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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사랑한 다윗과 예수님
시편 26:8~12
요절:“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계신 곳을 사랑하오니”(시편 26:8)
시편 26편을 지은 다윗은 이 시편에서 자기가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며 행악한 자의 집회에 참석하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그 대신 그는 주의 제단이 있는 주의 집을 사랑하며 주의 집에서 주의 백성의 무리와 함께 여호와를 송축하겠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8절을 함께 다시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그렇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사랑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블레셋이 빼앗긴 후에 법궤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헤맬 때에도, 다윗은 소년 시절에 제사장들이 있는 놉 땅에 자주 들러 하나님께 예배 드렸으며, 사무엘 선지자가 은퇴하고 지내던 사무엘의 고향 라마 나욧에도 자주 들렀습니다. 나중에 사울 왕이 죽고 다윗이 이스라엘 전 민족의 왕이 된 후에는 예루살렘 성을 도읍으로 정한 후에 무엇보다 블레셋에서 돌아와 어딘지 모르는 곳에 있는 법궤를 찾기 위하여 금식까지 하면서 사람을 보내 수소문하였습니다. 그 과정을 기록한 시편 132편 말씀을 보면 다윗의 성전 사랑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시편 132:1~9)
여기서 보면 다윗이 왕에 등극하여 무엇보다 먼저 법궤를 찾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는데, 법궤를 찾을 때까지는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자지도 아니하겠다고 맹세로 서원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법궤를 발견하자 온 백성과 고관들을 이끌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와서 천막 아래에 두었는데, 나중에는 커다란 성전을 지어 올리고 싶어서 나단 선지자에게 자기 뜻을 밝혔다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성전을 만들지 말고 그의 아들에게 성전 건축을 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성전을 자기가 직접 건축하는 소원은 이루지 못하였지만, 다윗은 아들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위하여 생전에 자기의 재산들을 많이 드렸고 성전 건축에 필요한 각종 품목들을 많이 쌓아두었으며, 성전 건축을 위하여 성령의 영감을 받아 성전 건축 설계도를 성령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또한 다윗은 성전에서 찬양하는 찬양대를 조직하였으며 제사장들의 성전 봉사 예법 등을 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그의 성전 사랑이 대단함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다윗의 성전 사랑은 그가 지은 여러 시편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27:4 말씀에 보면 이르기를,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은 제사장도 아니면서도 자기가 성전을 떠나지 않고 그 성전에서 평생 사는 것이 자기 소원이라고 여기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마도 압살롬의 반란 때에 피난 길에 물이 없어 메마르고 황무한 땅, 광활한 유다 광야를 지날 때에 쓴 시로 여겨지는 시편 63편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다윗은 평소에 자기 왕궁 곁에 쳐놓은 법궤의 휘장에 자주 가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찬양하며 기도하며 묵상하곤 하였는데 이제는 그곳을 멀리 떠나 황막한 유다 광야를 지나고 보니, 과거에 자기가 사울 왕을 피하여 이리 저리 광야를 헤매 다니던 시절도 생각이 나면서, 그 때에 자기를 지켜주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그 광야에서 밤을 지나고 아침을 맞아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면서 광야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며 묵상하는 중에 예루살렘 성전 휘장을 생각하면서 그 안에 계신 여호와의 위엄과 영광을 생각하며 주님을 간절히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언제 다시 돌아갈지 모르는 그 성전을 생각하면서,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전혀 장담할 수 없는 그 캄캄한 상황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더 열렬한 간절함이 다윗의 아침 묵상의 생각을 온전히 휘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전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의 진실한 성도들의 마음에 늘 공통적으로 나타나곤 하였던 현상입니다. 시편 84편의 기록자 고라 자손도 이렇게 기록한 바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편 84:1~4)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어린 시절 태어나서 40일이 지나자마자 성전에 올라가서 그 육신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 안겨 정결예식을 하고 첫 아들로서 바쳐지는 제사를 드렸고, 열두 살 때에는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에 절기 예배에 참석했다가 식구들은 다른 친척들과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여행 길에 올랐으나 분주한 틈을 타서 예수님을 놓쳤더니,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곳에 남아 율법의 선생들과 함께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모친이 다음날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왔다가 그를 발견했을 때 말하기를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라고 하였을 때 소년 예수님은 대답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고 하였습니다. 열두 살은 지금 김민재 나이 또래니 주원이보다 한 살 혹은 두 살 위니까 아직 정말 어릴 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의 집 성전을 사랑하신 모습을 우리 주님께서 보이신 것입니다. 훗날 공생애를 시작하여 맨처음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에 그곳 성전 바깥 뜰에서 장사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서 소란스럽게 매매를 하는 광경을 보셨을 때 예수님께서 노끈을 찾아서 채찍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소와 양과 염소를 내쫓으시고 동전 바꾸는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어서 가지고 가라고 내몰아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일은 예수님의 각별한 성전 사랑의 열정을 보여준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은 잡히시는 그 마지막 주간의 유월절 명절에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에도 곧장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다시 한번 성전 정결을 위하여 거칠게 일하신 바 있었으니, 그럴 정도로 예수님은 성전을 각별히 사랑하셨던 분입니다. 실상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 그 자체였으니,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예언한 것이 바로 성전이신 자신의 육체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고 제자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사랑하는 것은 곧 성전의 본체가 되시는 우리 구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의 모형인 지상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사랑하여 성전을 짓기를 열망하며 그 법궤를 안치한 휘장을 늘 사랑하여 그 안에 들어가 앉아 기도하며 예배하기를 힘쓰며 멀리 예루살렘 성을 떠나 유랑할 때에도 늘 성전을 간절히 사모하여 그리워하였으며, 그의 평생 유일한 소원이 늘 성전에서 제사장들처럼 그 안에서 거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었으니,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구주를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여 늘 가까이 하며 성전에 모여 예배하며 동일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찬양하며 교제하는 것을 평생에 가장 기뻐하며 살아갈 줄 믿습니다. 다윗과 같이 평생에 주의 집에 살면서 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주님을 사모하며 찬양하며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바라는 평생의 한 가지 소원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일이 있을까요 성경은 성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귀하고 복된 은혜가 주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들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 영혼을 주님 품에 거두어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시편 26편의 8절과 9절에 이르기를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노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성전을 늘 사랑하여 가까이 하며 그 성전에서 머물며 찬양과 기도를 즐거이 드리는 자는 그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영혼을 하나님께서 그가 계신 천국 집 곧 아버지의 품. 우리 주님의 집으로 인도해들이고 죄인들과 살인자들의 감옥인 지옥 음부에 떨어지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상의 성전은 곧 하늘 성전의 예표요 그림자이기에, 지상 성전을 사랑하는 자의 영혼을 주님께서도 그가 지금 짓고 있는 천국 집으로 인도해들이실 것이 확실합니다.
둘째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 27편 4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여 가까이 하는 자에게는 지상의 환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며 보호해주시고 원수들 머리 위로 높여주셔서 결국 하나님의 장막에서 즐겁게 제사를 드리며 찬송하는 예배자의 삶을 평안히 살도록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 중에 이르시기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요한복음 4:23)
고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세상 가운데 자기에게 마음을 다하고 진리를 구하며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며 그렇게 성령과 진리의 말씀 가운데 예배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전을 사모하여 가까이 하며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을 즐거워할진대 이 땅에 사는 동안 여러 시련과 역경이 있겠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배자들을 자기 성전에서 예배하도록 끝까지 지켜주시고 환난에서 건져주시고 건강도 책임져주시고 모든 환경을 복주셔서 그러한 소원을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로, 성전을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와 영화를 주십니다.
시편 84편의 기록자 고라 자손은 그 시편 10절 이하에서 성령의 영감으로 이렇게 노래한 바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편 84:10~12)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법궤를 다들 모시기를 싫어하고 겁을 낼 때에 오벧에돔이라는 레위인은 그 법궤를 자기 집에 모시고 정성껏 모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석달 동안 법궤가 그의 집에 있는 동안에 온 이스라엘이 보고 소문을 듣고 다들 놀라워하며 부러워할 정도로 그의 집안 전체가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그 집안 전체에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그의 자녀들이 존귀해지고 크게 번성하여 유력해지는 각종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 법궤를 모시려다가 웃사가 법궤를 만지는 통에 죽어서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법궤 모시기를 포기했던 다윗이 그 축복을 보고 사모하여 다시금 율법을 잘 살피고 준수하여 법궤를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모셔 올리는 일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사랑하며 그 성전을 지어드리고자 열망하여 그 꿈을 나단 선지자에게 말씀 드렸을 때에,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여 다윗의 집 곧 다윗의 가문을 크게 복을 주시어 영원히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성전을 사랑하고 주님을 잘 섬김으로써 해와 방패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은혜와 영화와 풍성한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찬송대장이자 선지자 아삽이 쓴 시편 73편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실족할 뻔한 자신의 영적 혼란과 깨달음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보니, 악인들이 악을 행하고 교만하게 행하나 도리어 평안하고 재물이 늘어가고 범사가 잘 되어서, 그들은 하나님까지도 무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나 도리어 종일 재난도 당하고 징계를 당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영적 혼란과 신앙의 회의에 사로잡혀 고민 중에 있으면서 해답을 찾지 못해서 방황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해답을 찾은 계기는 바로 성전에 들어와 기도하며 묵상하는 중에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삽의 그 영적 깨달음의 계기가 된 경험에 대하여 시편 73:16 이하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라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시편 73:16~19)
여기서 이 시인은 현실과 신앙의 모순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진실성 여부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는데,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하며 묵상하는 중에 순식간에 깊은 확신 속에서 번갯불처럼 깨달음과 확신이 그의 마음을 때렸으니, 곧 그것은 그 악인들은 사실은 지극히 미끄러운 곳에 서 있는 자와 같아서 순식간에 자빠졌을 때 크게 넘어져서 영원한 파멸에 떨어지는데 돌이킬 새도 없이 갑자기 퐝폐되고 놀랄 만큼 전멸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왕가, 바아사 왕가, 아합 왕가가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로마 제국을 끼고 한 때 구름떼처럼 번성하던 헤롯 왕가도 1세기도 못 지나 지상에서 완전히 절멸당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악인들이었는데 회개할 기회도 없이 갑자기 멸망하고 말았으니, 그들이 악행 중에 형통한 것은 도리어 그들에게 더 완전한 저주와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이 시인 아삽은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갑작스럽게 그의 뇌리 속에 섬광처럼 분명한 깨달음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많은 부조리와 혼돈이 있기에 어떤 것이 바른 삶의 길인지 알지 못하고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정말 잘살고 행복한 삶의 길인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선택의 기로에서 어떻게 결정해야 참으로 지혜롭고 후회 없고 장래에 참 잘한 결정이었노라고 감사할 수 있는가 잘 몰라서 마음의 고통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이런 저런 상담도 하고 검색도 해보고 혼자 생각도 해보지만 아무 것도 분명해지지 않고 생각이 더 얽히고 판단이 안개처럼 더 흐릿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고 찬양하며 기도하며 묵상하며 우리의 고민을 털어놓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섬광처럼 깨달음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분명한 사리 판단을 왜 이렇게 몰랐을까 도리어 이상하게 여길 만큼 선명한 생각이 마음에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성전을 사랑하여 들고 나는 주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다섯째로, 더 풍부하고 분명한 영적 계시가 주어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누가 복음에 보면, 안나라는 자매는 결혼한 지 칠 년만에 남편이 죽었습니다. 젊은 시절 남편을 잃고 젊은 과부가 된 그녀는 많은 생각이 오고 갔었겠지만 기도하는 중에 자기 생애를 두고 한 가지 굳은 결심을 합니다. 그 결심은 결혼 대신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평생에 기도하며 살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남편 삼고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며 살겠다고 각오한 안나는 그 결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면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하였을 때에 깊은 영적 교제가 주어지면서 그녀는 여선지자로 하나님께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서 40일만에 결례식을 위하여 그 육신의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성전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안나의 눈을 열어 주시고 마음에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 젊은이 부부의 품에 안긴 어린 아이가 바로 구약 시대 오랫동안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된 이스라엘의 소망이요 만민의 구주로 세상에 오실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성전을 사랑한 사람에게는 이처럼 하나님을 더 알게 되는 복이 임하고, 계시가 더 풍부해지고 선명해지는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더 분명히 알아가는 영적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 이하에 나오는 이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렇습니다. 지상에서도 주의 집에 들며 나는 주의 백성들이 때마다 새로운 영적인 깨달음과 계시적 통찰력이 주어질 것이며, 천국 집에서도 더욱 주님을 알아가고 더 놀랍고 복된 영적인 지식과 지혜가 더해지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이 은혜가 이 땅의 하나님의 집에 성실하게 들고 나는 주의 백성에게 더해질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집을 사랑하며 그 집을 즐거이 들며 나는 자들에게 풍성한 은혜가 주어집니다.
첫째로, 우리 영혼을 주님 품에 거두어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둘째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셋째로, 성전을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와 영화를 주십니다.
넷째로,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다섯째로, 더 풍부하고 분명한 영적 계시가 주어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의 집에 평생 살면서 하나님을 앙망하며 사는 것을 가장 큰 소원으로 알고 살았던 다윗과 선지자들과 우리 구주처럼 우리들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항상 성전을 사랑하며 가까이 하며 부지런히 성전 중심으로 살아갑시다. 그리할진대 우리 영혼과 삶에 신령한 복과 이 땅에 은혜와 영광이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넘치게 부어질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