에 둔 둥근 방, 둥근 천장으로 조형화되었다. 부처님 세상은 금강역사, 사천왕 등이 굳세게 지킨다.
건축 기법 면에서 둥근 천장을 육중한 돌로 교묘하게 구축한 것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나무나 흙이 아닌 육중한 돌로 둥근 천장을 완성한다는 것은, 치밀한 설계와 이를 뒷받침하는 기초 과학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돌을 쌓아 올리며 중간에 동틀돌을 끼워 구조적 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입체적이고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냈다. 완벽한 구조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현대인이 쉽게 접착제에 의존하는 현실과 비교해 본다면 얼마나 굳건한 장인 정신인가? 마침내 20톤에 이르는 천장 중앙의 뚜껑돌을 얹는 데 성공하며 석굴을 완성했을 때 장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무려 23년(751~774)에 걸친 대역사였다.
예술적 완성도는 어떠한가? 석굴암에 한번 들어가 본 사람들은 너무나 황홀해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조각들이 숨 쉬는 듯 살아 있다. 본존불의 위엄, 11면 관음상의 수려한 자태, 부처님 제자인 나한들의 고통 어린 얼굴, 금강역사의 근육질 몸. 단단하기로 유명한 우리 화강암에 이렇게 생생한 생명력을 불어넣은 예술가들은 누구인가?
불행히도 오늘날 우리는 석굴암에 들어갈 수 없다. 보존을 위해 유리 벽으로 차단하였고, 습기 제거기가 달려 있다. 통풍이 잘되도록 설계되어 있던 석굴암의 외면은 습기를 차단한다는 이유로 일제 강점기에 시멘트로 꽁꽁 메웠다. 그런데도 석굴암은 조금씩 파손되고 있다. 현대의 단편적이고 오만한 과학이 만들어 낸 파괴이다.
놀랍게도 창건 당시 신라인들은 샘물 위에 석굴암을 앉혔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차가운 샘물로 주변의 수분이 모여 자연스럽게 습기가 제거되었으며, 통풍이 잘되도록 열린 구조로 짜여 석굴 안과 밖의 온도 차 때문에 물방울이 맺히는 현상을 방지하였다.
복원 전의 석굴암일제 강점기에 습기의 침투를 막는다고 시멘트로 꽁꽁 폐쇄하기 전, 석굴암은 개방적인 구조였으며 본존불 밑에는 차가운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1,000년 세월 동안 온전히 보존되어 왔다. 실험 결과, 놀랍게도 찬 바닥으로 습기가 모여 물방울이 맺혔다.
[네이버 지식백과][문화재를 찾아서] 석굴암, 민족 문화의 원형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012. 4. 9., 휴머니스트)
네이버에서 카피 해 온 자료.
석굴 마당 아래 공간에 이렇게 등을 매 달아 놓았다.
년례행사들 있을 경우에 계속 사용하려는 모양이다,
석굴암을 들러보고는 내려와 불국사를 찿았다.
불국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00298&cid=42856&categoryId=42856
부처님을 의미하는 연꽃으로 장식을 한다.
경내에 있는 공원에 호수가 멋지게 배치 되있다.
저 건너에는 오작교 같이 둥근 다리가 지나가고
호수가에는 휘휘 늘어진 버드나무에 물 속에는 잉어가 노닐고
살랑이는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불국사. 부처님이 있는 국가를 만들자라고 한 불국사라.
신라시대만큼 불교가 융성 할 때도 없는 것 같다.
그리하여 여기 경주는 불교 문화 유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옛날 고교시절 1966년도에 이 곳에 수학여행 온 사진을 보니
각 반별 또는 전체 학생들이 이 청운교 위와 단에 모두 앉아 사진을 찍은게 있다.
그만큼 그 때는 이 불국사 모든 시설물에 직접 오르고 내리고 하는데 제약이 없었단 이야기다
지금은 이 계단으로 오르는 것을 금지시켜 놓고 있는게 틀리다.
이 계단이 청운교와 백운교라 부른다. 윗부분의 계단이 청운교이고 아래 계단이 백운교.
이 계단들도 국보로 지정이 되있는데 제 23호이다.
우리는 언제나 산에 가면 그 곳의 소나무들을 감상하곤 한다.
여기도 멋진 소나무 두그루가 시선을 끈다.
다보탑. 지난번 경주 지진시에 몬 받침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더니 수리가 된 모양이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나타낸 걸작품이라고 들 말하는 탑이다.
하지만 유럽쪽에 가 보면 이러한 정도를 그런 최상의 비유로 한다는게 좀 비교가 된다.
그리스문화권의 나라 터키에 한번 가보니 그들의 조각품은 그야말로 예술품 그 자체다.
섬세한 표현에 아름다움을 가미한 것. 그런 것에 비하면 너무 약소한게 아닌지.
아무튼 우리나라의 실력으로 보아서는 대단한 예술품이긴 하다.
사자상은 총 4개가 각 면에 다 있던 것이 한개만 남아있다고 한다.
석가탑이 다보탑과 한 세트로 구성 되있는게 이 곳의 특징이다.
석가탑, 다보탑이라는 이름은 인도 영취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신 진리를
다보 부처님이 증명하였다고 하는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의 내용에서
유래한 것이다 라고 한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한컷에 담아본다.
이 두 탑이 이나라 내 가정을 보호 해주는 탑신으로 되길 기원하면서.
다보탑이 국보 제 20호이고 석가탑이 제 21호이다.
뒤는 대웅전 건물이다. 이 대웅전 또한 국보이다.
제 1744호로 지정된 옛 건축물이다.
이 무설전 뒤에 비로전이 있다. 이 비로전도 광복 후 재 건축된 것이고.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서기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했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으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옛 불국사는 거대한 사찰이었던 것이 세월따라 쇠퇴하고
그걸 복원하는데는 광복 후에 이루어졌다.
극락의 주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데, 이를 상징하는 극락전을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극락전을 본당으로 삼고 있는 절에서는
극락을 의역한 ‘안양(安養)’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안양교·안양문·안양루 등을 갖추기도 한다.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봉안되어 있다.
관세음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음성을 관하여 그들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비추어 끝없는 힘을 얻게 하는 보살이다.
칠보교와 연화교이다. 위 계단이 칠보교이고 아래 계단이 연화교이다.
이 또한 국보 제 22호이다.
불국사를 상징하는 이 풍경을 우리도 담아본다.
칠보교와 연화교가 앞쪽에있는 계단들이고
저 뒤에 길게 늘어선 계단이 청운교와 백운교이다.
그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로 인하여 모두 국보로 지정이 되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서양의 돌로 만든 건축물에비해 따스함과 온후함이 배여있는게
목조 건축물들의 느낌이다.
보문단지를 말만 많이 들었지 한번도 가 보지를 못해 차로 빙 둘러 보았다ㅏ.
이 곳은 관광단지로서 유명한 곳이다. 많은 호텔과 위락 시설들이 집중 되있다.
보문호수 주위로 이러한 단지가 구성 되있는데 호수가
생각만큼 크지는 않고 물도 믾지 않다.
거태한 풍차가 돌아가는 곳에서 한 컷.
보문호수 가에 비추는 거대한 풍선의 모습이 멋지다.
통일전이란 곳을 가 봤다.
신라시대의 통일을 이룩한 왕들과 김유신 장군의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근대에 만들어 놓은 곳이란다.
통일전은 태종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장군 이 세 분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며
대한민국의 통일을 염원하여 이들을 찬양하고 사당으로서의 만들어 놓은 것으로 적혀있다.
그 세분에게 묵념하고 향을 피워 추모했다. 그리고 방명록에도 기록하고.
우리 대한민국이 그들이 이룩하였듯이 통일을 할 수가 있을까.
지금 이 나라를 쥐고 펴는 정부가 과연 이 나라를 망치는 길로 가지는 않을까가 걱정이다.
이 세분이 그런 최악의 길로 가지않게 보호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건네본다.
반송 소나무가 멋지다.
반송이 보여주는 멋은 수십가지의 줄기가 하나의 나무로 보여주는
그런 조화가 으뜸이기에 멋진 것이다.
통일전 안에 있는 호수에 정자와 연꽃들 그리고 하늘이 비춰서 더울 운치를 더해준다.
다음으로 가 본 곳이 선덕여왕 능이다.
신라시대의 첫번째 여왕이던 선덕여왕.
그녀의 능은 어떤가 하며.
선덕여왕은 첨성대와 분황사의 창건.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하는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룬 여왕으로 기록 되있다. 그리고
그녀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적고있다. 과학과 건축에 역점을 둔 모양이다.
그 여왕의 묘는 여타 다른 신라시대의 왕 묘와 같이 둥근 봉분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
이조시대의 석물들은 그 당시는 없었나 보다. 단촐하기에 노무 빈약한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된다.
다 저녁에 첨성대를 보게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건 변함이 없다. 돌로 만들어 놓은 건축물이니.
저녁노을에 비추어 보이는 첨성대가 아름답게 보인다.
창문이 보이는 곳에서의 모습은 또 다른 모습이다.
허술하게 쌓아 올린 돌같아 보이지만 수천년을 버티고 서 있는 첨성대이다.
기념샷.
밤에 보니 색갈있는 전등으로 더 멋지게 보인다.
이 곳에는 밤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본다. 학생들이 여행와서 보는 경우도있고
어른들도 단체로 와서 보곤 한다.
http://guide.gyeongju.go.kr/deploy/enjoy/01/01_01/02_01_01/1191875_7392.html
여긴 안압지라고 우리가 알고있는 곳이다. 현재 이름은 동궐과 월지 이다.
인터넷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문무왕 674년, 삼국을 통일하고 국력이 강해지면서 궁궐도 커지게
되어 신라 왕궁의 별궁이며,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안압지 남쪽에 신라 궁인 월성이 있어 이곳까지 자연스럽게 커진 것으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안압지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궁 안의 못'으로만 기록되었다.
1980년대‘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며,
본래 이름은 ‘달이 비치는 연못’이란 뜻의‘월지'라고 불렀다.
이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곳이 폐허가 되자.
시인묵객들이 연못을 보며‘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쓸쓸한 시 구절을 읊조리고 그 때부터 기러기 '안'자와 오리 '압'자를 써서 ‘안압지’로 불리게 되었다. "
"여기 동궐과 월지 발굴에서 유물은 와전류를 포함하여 3만 여 점이 나왔다.
안압지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부장품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신라 무덤의 출토품과는 달리
왕실과 귀족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하였던 실생활용품이 대부분이다.
출토 유물 가운데 예술성이 뛰어난 명품 700여 점을 선별하여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
전시하고 있다. 단일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로 전시관 하나를 다 채운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라고 적혀있다.
발굴하면서 원래의 이름과 그 용도등이 밣혀지는게 후손들을 위해 좋은 일이다.
우리는 한옥 펜숀인 경주 수호정 한옥 ( 010-2379-7248) 에서 하룻밤을 잤다.
집을 새로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깨끗한 한옥으로서 주방은 공동으로 사용하는데,
아침은 식빵 계란 잼 커피 등이 제공되는데 본인들이 취향대로 만들어 먹게 되 있다.
대릉원 옆 한옥단지에 있으며 첨성대 동궐과월지(안압지),천마총, 석빙고 등
여러 유적들이 가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