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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미국 미시간주 남쪽 디트로이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IKEA 매장을 방문했을 당시, 처음으로 본 어마어마하게 큰 가구 매장의 규모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적이 있다. 디자인 혹은 마케팅 서적을 통해서만 보아오던 스웨덴의 대형 브랜드 IKEA의 가구들을 처음으로 눈앞에서 만져보던 순간이었다. 같은 해에 팀 버튼에 의해 리메이크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방문한 영화 속 어린아이들의 받았던 감동과 조금은 비슷했을까? 매장이라기보다 모델 하우스 혹은 놀이터와 같았던 그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머무르며 의자 하나, 램프 하나를 들여다보고 만져보았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상품을 디자인한 디자이너들의 사진과 이름이 커다란 배너형 포스터로 만들어져 함께 전시되었던 것. ‘언젠가는 나도?’라는 학생다운 생각도 해보았다. 최근 한국에도 드디어 IKEA가 입점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에 대한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도 함께 접할 수 있었다. 현재 사는 독일에서도 필요한 가구나 생활용품들을 사야 할 경우 가장 1순위로 가게 되는 IKEA에 대한 그동안의 환상이 조금은 깨지게 된 계기는 겨우 며칠 전 회사 동료와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마치 대형 기획사에 속해서 승승장구하던 싱어송라이터가 표절 시비에 휘말리면서 거대 자본을 이용해 자신이 카피한 원곡의 제작자와 그동안 자신을 사랑해준 대중의 뒤통수를 때리는 일과 비슷한 루머가 아닌 사실을 듣게 된 것이다. 그 실화 속의 주인공이자 필자에 의해서 본인이 작곡한 노래를 거대자본에 빼앗기고만 작곡가로 비유된 인물은 독일계 가구 디자이너이자 제작자 닐스 홀거 무어만(Nils Holger Moormann)이다.
본 리포트는 무어만과 그가 설립한 동명의 회사(NHM)를 소개하는데 그 목적을 가지고 있다. IKEA와 무어만의 악연은 뒤에 소개하기로 하고 먼저 NHM의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본 리포트는 NHM의 오피셜 웹사이트(moormann.de)와 무어만의 수많은 잡지, TV 인터뷰에 근거한다.
1. Nils Holger Moormann
▲ 닐스 홀거 무어만(Nils Holger Moormann)과 그가 설립한 회사 NHM (Image ⓒ Nils Holger Moormann) : 1980년대 초반 지극히 평범한 독일의 학생이었던 무어만은 특별한 인생의 목적 없이 비교적 안정적인 법률가의 삶을 준비한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20대의 어느 날,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만난 한 건축가 겸 가구 제작자와의 대화를 통해 젊은 무어만은 ‘정말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무언가와 만나게 된다. 가구 디자인. 아무런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학업을 그만둔 무어만은 자신이 하고 싶은 가구 디자인을 위해 자본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그가 회고하는 인터뷰의 내용에 의하면, 그는 오랜 시간을 트럭 운전기사로 일했고, 우체국 직원으로도 근무했다고 한다. 1992년 뮌헨이 속해있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Bayern) 지방에서도 가장 남쪽,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아샤우(Aschau)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하여 스스로 가구 디자인의 세계에 발 딛게 된다.
디자인은 왠지 도심 속에서 많은 대중 안에서 이뤄져야 할 것 같은 편견을 깨고 외부와 단절된 듯한 공간에서 디자인작업을 시작한 그는 자신의 회사 NHM을 20여 년이 흐른 현재 20명가량의 직원을 둔 회사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쯤 되면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그와 그의 회사 NHM의 작품과 성공비결이 궁금해진다.
2. NHM의 작품세계
NHM의 작품활동은 크게 두 가지의 형태로 이뤄진다. 첫 번째는 무어만 자신과 회사 내의 디자이너들에 의해서, 두 번째는 외부 디자이너와의 협업에 의해서이다. 디자인 전문 교육을 받아본 적조차 없는 무어만의 작품세계는 어떠할까? 평소 많은 영감을 문학에서 받는다는 무어만의 집이나, 회사 작업실, 휴게실 등 그가 머무는 모든 공간은 수많은 책으로 가득 차 있다. 하루 중에서도 멋진 풍경이 보이는 공간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는 무어만의 작품 중에서도 책을 보관하는 기능이 있는 가구 디자인이 유명한 것은 참 재미있다.
▲ Bookinist by Nils Holger Moormann, 2007 (Image ⓒ Nils Holger Moormann)
▲ Easy Reader by Nils Holger Moormann, 2009 (Image ⓒ Nils Holger Moormann)
▲ Kampenwand by Nils Holger Moormann, 2008 (Image ⓒ Nils Holger Moormann)
▲ Walden by Nils Holger Moormann, 2006 (Image ⓒ Nils Holger Moormann)
초창기의 NHM은 젊고 재능있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을 통해 그의 이름을 건 회사를 알려 나가게 된다. 그 시작이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렇다면 앞서 말한 "젊고 재능있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디자이너"들은 현재 무엇을 하고 있을까? 콘스탄틴 그리치치(Konstantin Grcic), 타케시(Takashi Sato), 해리 탈러(Harry Thaler) 등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많다. 이들이 막 디자인 공부를 마치고 졸업과 함께 학교를 떠나 프로 디자이너로서 발걸음을 시작하는 데에는 무어만의 도움이 컸다. 무명의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이 세상에 이름을 알릴 수 있도록 그들을 선발하고, 함께 작업하고, 작품을 생산, PR, 유통까지 무어만의 회사 NHM에서 맡게 된다. 알프스 산자락의 작은 마을 아샤우에 있는 NHM에서 함께 머물며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한 당시의 젊은 디자이너들은 NHM과 함께 성장하여 현재는 세계 디자인계의 거장들이 되었다.
▲ Konstantin Grcic / Hut Ab (1998), Es (1999) (Image ⓒ Nils Holger Moormann) : 1991년, 뮌헨에 자신의 이름을 건 스튜디오를 설립하면서 지금까지 스타 디자이너로의 길을 걸어온 콘스탄틴 그리치치의 초기작들은 무어만의 회사 NHM과의 협업으로 탄생하였다. 현재도 무어만의 이름으로 생산, 판매되고 있는 그리치치의 초창기 대표작 Hut Ab과 Es는 디자인된 당시 전에 없던 새로운 구조적인 제안을 한 옷걸이와 선반으로 평가된다.
▲ Takashi Sato / Steckling (2009) (Image ⓒ Nils Holger Moormann) : 일본 도쿄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는 가구디자이너 다카시 사토의 스테클링 옷걸이는 2009년 무어만과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 이 옷걸이를 통해 다카시는 스타 디자이너의 반열에 오르며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 Harry Thaler / Pressed Chair (2011) (Image ⓒ Nils Holger Moormann) : 2010년 영국의 RCA 졸업 후, 2011년 무어만의 NHM을 통해 혁신적인 제작방식의 Pressed Chair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그해 세계 디자인계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신예 스타 디자이너 해리 탈러는 현재 런던에서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 Martin Pärn & Edina Dufala Pärn / Lodelei (2011) (Image ⓒ Nils Holger Moormann) : 헝가리-에스토니아계 부부 디자이너 마틴(우)과 에디나(좌)의 Lodelei는 어떤 벽에든 기댈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 설치와 이동이 자유롭다. 천을 이용한 수납 역시 재미있는 발상으로 역시 무어만과 함께 작업한 작품이다.
▲ Patrick Frey / Kant (2004) (Image ⓒ Nils Holger Moormann) : 한국계 디자이너로 유명한 패트릭 프레이는 2007년 자신의 디자인 스튜디오를 설립하기 전 무어만과 함께 책과 더불어 다양한 아이템의 수납공간을 가진 특이한 형태의 책상 Kant를 디자인했다. 현재까지 패트릭은 디자인 리포트를 통해 소개한 적 있는 브리(Bree)의 가방과 더불어 수많은 가구 및 소품 디자인을 해오고 있다.
무어만, 그리고 그의 회사 NHM을 통해 여러 디자이너와 협업을 통해 탄생한 작품들을 보면 떠오르는 생각은 다양성, 새로움 그리고 유머다. 전 세계의 다양한 국적을 가진 디자이너들을 발굴 협업하는 것을 보면 그 다양성이 보이고, 항상 전에 없던 새로운 구조, 제작 방식을 추구하는 모습에서는 그들의 창의성을 엿볼 수 있다. 역시 작품 안에서 조금씩 위트를 섞어내는 유머러스함은 무어만의 인터뷰에서도 그가 늘 말하는 “재미“와도 연결된다. 끊임없이 다양한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을 통해 배우고 가르치며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야말로 무어만의 가구가 까다로운 디자인계에서 현재까지 큰 영향력을 만들어가고 있는 원동력이 아닐까 한다.
3. 순록과 작은 염소 이야기
IKEA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무어만의 작품 중 유명한 타우루스(Taurus, 1993)는 산간 마을에 위치한 탓에 건물 내 바닥의 수평을 맞추기 힘들었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게 된다.
▲ Taurus, 1993 (Image ⓒ Nils Holger Moormann) : 얇은 스테인리스 스틸 판으로 연결한 네 개의 다리를 가진 타우루스는 그 스테인리스 스틸 판의 유연성에 의해서 기울거나 굴곡이 있는 바닥에서도 모든 다리가 바닥에 접지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당시 크게 주목을 받은 디자인은 아니었던 타우루스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타우루스의 디자인을 카피한 IKEA 덕분(?)이다. IKEA는 타우루스를 카피해 만든 스투레(Sture)를 판매했고, 이에 무어만은 거대기업 IKEA를 대상으로 독일법원에 소송하기에 이른다. 2000년 제1심에서 패소한 IKEA는 항소하지만 2심에서 역시 법원은 무어만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무어만은 많은 경제적 손해를 봤고 ‘소송에서 오래 끌면 이긴다.’는 생각을 했을 IKEA는 최종 결론이 나기까지 몇 년의 시간 동안 많은 양의 스투레를 판매했을 것이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무어만의 승소로 인해서 IKEA는 더는 스투레를 판매할 수 없게 되었고 (유럽연합으로의 통합과정에서 스투레의 전 유럽 판매가 금지되었다) 온라인에서도 수트레의 이미지를 찾을 수 없다. (필자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는 관계로, 이미지를 올릴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린다)
무어만의 승소 과정에서 있었던 또 작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역시 필자의 동료를 통해 알게 된 사실. 무어만은 평소 독서광으로 디자인 과정에서도 많은 영감을 독서를 통해 얻는 것으로 알려진다. IKEA와의 소송 중에 무어만은 "Der Elch und die Böcklein"이라는 작은 책자를 만들어 판매했다. IKEA의 행태를 비꼬는 듯한 이 책의 제목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순록과 염소’ 정도로 말할 수 있는데, 여기서 순록(산타 할아버지의 썰매를 끄는 코가 빨간 루돌프와 같은)은 IKEA의 나라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에 서식하기에 IKEA를 뜻하고, 염소는 무어만의 NHM이 위치한 알프스 자락에 많이 서식하는 동물로 무어만 자신을 의미한다고 풀이된다. 현재는 NHM의 웹사이트를 통해 작은 이미지로만 찾아볼 수 있는 표지에는 정장을 입은 순록이 염소 모양을 한 무어만의 타우루스를 생각하면서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이 그려져 있다. 너무 뜨끔해서일까? IKEA는 이 책의 판매 금지를 법원에 신청했고, 법원은 이번에는 IKEA의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 "Der Elch und die Böcklein" (Image ⓒ Nils Holger Moormann) : IKEA를 겨냥한 무어만의 책 ‘순록과 염소’ (온라인에서 구할 수 있는 큰 사이즈의 이미지가 없지만 읽는 분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작은 이미지로 대신한다.)
회사 동료를 통해 최근에서야 접하게 된 닐스 홀거 무어만은 마치 양파처럼 알려고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들이 많은 디자이너이다. 그가 법률가의 삶을 포기하고 디자인에 뛰어들게 된 후 지금까지 이름을 알리게 된 극적인 이야기와 많은 스타디자이너를 발굴(모든 디자이너가 그렇게 되기까지의 자질은 있었지만, 기회를 제공한 그의 공로가 조금은 있다고 판단되는 까닭에)한 이야기, 그의 작품 세계, 그리고 커다란 순록 IKEA와의 표절 시비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다양한 정보들을 소개했다. 앞서 소개한 사실들 외에도 소개할 것들이 많기에 다음 리포트에서는 무어만이 뛰어든 현재진행형의 프로젝트를 또 한 번 다루려 한다.
참조 : www.moormann.de
리포터 소개
리포터 양성철은 독일 뮌헨의 디자인 에이전시, Pilotfish GmbH(www.Pilotfish.eu)에서 Senior Industrial Designer로 일하고 있다. 그는 유럽에서 겪는 디자이너의 일상들이나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지만,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보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다.
첫댓글 상상을 현실화하고, 기하학적인 것을 개선하는게... 좋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