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오늘의시조문학상 수상작)
어떤 임종/ 이송희
두 귀를 틀어막은 겨울이 누워있다
방안을 떠도는 불안한 눈망울
침대 위 검은 울음이
낯선 이름을 부른다
창밖에선 불, 규칙적인 말들이 우거졌다
유언이 되지 못한 채
의미 없이 반복된,
입 안에 담고 있는 말을
꺼내려는 손가락
하얗게 저물어 가는 당신 너머의 당신들
침묵은 말이 되고 발이 되어 가는지
누구도 읽지 못한 당신을
그만 놓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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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김영재
강화문화원 미술관
칠보전시회 포스터 앞
걷기 힘든 할머니
길을 가다 멈춘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곁에 있어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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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길에 대한 고착/ 서숙희
아직도 나는 네가 길이라고 생각해
가려했으나 끝내 갈 수 없었던 그 길
눈처럼 녹아져버린, 종이처럼 구겨져버린
봐주길
불러주길
다가오길
안아주길
어느 길 하나도 길이 되진 못했으나
아직도 길이라 생각해, 너라는 불가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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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밤/ 서연정
느닷없이 펼쳐진 그해* 봄을 보았나
뒤엉키는 목소리 뜨겁게 귀가 울어
밤새워 희망을 깁네 되작되작 새벽빛
*그해: 1980년(책자에는 수록되지 않음. 원고 발송 이후 삽입한 주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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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침대처럼/ 서정화
정말로 시끄럽죠 날아가는 침대 밖은
구름 같은 머릿속 울렁거림이 잦아들고 현기증 나던
멀미도 멎었어요. 지형을 굽어보다 한없이 깊어지는
하늘 시야가 확장했지요. 세상에 온 시야는 회전하면
변화하나요? 정말로 사람들은 시위에 휩싸였나 봐요.
건너편 하늘과 통하는 열기구에 묶인 채 이동하는 침
대 말이죠. 사람들의 행진을 도울 춧불을 준비해야겠
어요. 시위는 세상을 들어 올리고 거리를 확장해서 피
하기가 어렵지만, 이제 막 버스가 통과해 가네요.아늑
한 꽃잠을 자고 단꿈을꾸겠어요? 더 이상 외치지 않
는 사람들은 위험해요. 굉장히 시끄럽지만 시위가 무
대를 확장시킬 때
우리가 동시적으로 보면서 보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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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건너는 순간/ 우은숙
사람과 사람 사이 그 행간에 걸터앉아
간이역 의자 되어 굳은살로 기다린다
짧게 핀 너와 나의 숨
한순간 스쳐간다
기억이 오독되고 슬픔이 고통될 때
푸른빛 악수를 당신에게 보냈지만
끝끝내 닿지 않는 손
허공에서 흩어진다
눈금 뺀 저울로 마음 무게 재는 걸까
난독의 눈빛 싣고 기차가 도착한다
순간이 순간을 건너
헛것 되는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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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보다 배꼽이 크다/ 이기라
학력 경시 수상 저서
한 인생의 파노라마
약력이란 이름으로
따라붙는 꼬리표
단 석 줄
작품 발표에
깨알 글씨 약력 반 쪽(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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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이복현
일 획을 긋는 동안 동천에 구름 솟아
또 일 획을 내리칠 때 천둥이 울어 번쩍!
눈부신 일필휘지로 휘갈겨 쓴 빛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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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이은정
다 저녁 붉어서 시린 하루가 주저앉듯
우르르 달려온 알갱이들 꽃이 된다
뒷마당 그늘 속으로 빨려든 공기 흐름
보이는 것 너머를 둥글게 말고 있다
발밑에 바스락거리는 울음소리 따라
하얀색 국화꽃 다발 희끗희끗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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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끗발은 없어도/ 정수자
세상 탓 많아져서 탈이 자꾸 늘어지나
탈이 더 잦아져서 탓이 까탈 껴드나
때아닌 노염에 치여 닿는 대로 노엽다고
투덜 터덜 오다가다 복지관을 다시 보면
피박쯤 독밖쯤은 얼쑤 넘는 판도 있데
파투야 노염 따위야 개나 물려 보낸 게야
하고 보면 탓도 탈도 다 고린 마음의 짓
박카스도 못 따고 느티 품에 기대지만
천지간 끗발은 없어도 가을은 또 맞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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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신은 코스모스/ 최성아
아파트 만든다며 이웃 다 떠난 어귀
남은 살림살이에 가을이 터 내렸다
햇살에 공짜로 빌린 1년짜리 보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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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들 처녀/ 강대선
강이 넘쳐 들판을 삽시에 점령할 때
처녀의 몸이 제물 되어 둑이 될 때
물빛은 핏빛으로 들어
울면서 흐른다지
우시장이 열리던 사통팔달 남평 오일장
고추, 파 감자 팔러 오가던 드들 처녀
강둑에 코스모스 피어
바람은 드들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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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말, 고인돌/ 고경자
굳게 다문 저 입들이 차마 말하지 못해
부풀었던 시간들은 압축되어 널어졌다
바람도 함께 지키는 유언들이 말라간다
흘러가는 말들이 꽃으로 피어나면
날개는 무게를 버리고 가벼워지고
필사한 모든 생들이 마지막 부호가 된다
문자가 되지 못해 입 안에 무무르다
맨발로 죽음을 맞으러 나서는 길
시렁에 푸른 영혼들, 새 시대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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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공화순
고립이라 읽었던 널 다정하게 바라보면
마침표가 아니라 느낌표로 위로한다
다가와 어깨동무하듯
느낌표 하나, 풍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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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 김나비
설익은 봄 하늘이 미간을 찌푸려요
달콤하게 익기엔 햇살이 서툰 계절
눈물은 잘게 오려서 주머니에 넣어요
물러터져 깨지고 밟히는 열매보다
저 홀로 떨어져 뒹구는 게 깔끔한 법
시간을 입 안에 넣고 천천히 씹어봐요
길 위에 빗물이 알몸으로 투신하고
감꽃이 하얗게 지며 흉터처럼 박히면
울대에 떫은 기억이 살며시 번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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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 김석이
나무에 붙어있는 철 지난 매미 껍질
울음이 빠져나간 투명한 몸을 본다
아직도 놓지 못한 삶, 무늬로만 남아 있는
밤이든 새벽이든 가릴 틈이 없었다
절규로 들먹이며 붙잡았던 순간들
소중한 날들이었다 죽을힘을 다했으니
허물도 많았지만 허울로도 보였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끈이었다
귓전에 살아 숨쉬는 쟁쟁하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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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김석인
팔다리 마디마디 바람이 인답니다
피 주고 살도 주고 뼈까지 다 내주고
무엇을 더 주고 싶은지
서리 이고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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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무음(無音)에 들다/ 김주경
일생이 곡비였던 울음의 저 고갱이
기척도 마다하고 무음 속에 들었다
계절이 들고 난 길목에
징검돌을 놓은 주검
열흘쯤 절절 끓인 구애의 문장들은
왔던 길 되돌려서 어둠으로 봉인하고
둥지 튼 참나무 옹이에
묘비명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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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 두 마리아
땡볕을 지나가는 땀에 젖은 예초기에게
들꽃들 안녕을 차마 부탁 못 했는데
꽃 둘레 비켜 간 마음 내 마음까지 읽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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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즈(nouse)/ 문제완
환청이 심해지자 난청이 뚜렷하다
빗물 젖은 목소리가 멀미처럼 어지럽다.
고막 속, 소리는 없고 입모양이 찍혔다
내 귀가 어두워져 신기술을 빌렸다
소리 모아 키우니 잡소리도 증폭되네
보청기, 시끄럽구나 차라리 귀 닫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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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로현상/ 박화남
나는 차가워지고 너는 뜨거워져서
우리의 맞댄 등에 침묵이 맺혀있다
말수가 새는 줄 몰라
눅눅하게 젖었다
습기가 차오르는 표정을 버려두고
뒷말이 자꾸 겹쳐 함부로 뜯겨졌다
등 한번 돌려세우면
메워질 실금인데
가느다란 어깨로 건너가는 나의 온도
얼룩을 헤아리며 서로에게 번져서
눈빛이 단단해진다
돋아나는 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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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양희영
가을걷이 끝났으니 밭타령 해 볼까나
단무지 무밭에 줄줄이 차 대놓고 큰 무 작은 무 비틀어진 무 외틀어진
무 잘린 무 세발 무 이리저리 엎어보고 무청은 덤, 트렁크 넘쳐나도 눈길
은 밭고랑에 내 친구도 네 친구도 해장국집 사장님도 갱재를 살린다며
키득키득 몇 날 며칠 발품 팔며 밭돌뱅이
사방이 내 밭이어라 거침없이 납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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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초상(肖像)/ 유헌
철길 끝 소실점을
종일 찾아다니다
간이역 플랫폼을
총총히 빠져나온
귀갓길 어느 가장의
무채색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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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 몽돌/ 정경화
파도가 지나간 길 그대로 안고 산다는
그대의 말을 주워 주머니에 넣어두고
가슴에 바람 치는 날
꺼내 듣고 싶었는데
다시 가 그 자리에 놓아두고 돌아왔어요
덜컹대는 창문 열고 그대 이름 부를 때
아무 말 묻지도 말고
눈길로만 말해 줘요
*제주특별자치도에 있는 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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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시차/ 정애경
웃어야 웃어 주는
그대 시선 휑하다
웃어도 슬몃 웃는
그대 미소 썰렁하다
웃음도 한 박자 느린
그대의 시차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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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새/ 조경선
언제부터 새소리가
네 소리로 들리는 건
날씨 탓이 아니라 밤을 타는 내 탓인데
떠오른 얼굴 하나가 그늘 털고 날아온다
휘파람 새소리에
살아나는 서쪽 하늘
내 안에 익명으로 부르고 싶은 이름
그곳에 익사한 여름 밤늦도록 박혀 있다
끝없이 새겨지는
귀신새의 발자국
아무런 흔적 없이 사람을 불러낸다
이맘때 소리만 주고 떠나가는 그때 그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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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묵상/ 최성진
나무와 나무 사이에
기다림을 걸어 놓고
거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쳐 놓은 그물에 비해 수확은 그저 그래
배부르면 좋겠지만 없이 살아도 그만
햇살 한 점 바람 한 줌
받아먹고 삽니다
읽다 만 경전을 덮고
하늘을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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