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무슨 책에서 옛 배재학당 학칙을 예로 든 것을 읽었다. 배재 학칙이라면 마침 작년 서울 성곽-정동구간 답사 때 배재 역사박물관 들렀다가 사진 찍은 것이 있어 꺼내 보며 글 한편 꾸민다. 배재는 1885년 설립되어 서양식 학교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르다. 최초 말 나오면 으레 “알고 보면 우리가 먼저다” 라는 주장이 나오지만 배재 보다 앞섰다는 학교를 들은 적이 없으니, 학교 부문에 있어서는 배재가 이론(異論)의 여지 없이 원조(元祖)인 것 같다.
사진: 배재학당 자료화면 배재는 고등학교지만, 1885년 당시 희귀성은 지금 대학이 아니라 대학원 아니 박사학위 보다 더 했던 셈이다. (으음 지금은 배재대학까지 있다.) 배재는 개교 후 정동 34-5 번지에서 100 년 정도 지내다가, 1980년대 고덕으로 이사 가고 옛 터엔 배재정동빌딩과 배재공원이 들어서고 또 일부는 러시아 대사관 부지로 잘라주기도 했다.
사진: 배재공원 이사는 갔지만 옛 건물 중 동관(東館) 하나는 남겨 역사박물관을 만들었다.
사진: 배재동관 이것마저 남기지 않았다면 졸업생들은 너무나 아쉬웠을 것이고 우리사회로서도 귀중한 유산을 또 하나 잃어버린 셈일 것이다. 배재 창립은 1885년이지만 동관은 1916년 지은 건물이다. 안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유물자료도 있고 옛 교실도 하나 복원했다.
사진: 교실 이제 전시품 중 옛 학칙 첫 부분을 본다.
제 1조에 수업료가 매월 세 냥 이고 그걸 또 다달이 내야 한다 라…. 첫 머리에 돈 이야기부터 나오니 전통 선비사회 기준으로 보면 점잖지 않은 것이 좀 이질적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그런데 석 냥은 어느 정도였을까? 옛 돈 가치는 종잡기 매우 힘든데 쌀 값으로 환산해 본다. 조선 말기 서울 쌀값이 대략 1섬에 5냥 정도였다고 한다. (농촌은 더 쌌다) 조선시대 1섬은 용량이 지금 반 정도라니 닷 냥 1섬 20만원 x 1/2 하면 10만원으로 한 냥은 대략 2만원에 해당할 것 같다. 그런데 계산을 달리하여 한 냥은 5만원 정도라는 썰도 있다. 어쨌던 1 냥 2만원 설을 취하면 한 달 수업료 3냥은 대략 6만원이다. 오늘 날 기준에서 6만원은 별 것 아니지만 ….
으음 한 냥 5만원이라면 무려 15만원이다. 당시 조선의 소득수준이 지금 소말리아 보다 나았을 것 같지 않으니 꽤 센 편 아닐까 ? 노비를 8냥 주고 샀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니… 그러나 2조를 보면 형편 안 되면 알바 자리라도 알선 해 준 듯 하니 돈 없으면 오지 마라 그런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제 3조에 등교는 8시 15분, 오전 수업 11시 30분까지 오후 수업 1시-4시고 제 4조에 그걸 또 종을 쳐서(打鐘) 알린다고 되어 있다. 필자가 읽던 책에 나온 이야기가 바로 이 부분이다. 근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사람을 시간으로 옮아 매는 데 있다. 그러면서 배재학당에서는 한 시간도 아니고 15분 단위로 시분할을 했다 이런 이야기가 나와 필자가 들여다 보게 된 것이다. 전통사회에서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동창이 밝아오고 노고지리 우지지면 재 너머 사래 긴 밭 갈기 시작했을 따름이다. 시간을 쪼개고 싶어도 시계가 없으니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도성(都城)에서야 보신각 종소리로 성문 여닫는 때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시골에서야 그저 해 저물면 들어가 발 닦고 자는 것 아니었겠는가?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근대 이전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중국 무협소설을 보면 일다경(一茶頃)-찻물 끓일 정도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시계가 없는 판에 10분 20분 해 봐야 피차 감을 못 잡을 것이고 일다경 쪽이 서로 확실히 알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아테네에서 길을 물으니 ‘담배 한대 피울 정도’라는 답이 돌아 왔다. 그 놈의 담배야 천천히 피우는 사람도 있겠고 불이 움푹 들어가도록 급히 빨아 대기도 하고 또 시가나 파이프를 물고 세월아 네월아 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 차이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중동지방에서는 아직도 보름달 뜰 때쯤 만나자 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러던 세월에 어느 날 갑자기 시간 분할을 해 대고 그도 모자라 위 학칙처럼 15분 단위로 끊은 일은 획기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계를 찬 사람들이 별로 없었을 테니 그 시간은 종을 쳐서 알리는 방법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진은 1907년 대한의원으로 건립 된 서울대 병원 옛 본관의 시계탑이다. 1900년 초 시계탑은 그냥 모양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근대를 상징했다. 이후 모든 사람은 시간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기왕 배재학칙을 쳐들었으니 조금 더 살펴 본다. 금제(禁制)의 존재는 는 실제의 증거 역사학에서 원칙이라기 보다 요령 중에 ” 금제(禁制)가 존재 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 했다는 증거 다” 라는 것이 있다. 고조선 팔조금법에 살인하자 말라는 조항이 있는 것은 고조선 시대 이미 살인이 있었다는 증거요 구약에 네 이웃을 위해 거짓증거 하지 말라고 쓰여 있는 것은 모세 시대 이미 위증(僞證)이 있었다는 증거다. 살인도 없고 위증도 없는데 그거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왜 하겠는가? 3조 뒷부분 “물러 갈 때는 문란하게 느리거나 뛰고 떠들지 못한다” 배채 초창기 학생 같으면 거의 이승만 박사 정도를 떠 올리겠지만 학생은 어디나 마찬가지로 문란하게 뛰고 떠들기도 했던 모양이다.
학생이 병(病) 핑계로 결석하고 술, 노름에 못 된 말과 음란한 책 읽기는 그 때나 이 때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배재학당 당시 음란한 책이라면 어떤 종류가 있었을까? 학교에서 싸우기도 하고 마음대로 오다 안 오다 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일요일(日曜日)
미션 스쿨 답게 일요일에는 무조건 논 모양이다.
다시 점심을 11시 45분에 마친다 하여 시간 단위도 아니고 15분 단위로 쪼갰다. “식후(食後)에 하인으로 뜰을 쓸고 불을 때는 등의 일” 이때 하인은 한자로 下人 일 텐데 머슴이 아니라 서비스라는 뜻으로 쓰기도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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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룡초부 원문보기 글쓴이: 구룡초부
첫댓글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없는 규칙 학칙 귀한역사공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