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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修行과 對治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住此第七地已에 入無量衆生界하고 入無量諸佛敎化衆生業하며 入無量世界網하고 入無量諸佛淸淨國土하며 入無量種種差別法하고 入無量諸佛現覺智하며 入無量劫數하고 入無量諸佛覺了三世智하며 入無量衆生差別信解하고 入無量諸佛示現種種名色身하며 入無量衆生欲樂諸根差別하고 入無量諸佛語言音聲하야 令衆生歡喜하며 入無量衆生種種心行하고 入無量諸佛了知廣大智하며 入無量聲聞乘信解하고 入無量諸佛의 說智道하야 令信解하며 入無量辟支佛所成就하고 入無量諸佛의 說甚深智慧門하야 令趣入하며 入無量諸菩薩方便行하고 入無量諸佛所說大乘集成事하야 令菩薩得入이니라 此菩薩이 作是念호대 如是無量如來境界는 乃至於百千億那由他劫에도 不能得知일새 我悉應以無功用無分別心으로 成就圓滿이라하나니라 佛子야 此菩薩이 以深智慧로 如是觀察호대 常勤修習方便慧하고 起殊勝道하야 安住不動하야 無有一念도 休息廢捨하야 行住坐臥로 乃至睡夢히 未曾暫與蓋障相應하고 常不捨於如是想念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제7지에 머물고는 한량없는 중생계에 들어가며,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중생을 교화하는 업에 들어가며, 한량없는 세계 그물에 들어가며,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국토에 들어가며, 한량없는 갖가지 차별한 법에 들어가느니라.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을 나타내는 지혜에 들어가며, 한량없는 겁에 들어가며,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삼세를 깨닫는 지혜에 들어가며, 한량없는 중생이 차별하게 믿고 이해하는 데 들어가며,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이 갖가지 이름을 나타내는 색신에 들어가느니라.
한량없는 중생의 욕망과 좋아함과 모든 근성이 차별한 데 들어가며,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이 말씀과 음성으로 중생을 즐겁게 하는 데 들어가며, 한량없는 중생의 여러 가지 마음과 행동에 들어가며,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이 분명하게 아시는 광대한 지혜에 들어가며, 한량없는 성문들의 믿고 이해하는 데 들어가느니라.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이 지혜의 도를 말하여 믿고 이해하게 하는 데 들어가며, 한량없는 벽지불이 성취한 데 들어가며,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이 매우 깊은 지혜문을 말하여 나아가게 하는 데 들어가며, 한량없는 모든 보살의 방편인 행에 들어가며,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승을 모아서 집대성하는 일에 들어가서 보살로 하여금 들어가게 하느니라.
이 보살이 생각하기를 ‘이와 같이 한량없는 여래의 경계는 내지 백천억 나유타 겁에도 알 수 없는 것이니, 내가 마땅히 공용(功用)이 없고 분별이 없는 마음으로 원만하게 성취하리라.’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이 보살이 깊은 지혜로 이와 같이 관찰하고, 방편 지혜를 항상 부지런히 닦고, 수승한 도를 일으켜서 편안히 머물고 동하지 않으며, 한 생각도 쉬거나 폐하지 아니하고, 가고 머물고 앉고 눕거나 내지 꿈에라도 번뇌와 업장으로 더불어 일찍이 서로 응하지 않으며, 이와 같은 생각을 항상 버리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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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修行)과 대치(對治) : 한량없는 법을 수행하여 장애를 다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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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보살행을 제대로 표현했고 여기는 그것을 좀 더 확장한다. ‘보살행의 확장’이라고 내가 메모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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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주차제칠지이(住此第七地已)에 : 이 제7지에 머문 뒤에
입무량중생계(入無量衆生界)하고 : 무량중생계에 들어간다.
이러한 지혜와 행동을 바탕으로 한량없는 중생계에 들어간다. 기관총이 됐든 미사일이 됐든 전차가 됐든 이러한 열가지 무기를 장착하고 한량없는 중생계에 들어가고, 이 열 가지 무기를 가지고
입무량제불교화중생업(入無量諸佛敎化衆生業)하며 :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중생을 교화하는 업에 들어가고
입무량세계망(入無量世界網)하고 : 무량세계망에 들어간다.
한량없는 세계에 이 열가지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고
입무량제불청정국토(入無量諸佛淸淨國土)하며 : 무량제불청정 국토에 들어가고
입무량종종차별법(入無量種種差別法)하고 : 무량종종차별법에 들어간다. 상상해 보기 바란다. 이 어마어마한 열 가지 무기를 가지고 이러한 데 다 들어가서 전부 초토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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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무량제불현각지(入無量諸佛現覺智)하며 : 무량제불 현각지 환하게 깨달은 지혜에 들어가고, 이럴 때 현각지의 현(現)자는 ‘번듯이’라고 옛날에 새겼다. 환하게 분명하게 깨달은 지혜에 들어가며
입무량겁수(入無量劫數)하고 : 또 무량겁수에 들어간다.
시간이 다르고 때가 다르고 장소가 다르다고 못 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간 어느 때도 다 들어가고
입무량제불각료삼세지(入無量諸佛覺了三世智)하며 :삼세를 환히 깨달아 아는 지혜에 들어가며
입무량중생차별신해(入無量衆生差別信解)하고 : 무량중생차별 신해에 들어간다. 중생의 차별 신해도 참 여러 가지다.
우리가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가 믿는 것도 각양각색이고 또 불교를 안다고 하지만 그것도 역시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어떤 차별된 신해라 하더라도 이 열 가지 무기의 기준을 가지고 들어가면 다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입무량제불시현종종명색신(入無量諸佛示現種種名色身)하며: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이 종종 명색신을 나타내 보이는 데 들어가고, 어떤 경우도 이 열 가지 조건을 가지고 열 가지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면 해결 안 되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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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무량중생욕락제근차별(入無量衆生欲樂諸根差別)하고 : 한량없는 중생이 욕락이 다 다르다. 하고자 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 각양각색이다. 또 시간마다 다르다. 그런 제근차별에 들어가고
입무량제불어언음성(入無量諸佛語言音聲)하야 : 무량제불 언어 음성에 들어가고 들어가서
영중생환희(令衆生歡喜)하며 :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케 한다.
입무량중생종종심행(入無量衆生種種心行)하고: 무량중생의 가지가지 심행, 중생들을 따라서 마음이 흘러가는 것이 별의별 모습으로 흘러간다. 중생의 생각이 여러 가지다.
나 한 사람만을 관해도 오늘은 이것을 좋아했다가 내일은 또 저것을 좋아하는데 오늘 내일 정도가 아니라 시간시간 분마다 초마다 다르다. 그렇게 변화하는 마음의 작용에 다 들어가고
입무량제불요지광대지(入無量諸佛了知廣大智)하며 : 무량제불모든 부처님이 요지하고 있는 광대한 지혜에 들어가고
입무량성문승신해(入無量聲聞乘信解)하고 : 무량성문들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이 알고 믿는 데까지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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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무량제불(入無量諸佛)의 : 무량제불의
설지도(說智道)하야 : 지혜의 도를 설해서
영신해(令信解)하며 : 하여금 믿고 이해하는 데 들어가며
입무량벽지불소성취(入無量辟支佛所成就)하고: 무량벽지불 이 성취한 바에 들어간다. 위에 성문승이 있었고 그다음에 벽지불이 나왔다.
입무량제불(入無量諸佛)의 : 한량없는 부처님의
설심심지혜문(說甚深智慧門)하야 : 심심지혜의 문을 설해서 거기에
영취입(令趣入)하며 : 들어가게 하는 데 들어가며
입무량제보살방편행(入無量諸菩薩方便行)하고 : 입무량제보살 방편행에 들어가고
입무량제불소설대승집성사(入無量諸佛所說大乘集成事)하야 : 입무량제불의 소설대승집성사한다. 이것이 중요한 말이다.
한량없는 모든 깨달은 분들이 설한 바 대승을 집성한 대승을 전부 모아놓은 것, 대승의 가르침을 전부 모아 놓은 일에 들어간다.
내 짐작을 100퍼센트 맞다고 믿기는 그렇지만 또 안믿을 수도 없는 것이 대승불교 성립에 대해서 나는 나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500년 600년 후에 ‘이것이 진짜 부처님 본래의 뜻이다’ 하고 대승불교가 우후죽순처럼 막 일어났다. 여기저기 곳곳에서 도인들이 나오고 깨달은 사람들이 나와서 ‘이것이 진짜 훌륭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하고 너도나도 대승경전을 막 그냥 저술해 내는 것이다. 누가 저술했다 고 하면 얼른 가서 보고 다른 사람이 저술했다 하면 그걸 또 얼른 보고 자기는 자기 나름의 또 다른 대승경전을 저술하는 것이다. 설대승집성사는 이러한 대승에 다 들어가고 다 알아야 된다 는 말이다. 대승경전을 다 봐야 된다. 그것에 들어가서
영보살득입(令菩薩得入)이니라 : 보살로 하여금 들어가게 한다. 대승을 집성한 일에 들어간다. 이 한 구절에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승경전이 다 모여 있을 것이 아닌가. 그 대승경전은 북쪽으로 올라가고 남쪽으로는 그대로 소승경전만 가지고 있게 되었다. 대승경전은 티벳고원을 넘어가서 티벳이나 중국, 한국, 일본까지 넘어오고 스리랑카라든지 미얀마라든지 태국이라든지 베트남의 일부와 그 옆나라 캄보디아 라오스 이런 데까지 소승경전이 들어가서 거기에서는 그대로 소승경전만 의지를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교통이 발달하니 ‘아이구 한국에 살아봐야 별로 재미도 없고 새로운 데 가서 살자’해서 요즘 미얀마에 한국스님 몇 백 명이 산다고 한다.
거기서 한 철씩 두 철씩 일 년씩 이 년씩 살다가 한국선방에 와서는 그곳에서 배운 위빠사나를 하고 있는 스님들이 4, 50퍼센트가 된다. 또 여기서 배워서 하는 사람들이 한 2, 30퍼센트가 된다.
전통 간화선을 하는 사람은 3, 40 퍼센트 될까 말까 하고 3, 40페센트도 거의 안되는 것 같다. 그 외에는 전부 위파사나를 하는 것이다.
지금 선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종정스님 법문에서도 내가 그것을 들었고 선방스님들에게 물어봐도 그렇다고 한다. 어느 것이 좋다, 어느 것이 나쁘다 옳다 틀렸다 하는 것도 아니고 현재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도 우리가 알기는 알고 있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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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보살(此菩薩)이 : 차보살이
작시념(作是念)호대 : 이러한 생각을 하되
여시무량여래경계(如是無量如來境界)는 : 여시 무량여래경계는
내지어백천억나유타겁(乃至於百千億那由他劫)에도 : 내지 백천억 나유타겁에도
불능득지(不能得知)일새 : 다 능히 알 수가 없으며
아실응이무공용무분별심(我悉應以無功用無分別心)으로: 내가 무공용 무분별심으로써 여기는 무공용 무분별심이 라는 것이 나온다. 그 전에는 유공용이다. 무엇을 해도 공용 작용 이런 것이 있다. 그것이 유공용이다.
해도 함이 없이 하는 것은 무공용이고 무분별심이다. 이것은 마음으로써 쉽게 이해 가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짐작은 간다. 예를 들어서 어머니가 가족들을 위해서 음식을 열심히 잘 만들어서 배불리 먹게 하고 생활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한다면 거기에 무슨 다른 분별심이 있을 것이며 내가 했다고 하는 어떤 공을 자랑하고 품값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이 거기에 있겠는가? 이러한 상태가 무공용, 무분별심이다. 아무 생각 없이 으레 하는 것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또 복이 있는 것이다. 내 가족에게 하는 것은 크게 복이 있다고 할 것은 없고 내 가족 아닌 사람에게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큰 복을 짓는 것이다.
우리가 늘 무주상 무주상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참 어려운 일이다.
우리 중생들 마음이 어떻게 무주상이 되겠는가? 그건 안된다. 그냥 상을 내도 보시를 하는 것이 좋다.
상내고 보시해도 보시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무주상으로 하려고 굳이 갈등할 필요가 없다. 되면 더욱 좋지만 무주상은 안되는 일이다.
그러나 하다보면 어느날 무주상이 자연스럽게 된다.
무공용 무분별이 된다.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아유 내가 무주상으로 해야지 무공용으로 해야지’ 하는 그런 갈등이나 힘은 쓸 필요가 없다.
그렇게 마음 쓰면 오히려 덕지덕지 공용이 더 붙고 분별이 더 붙고 상이 더 붙는다.
덕지덕지 상이 더 붙어서는 안되니까 아예 ‘나는 중생이니까 상내고 할란다’하고 그냥 하는 것이다. 굳이 ‘상내고 할란다’ 고 할 것도 없지만 ‘상 안내고 할란다’고 할 것도 없다. 하다보면 어느날 무공용 무분별심 무주상이 되는 것이다.
성취원만(成就圓滿)이라하나니라 : 성취하야 원만케 하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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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차보살(此菩薩)이 : 이 보살이
이심지혜(以深智慧)로 : 깊은 지혜로써
여시관찰(如是觀察)호대: 이와같이 관찰하되
상근수습방편혜(常勤修習方便慧)하고 : 항상 부지런히 방편의 지혜를 수습하고
기수승도(起殊勝道)하야 : 수승도를 일으켜서 저 앞에 수승도가 있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주 수승한 도다.
수승한 도속에는 무공용 무분별 무주상이 다 포함된다.
어떤 신도가 절에 시주를 꽤 했다면 절의 주지입장에서 그 신도를 의식 안할 수도 없고 대접을 안할 수도 없다.
어떤 신도는 생색을 너무 낸다. 생색내는 것이 또 보인다. 그러면 아주 거북하다. 그렇다고 갖다주는 것을 안받을 수도 없다. 받을 수도 없고 안받을 수도 없고 그런 사람들도 또 있다.
생색을 안내는 사람 같으면 아주 편안하다. 주지가 백만원을 받든 천만원을 받든 일억을 받아도 마음이 편안한 것이다. 서로 편안하게 주고, 서로 편안하게 받으면 그것이 수승도다. 그런 관계가 되면 그것이 수승한 도다.
안주부동(安住不動)하야 : 안주해서 동하지 아니해서
무유일념(無有一念)도 : 한 생각도 버리지 아니해서
휴식폐사(休息廢捨)하야 : 쉬지도 않고 버리지도 아니해서
행주좌와(行住坐臥)로 : 행주좌와로
내지수몽(乃至睡夢)히 : 내지 꿈속에서라도
미증잠여개장상응(未曾暫與蓋障相應)하고 : 일찍이 잠깐도 개장으로 더불어 상응하지 않는다.
개장은 무엇인가? 번뇌를 개장이라고 한다. 번뇌를 표현하는 글자들이 너무나 많고 많은데 덮을 개(蓋)자와 장애할 장(障)자를 써놨다. 덮는다, 장애한다 이것을 우리가 보시하는 일로 생각해 보면 아주 쉽게 드러난다.
행주좌와 꿈속에까지 그것이 장애가 되지 아니해야 된다.
‘아 내가 무엇을 했는데’ 하는 그런 마음이 드러나지 아니해야 된다.
상불사어여시상념(常不捨於如是想念)이니라 :항상 이와 같은 상념을 버리지 아니하느니라. 수승한 도에 대해서 꿈속에까지도 그런 생각을 버리지 아니해야 된다.
4, 十波羅密
此菩薩이 於念念中에 常能具足十波羅蜜하나니 何以故오 念念皆以大悲爲首하야 修行佛法하야 向佛智故니 所有善根으로 爲求佛智하야 施與衆生이 是名檀那波羅蜜이요 能滅一切諸煩惱熱이 是名尸羅波羅蜜이요 慈悲爲首하야 不損衆生이 是名羼提波羅蜜이요 求勝善法호대 無有厭足이 是名毘梨耶波羅蜜이요 一切智道가 常現在前하야 未嘗散亂이 是名禪那波羅蜜이요 能忍諸法無生無滅이 是名般若波羅蜜이요 能出生無量智가 是名方便波羅蜜이요 能求上上勝智가 是名願波羅蜜이요 一切異論과 及諸魔衆이 無能沮壞가 是名力波羅蜜이요 如實了知一切法이 是名智波羅蜜이니 佛子야 此十波羅蜜을 菩薩이 於念念中에 皆得具足하며 如是四攝과 四持와 三十七品과 三解脫門과 略說乃至一切菩提分法을 於念念中에 皆悉圓滿이니라
“이 보살은 생각 생각마다 열 가지 바라밀다를 항상 구족하느니라. 왜냐하면 생각 생각마다 대비(大悲)로 머리를 삼고 부처님의 법을 수행하여 부처님의 지혜에 향하는 까닭이니라.
자기에게 있는 선근을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중생에게 주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라 하느니라.
일체 모든 번뇌의 뜨거움을 능히 소멸하는 것은 지계(持戒)바라밀이라 하느니라.
자비로 머리를 삼아 중생을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은 인욕(忍辱)바라밀이라 하느니라.
훌륭하고 선한 법을 구하여 만족함이 없는 것은 정진(精進)바라밀이라 하느니라.
일체 지혜의 길이 항상 앞에 나타나서 잠깐도 산란하지 않은 것은 선정(禪定)바라밀이라 하느니라.
모든 법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을 능히 인정하는 것은 반야(般若)바라밀이라 하느니라.
한량없는 지혜를 능히 내는 것은 방편(方便)바라밀이라 하느니라.
상상품(上上品)의 수승한 지혜를 구하는 것은 서원(誓願)바라밀이라 하느니라.
일체 이단의 언론과 마군들이 능히 깨뜨릴 수 없는 것은 힘[力]바라밀이라 하느니라.
일체 법을 실제와 같이 아는 것은 지혜(智慧)바라밀이라 하느니라.
불자여, 이 열 가지 바라밀을 보살이 생각 생각마다 모두 구족하였으며, 이와 같이 네 가지 포섭하는 법, 네 가지 총지, 37가지의 도를 돕는 법, 세 가지 해탈문과 간략히 설하면 일체 보리의 부분법을 생각 생각마다 모두 원만히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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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바라밀(十波羅密) : 열 가지 바라밀 등의 법을 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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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보살(此菩薩)이 : 이 보살이
어염념중(於念念中)에 : 염념중에
상능구족십바라밀(常能具足十波羅蜜)하나니 : 항상 능히 십바라밀을 구족하나니
하이고(何以故)오 : 하이고오
염념개이대비위수(念念皆以大悲爲首)하야 : 염념에 다 대비위수하며 큰 비(悲)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써 우두머리를 삼아서
수행불법(修行佛法)하야 : 불법을 수행해서
향불지고(向佛智故)니 : 불지를 향하는 연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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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선근(所有善根)으로: 자기가 어느 정도 선근이 있다고 하면 그 선근으로써
위구불지(爲求佛智)하야 : 불지를 구해서
시여중생(施與衆生)이 : 중생에게 그것을 준다. 불지를 구해서 중생에게 주는 것이
시명단나바라밀(是名檀那波羅蜜)이요 : 이것이 단나바라밀, 보시바라밀이다. 여기서 불지(佛智)가 나오는데 부처님의 지혜는 너무 그렇게 욕심내지 말고 ‘인과이치가 불지다’ 라고 알면 된다. 우리가 단순해야 된다. 단순해야 실천할 가능성이 있다.
인과 이치를 아는 것이 부처의 지혜다. 우리가 흔히 쉬운 말로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았다’고 표현한다.
‘불지는 인과다’라는 것을 중생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단바라밀이다.
물론 온갖 생활도구 치약 칫솔 할 것 없이 일체 것을 다 보시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부처님은 그런 일을 안하셨으니까 오로지 연기의 이치, 인과의 이치를 가르쳐서 바르게 살도록, 덕되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해서 안 좋은 것은 남도 안좋다는 사실을 알고 남에게 좋은 일은 나에게도 좋고 남이 안좋은 것은 나에게도 안좋다는 것은 사실 너무나도 쉬운 공식이다.
나에게 안 좋은 것은 남에게도 안 좋은 것임을 알아야 된다. 그런 안 좋은 일을 남에게 베풀면 안된다. 그런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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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멸일체제번뇌열(能滅一切諸煩惱熱)이 : 능히 일체 모든 번뇌의 열기를 소멸하는 것이 이것이
시명시라바라밀(是名尸羅波羅蜜)이요 : 시라바라밀 지계바라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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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위수(慈悲爲首)하야 : 자비로써 우두머리를 삼아서
불손중생(不損衆生)이 : 중생을 손해 보이지 않는 것이
시명찬제바밀(是名羼提波羅蜜)이요 : 인욕 참는다는 것이다. 인욕바라밀이 찬제바라밀이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내가 좀 피해를 봤다손 치더라도 상대를 손해 보이지 않는 것, 중생들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인욕바라밀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맞으면 나도 모르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주먹이 날아간다. 내가 피해를 봤다 하면 무조건 상대를 향해서 반격을 하는 것이다. 중생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렇게 안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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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승선법(求勝善法)호대 : 수승하고 선한 법을 구하되
무유염족(無有厭足)이: ‘아 화엄경 좋다좋다’ 맨날 좋아도 또 가서 배운다. 또 가서 공부하고 다 아는 것이지만 싫어하지 아니하고 ‘또 오늘은 새로운 연구를 해왔는가 새로운 말씀이 또 있는가’ 등등 해서 염족함이 없는 것이
시명비리야바라밀(是名毘梨耶波羅蜜)이요 : 정진바라밀, 비리야바라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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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지도(一切智道)가 : 일체 지혜의 도가
상현재전(常現在前)하야 : 늘 앞에 나타나서
미상산란(未嘗散亂)이 : 산란하지 않는 것 지혜가 앞에 딱 나타나서 항상 마음이 산란하지 아니한다.
시명선나바라밀(是名禪那波羅蜜)이요 : 이것이 선나바라밀, 참선이다.
선바라밀의 선은 육바라밀 내지 십바라밀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선 일변도로 치우치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원만한 불교가 못되고 치우친 불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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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인제법무생무멸(能忍諸法無生無滅)이 : 능히 모든 법의 무생무멸 불생불멸의 이치를 인(忍) 안다는 뜻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蜜)이요 : 반야바라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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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출생무량지(能出生無量智)가 : 한량없는 지혜를 출생하는 것이
시명방편바라밀(是名方便波羅蜜)이요 : 이름이 방편바라밀이다. 한량없는 지혜를 활용하고 써야 된다. 놔두면 안된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이 방편바라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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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구상상승지(能求上上勝智)가 : 능히 높고 높은 수승한 지혜를 구하는 것이
시명원바라밀(是名願波羅蜜)이요 : 이것이 원바라밀이다.
지혜는 끝도 없고 한도 없으니까 갈고 닦고 끊임없이 화엄경을 공부하고 또 사유하고 공부하고 또 가르치면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개발해서 다른 사람에게 일러주기도 하는 것이 원바라밀이다. 십바라밀 가운데 원바라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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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이론(一切異論)과 : 일체 이론과 여러가지 다른 주장과
급제마중(及諸魔衆)이 ; 마구니의 대중들이, 우리는 워낙 정확한 법을 갖추고 있고 깨달음의 법을 다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외도나 다른 주의 주장도
무능저괴(無能沮壞)가 : 깨뜨릴 수가 없고 막을 수 없고 무너뜨릴 수가 없다.
시명역바라밀(是名力波羅蜜)이요 : 이것이 역바라밀이다. 그것이 불교를 공부하는 힘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힘은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가 말이 좀 서툴러서 다른 종교, 다른 철학의 주장을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 그래도 마음까지 승복한 것은 아니다. 말이 서툴러서 말은 못이겨도 마음이 승복된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에 지고 있는 것을 마음은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자기소신은 가지고 있어야 된다.
‘신이 만들었다. 뭐가 만들었다. 신이 일체를 잘 안다 라고 네가 그렇게 주장을 하고 나는 반박할 논리가 안 갖추어져 있고 말도 안되지만’ 그러나 속은 뻔해서 도저히 그 이론에 승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역바라밀, 힘의 바라밀이다.
만약에 논리가 정연해서 이론으로 그것을 설파하고 이길 수 있으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고 훌륭한 힘 역바라밀이다.
자기 속은 환해야 되고 또 자기 소신도 환해야 된다.
그런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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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실요지일체법(如實了知一切法)이 : 사실과 같이 일체 법을 아는 것이 ‘누구의 말이다’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진실,실제, 진리와 같이 일체법을 요지하는 것이
시명지바라밀(是名智波羅蜜)이니: 지바라밀이다. 지혜다.
누가 말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불교는 아니다.
이런 이치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고 안오고와 관계가 없다. 인과의 이치도 부처님이 오시고 안오시고 아무 관계없다. 진리도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시고 안오시고 아무 관계없다. 진리를 따르는 것 뿐이다.
부처님이 먼저 그러한 사실을 깨달아서 우리에게 일러줬으니 그분의 말씀이 맞아서 우리가 따르는 것이지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따르는 것은 절대 아닌 것이다.
그것이 불교가 다른 종교와의 천양지차다.
그런 주장이 참 대단하다.
누구의 말이니까 이게 옳든 그르던 간에 이것을 따라야 된다고 사는 사람들이 또 부지기수로 많다. 그런 것을 보면 참 안타깝다. 여실요지 일체법이 시명지바라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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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차십바라밀(此十波羅蜜)을 : 이 십바라밀을
보살(菩薩)이 : 보살이
어염념중(於念念中)에 : 염념 가운데서
개득구족(皆得具足)하며 : 다 구족하며
여시사섭(如是四攝)과 : 사섭법과
사지(四持)와 : 사지 사무량심과
삼십칠품(三十七品)과: 심십칠조도품과
삼해탈문(三解脫門)과 : 삼해탈과 공 무상 무원이다.
약설내지일체보리분법(略說乃至一切菩提分法)을 : 간략히 설하며 내지 일체보리 분법을.
일체 깨달음에 필요한, 깨달음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부분법 도움이 되는 낱낱 법들이 분법이다. 37보리분법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조도법 도를 돕는 법이라고 했지 전체가 아니다.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는 것도 깨달음 전체를 담당하지 않는다. 부분법이고, 깨달음의 부분법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가 2만개의 부속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 한 개만 빠져도 자동차가 안 굴러간다. 그렇게 생각해야 된다. 그러니까 하나라도 놓치면 안된다.
관심일법이 총섭제행이라고 하는 것이 그래서 아니다.
관심법도 관심법 대로 하고, 제행은 제행대로 다 수긍하고 인정하고 시간 나는 대로 힘나는 대로 다 닦아야 된다.
관심법은 제행 가운데, 일체법 가운데 한가지다.
그런데 그 일체법을 하기 싫고 귀찮으니까 ‘관심일법이 총섭제행이라’ 이 말 한마디 해놓고는 앉아있으면 되고 변명이 다 되니까 ‘관심법 하나면 끝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다.
어염념중(於念念中)에 : 염념가운데
개실원만(皆悉圓滿)이니라 : 다 원만히 하느니라.
5, 七地와 菩提分法
爾時에 解脫月菩薩이 問金剛藏菩薩言하사대 佛子야 菩薩이 但於此第七地中에 滿足一切菩提分法가 爲諸地中에도 亦能滿足이니잇가 金剛藏菩薩이 言하사대 佛子야 菩薩이 於十地中에 皆能滿足菩提分法이나 然이나 第七地가 最爲殊勝이니 何以故오 此第七地功用行滿하야사 得入智慧自在行故니라 佛子야 菩薩이 於初地中에 緣一切佛法願求故로 滿足菩提分法하며 第二地에 離心垢故며 第三地에 願轉增長하야 得法光明故며 第四地에 入道故며 第五地에 順世所作故며 第六地에 入甚深法門故며 第七地에 起一切佛法故로 皆亦滿足菩提分法이니라 何以故오 菩薩이 從初地로 乃至第七地하야사 成就智功用分이니 以此力故로 從第八地로 乃至第十地히 無功用行을 皆悉成就니라 佛子야 譬如有二世界호대 一處는 雜染이며 一處는 純淨이라 是二中間을 難可得過니 唯除菩薩의 有大方便神通願力인달하야 佛子야 菩薩諸地도 亦復如是하야 有雜染行하며 有淸淨行이라 是二中間을 難可得過니 唯除菩薩의 有大願力方便智慧하야 乃能得過니라
그때에 해탈월보살이 금강장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보살이 다만 이 제7지에서 일체 보리의 부분법을 만족합니까? 여러 지위에서도 또한 모두 만족합니까?”
금강장보살이 말하였습니다. “불자여, 보살이 십지중에서 보리의 부분법을 모두 만족하지마는 그러나 제7지에서 가장 수승하니라. 왜냐하면 이 제7지에서 공용의 행[功用行]이 만족하여 지혜의 자재한 행에 들어가게 되는 연고이니라.
불자여, 보살이 초지에서 일체 불법을 반연하여 원을 세워 구하므로 보리의 부분법을 만족하느니라.
제2지에서는 마음의 때를 여의는 연고이니라.
제3지에서는 원이 더욱 증장하여 법의 광명을 얻은 연고며, 제4지에서는 도에 들어가는 연고며, 제5지에서는 세상의 하는 일을 따르는 연고며, 제6지에서는 깊은 법문에 들어가는 연고며, 제7지에서는 일체 불법을 일으키는 연고로, 모두 보리의 부분법을 만족하느니라.
왜냐하면 보살이 초지로부터 제7지에 이르도록 지혜의 공용 있는 부분을 성취하는 것이며, 이 공용의 힘으로 제8지에 들어가서 제10지에 이르도록 공용이 없는 행을 모두 성취하느니라.
불자여, 비유하면 여기 두 세계가 있는데, 한 곳은 물들었고 한 곳은 청정하거든, 두 세계의 중간을 지나가기 어려우니라. 오직 보살로서 큰 방편과 신통과 원과 힘이 있는 이는 제외하느니라.
불자여, 보살의 여러 지위도 이와 같아서 물든 행도 있고 청정한 행도 있거든, 이 두 지위의 중간을 지나가기 어려우니라. 오직 보살로서 큰 원과 힘과 방편과 지혜가 있는 이는 능히 지나갈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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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七地)와 보리분법(菩提分法) : 제7지와 보리분법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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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와 보리분법이라.
이시(爾時)에 : 이시에
해탈월보살(解脫月菩薩)이 : 해탈월 보살이
문금강장보살언(問金剛藏菩薩言)하사대 : 금강장 보살에게 물어 말하되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菩薩)이 : 보살이
단어차제칠지중(但於此第七地中)에 : 다만 이 제 7지 가운데서
만족일체보리분법(滿足一切菩提分法)가: 일체 보리분법을 만족하는가? 칠지 가운데서 깨달음에 관한 낱낱 법들을 만족하는가? 아니면
위제지중(爲諸地中)에도 : 다른 모든 지위 가운데서도
역능만족(亦能滿足)이니잇가 : 또한 능히 모두 만족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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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 : 금강장 보살이
언(言)하사대 : 말하기를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菩薩)이 : 보살이
어십지중(於十地中)에 : 십지 가운데
개능만족보리분법(皆能滿足菩提分法)이나 : 다 낱낱이, 십지 가운데서 깨달음에 대한 그런 것들을 다 만족하지만.
이 십지품은 십주경(十住經) 또는 십주품(十住品) 십지품(十地品) 십지경(十地經) 등등해서 처음 화엄경에서 출발해서 독립된 경전이라고 내가 말씀을 드렸었다. 여기보면 그런 어떤 분위기가 조금씩 나타난다.
연(然)이나 : 그러나
제칠지(第七地)가 : 7지 가운데서
최위수승(最爲殊勝)이니 : 최위수승이다. 7지 가운데서 제일 보리분법, 보리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낱낱 부분법을 제대로 갖출 수 있다고 하는 뜻이다.
십지의 어느 지위에서든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7지 가운데 제일 많다. 그렇게 알면 된다.
하이고(何以故)오 : 하이고오
차제칠지공용행만(此第七地功用行滿)하야사 : 7지의 공용의 행이 만족해서
득입지혜자재행고(得入智慧自在行故)니라 : 지혜의 자재한 행에 들어간다. 공용행이 원만하다 라고 하는 말은 무공용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작은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이 무공용이 되어야 한다. 육바라밀을 닦더라도 하나하나가 완전한 바라밀이 되어야 하고 바라밀이 되면 그것이 무공용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지혜자재행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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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菩薩)이 : 보살이
어초지중(於初地中)에 : 초지 가운데서
연일체불법원구고(緣一切佛法願求故)로 : 일체 불법원구를 반연한 고로, 십지의 초지는 화엄경의 첫 단계 첫 이야기이니까
그때에 불법을 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알면 이해가 된다.
불법 구하기를 원하는 것이 초지 환희지다.
‘불법 재미있다 좋다. 신심난다’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때에 원구고로
만족보리분법(滿足菩提分法)하며 : 만족보리분법하며 그때는 신심이 나니까 뭐든지 하고 싶은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초지중에는 이 기도도 하고 싶고 저 기도도 하고 싶고 계율도 잘 닦고 싶고 경도 공부하고 싶고 참선도 하고 싶고 일체를 다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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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지(第二地)에 : 또 2지에는
이심구고(離心垢故)며 : 심구를 떠나는 연고며. 지계를 중심으로 수행을 하니까. 계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때를 떠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렇게 표현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렇게 이심구 라는 표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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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삼지(第三地)에 : 또 제3지에
원전증장(願轉增長)하야 : 원이 더욱 더 증장한다. 더 앞으로 나아가고 더 커지는 것이다. 커져서
득법광명고(得法光明故)며 : 법의 광명을 얻는 연고며
제사지(第四地)에 : 제4지에는
입도고(入道故)며 : 도에 들어가는 연고며
제오지(第五地)에 : 제5지에는
순세소작고(順世所作故)며 : 세상의 짓는 바를 다 순한다. 5지에는 별별 이야기가 있었다. 도장을 판다. 뭘 봐준다. 안다, 장사를 한다 그런 것까지도 다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제육지(第六地)에 : 6지에는
입심심법문고(入甚深法門故)며 : 심심 법문에 들어가는 연고다. 여기에는 그런 이야기가 많았다.
37조도품이라든지 12인연이라든지 그런 것들 기본 교리가 상당히 6지에 많이 이야기 되었다.
제칠지(第七地)에 : 7지에는
기일체불법고(起一切佛法故)로 : 일체 불법을 일으키는 까닭으로
개역만족보리분법(皆亦滿足菩提分法)이니라 : 또한 보리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낱낱 법을 전부 만족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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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何以故)오 : 하이고오
보살(菩薩)이 : 보살이
종초지(從初地)로 : 종초지로부터
내지제칠지(乃至第七地)하야사 : 7지에 이르러서
성취지공용분(成就智功用分)이니 : 지공용분을 성취한다. 지혜에 대한 공용, 지혜에 대한 노력, 바른 지혜를 얻는 데 대한 노력의 부분이 성취된다.
앞에 내가 강조했던 첫 대목이 한단락 그것이 지공용으로서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 된다.
이차력고(以此力故)로 : 이러한 힘을 쓰는 고로
종제팔지(從第八地)로 : 8지로부터
내지제십지(乃至第十地)히 : 십지에 이르기까지.
무공용행(無功用行)을 : 무공용행을
개실성취(皆悉成就)니라 : 개실성취한다. 사실 7지부터인데 7지에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지혜가 완전히 갖추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8지 9지 10지는 전부 무공용행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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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비여유이세계(譬如有二世界)호대 : 비유로 이야기를 한다.
일처(一處)는 : 한 곳은
잡염(雜染)이며 : 더러운 곳이고
일처(一處)는 : 한 곳은
순정(純淨)이라 : 깨끗한 곳이다. 그런 두 개의 세계가 있다. 그런데
시이중간(是二中間)을 : 이 세계의 중간 더러운 세계에서 깨끗한 세계로 넘어가는 그 중간을
난가득과(難可得過)니 : 통과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전혀 반대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세속 생활의 어떤 관점에서 출세간 생활의 관점으로 100퍼센트 바꾸기가 너무 힘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출가를 해서 한참 불법 공부를 하면 거의 부처가 다 된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도루묵이고 그 자리에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한참 변한 줄 알았는데 아니다. 그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난가득과 지나가기가 어렵다. 마음은 뻔한데 알고 보면 안돼 있다.
‘아 내가 그대로 보통사람이구나, 아 그냥 보통사람이구나’ 살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난가득과니 그 가운데
유제보살(唯除菩薩)의 : 유제보살의 보살로서
유대방편신통원력(有大方便神通願力)인달하야 : 큰 방편이 있고 신통과 원력이 있는 사람은 제한다.
그런 사람들이야 당연히 훌쩍 뛰어 넘어간다.
선천적으로 제대로 된 사람은 출가하자마자 거의 반토막은 부처가 다 되어 있다.
선천적으로 반토막은 거의 다 부처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 길로 그냥 쭉 나가는 것이다. 늙을 때까지 쭉 그대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아닌 사람도 있다. 아주 잘하다가 중간에 속세로 나가는 사람도 있고, 안나가도 절에서 사는데 속인이 사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그냥 사람으로서 사는 사람들이 대개 99퍼센트다.
사람으로 사는 삶 그대로다.
솔직하게 우리가 고백하자면 그렇다.
그런데 그 가운데 특별한 보살들은 불법을 알자마자 그대로 휙 통과한다.
내가 신문을 오려놓고 안 가져 왔는데 엊그저께 신문기사에 어떤 법조인 생활을 30년을 한 분의 이야기가 나왔다. 이분은 서울 법대를 나와서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변호사 10년 판사 20년을 한 분이다. 어느날 서점에 가서 불교책 한 권을 보고는 불법에 필이 딱 꽂혀서 그때부터 불교 공부를 시작해서 이 책 저 책을 막 보고 법화경 번역하고 화엄경 번역하고 아함경을 18권 번역했다. 책이 두꺼워서 쌓아 놓았는데 자기 무릎까지 올 정도였다. 8년 동안 아함경을 다 번역했는데 그런 사람 이야기가 크게 동아일보인가에 났다.
참 신기하다. 판사 변호사는 우리 나라 직업 중에 최고급 직업이고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가. 머리도 제일 좋고 존경도 받는다. 그런 사람인데 불교 책 한 번 보고 윤회가 있나 없나 하고 어디 책을 한 권 사봐야지 하고 책방에 가서 책을 한 권 두 권 불교책을 보기 시작해서 그만 법조인이고 뭐고 돈이고 뭐고 다 때려치워 버리고 불경만 본 것이다.
불경이라는 불경은 다 보고 이거 좋은 번역 하나 내야지 하고 아함경을 8년동안 두꺼운 것을 18권이나 번역을 해서 무릎까지 올라오게 해서 사진을 찍은 그 기사를 가져오려고 했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특수한 보살인 것이다.
그렇게 방편과 신통 원력이 있는 사람은 제한다고 했다.
건너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더러운 세상과 깨끗한 세상을 건너가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그냥 건너 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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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제지(菩薩諸地)도 : 보살제지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역부여시하야
유잡염행(有雜染行)하며 : 물들고 뒤섞인 행도 있고
유청정행(有淸淨行)이라 : 청정한 행도 있다.
시이중간(是二中間)을 : 이 두 중간을
난가득과(難可得過)니 : 지나가기가 어려운데
유제보살(唯除菩薩)의 : 오직 보살의
유대원력방편지혜(有大願力方便智慧)하야: 대원력이 있고 방편 지혜가 있어서 능히 지나가는 사람은 제한다. 그런 사람은 간단하게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내능득과(乃能得過)니라 : 불법 공부에 견성하기 어렵고 보살행하기 어렵고 부처되기 어렵다. 99.9퍼센트는 어렵다.
그런데 아주 쉽게 아무 것도 아니게 지나가는 사람도 있어서 이 사람들은 오히려 안 지나 가기가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러니 걱정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인연이 축적되면 절로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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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25때 피난을 가서 처음으로 수영을 배웠다.
6월 25일 전쟁이 나서 피난 갈 때는 한 7월 8월쯤 되니 한 여름이다. 그래서 물가에 가서 수영을 많이 했는데 오십천이라고 하는 물이 좋다.
내가 어려서 수영을 못하니까 형이 수영을 가르쳐준다고 허리를 잡으라고 하였는데 처음에는 형이 허리를 잡아도 자꾸 가라앉았다. 그렇게 몇 번 안되어서 그만 혼자 수영이 다 되어 버렸다. 나중에는 주변에 누가 있는 것이 귀찮아지고 그다음에는 바다고 민물이고 간에 떠 있는 것이 너무 쉬워졌다.
오히려 가라앉는 것이 어렵지 떠있는 것이 훨씬 쉽다.
그렇게 된다.
여러분도 자전거를 다 타봤을 것이다. 자전거 타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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