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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단풍 드는 날
글 : 도 종환 (진길 아우구스티노)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간(放下看)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 방하간(放下看) : 선종에서, 일체의 집착을 버리고 해탈하여 세상을 바라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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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기도는 성령을 지피는 일 <제1부>
윤 클레멘트(양호) 신부님
<전주교구청 사무처장/홍보국장>
1> 기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
“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 하십시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1테살 5,17-19)”
“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께서 당신 부르심의 가치를 여러분에게 적합하게 해주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2테살 1,11)
“ 나는 나의 기도 안에서 여러분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로마 1,9) ”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한마디의 말로 표현해 본다면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들이고, 기도하는 사람은 신앙인입니다.’
그렇게들 기도하시면서 살아가시지요?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렇게 기도의 말로 인사하곤 합니다.
“찬미예수… 기도해 주십시오. 기도를 부탁합니다.
당신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 안에서 만나겠습니다.
기도 중에 뵙겠습니다. 기도 중에 함께 합니다. 그렇게들 살아가시지요? 우리는 어떠한 이유들로 위와 같은 기도의 말들을, 기도의 언어들을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혹시라도 기도가 우리에게 짐, 부담, 무게가 되고 있지는 않을까요? 때로는 의무감, 책임감, 강박감으로 드리는 것은 아닐까요? 저의 어린 시절에는 거의 기도를 의무감, 중압감으로 드리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한 사제로 살고 있는 지금에는 더욱이나 그 어린 시절의 의무적인 기도들도 지금 저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비록 의무와 책임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은 그 모든 기도조차도 다 듣고 계시며, 들어주시기까지 하신다. … 기도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기도한다는 생각만 가지고도, 기도의 마음과 의지만 가지면 이미 그때부터 기도는 시작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2> 기도의 주체는 우리가 아닌 하느님
기도의 주체는 우리 자신들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기도를 듣고 받으며 들어주시는 분은 당신의 영인 성령으로 날마다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리고, 하느님은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헨리 뉴우웬(1932~1996, 심리 영성작가. 그는 참으로 많은 영성저술을 하였는데, 특히‘돌아온 아들’, ‘제네시 일기’등은 매우 유명하다.) 은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헨리 누우웬의 작품들과 함께 기도생활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기도 없는 영성생활은 그리스도 없는 복음과 같습니다. 만일 기도가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성이라고 이해한다면, 참으로 그것은 또한 다른 모든 이들과의 만남에도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성, 이웃과의 새로운 만남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Reaching out)
진정한 기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작은 범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두루 껴안습니다.(Prayer embraces the World)기도는 나의 의식적인 생활과 무의식적인 생활 사이의 가교(다리)입니다. 기도는 나의 마음과 가슴, 열정, 머리, 배와의 연결입니다. 기도는 나의 존재의 모든 구석들을 꿰뚫으시는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영이, 하느님의 진리가, 하느님의 사랑이 길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존재, 일치, 내적인 평화의 신적 도구입니다. (Sabbatical journey)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하느님의 존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하느님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Clowing in Rome)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믿고 바라며 사랑하는 하느님의 영과 현존 안에서 살고 머무르는 것이다…”
곧 나의 정신이나 마음이 아닌 하느님의 현존이, 하느님의 영이, 하느님의 진리가, 하느님의 은총이 나를 사로잡도록 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언제나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우리는 가끔씩 우리 자신들을 발견합니다. 우리 자신들의 인간의 조건과 이름으로 바쁜 일상과 삶을 살아가다 보면, 기도의 맛과 기쁨을 잊고서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을… 어느 사이에 하느님의 정신과 뜻보다는, 나의 계획과 생각에 따라서 존재하고 행동하는 나의 모습과 삶을 쉽게 발견하곤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기쁨이나 믿음과 기도의 의미도 쉽게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다시 마음과 귀를 기울입니다.
“ 늘 기도하십시오. 감사하고 성령의 불을 끄지 않은 채…”
삶과 믿음의 길에서, 생애와 신앙의 길에서 때때로 이따금씩 지치기도 하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희망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짐은 가볍다.”(마태 12,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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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1주일
2013. 11. 3
루카 19, 1~10
♠ 복음 연구
* 1~2절 :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 들어가시다(*디에르코마이) 예루살렘을 향한 다시 말해서
고난을 향한 예수님의 굳은 의지를 보다 확연히 들어내시고자 한듯하다. 자캐오라는 이름의 이미는 청결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다. 당시 세관장은 로마의 막대한 권력을 등에 업은 자로서 ‘부자였고 허가 낸 도둑이다.’라고 알려져 있다. 유대인사회에서는 죄인 취급받았다.
* 3~4절 :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 그는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군중이 많아서n 그리고 키가 작기에 그분께 다가설 수는 없었다. 앞질러 달려가는 자캐오의 의지를 나타낸다. 그가 돌무화과 나무에 오른 것은 이러한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함일 것이다.
* 5~7절 :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 예수님의 인격적인 초대는 단순한 부름에 그치지 아니하고 자캐오의 집에 함께 머무르는 것과 같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의 인격적인 초대에 즉각적인 응답은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 투덜거렸다는 말은 인간적인 나약함을 보여주는데 유태인의 선민의식과 교만 형식주의이며 남을 시기하려는 심리 죄인에 불과하다고 생각되는 그가 예수님의 관심을 받자 시기심이 발동하는 것 같다.
* 8절 : 제 재산의 반을 - 이는 예수님이 가난한 이들에게 전 재산을 팔아 나눠주라고 하자, 돌아갔던 부자청년의 얘기와는 대조되는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 이는 자캐오가 부당하게 갈취한 사실이 없음으로 이해 될 수가 있다.
* 9~10절 : 구원하러 왔다. - 자캐오 같은 죄인을 용서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그 모든 행위는 땅위의 평화를 위한 사랑의 치유행위라 할 수가 있고,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과제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 * 주제발표를 위한 참고자료 >1-10절은 루카에만 있는 특수사료이다. 이 단락의 순서를 살펴보면 바리사이와 세관원의
예화 바로 다음에 자캐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루카가 채집한 특수사료가 구전이었든 문헌이었든 자캐오의 이야기는 이 예화에 나오는 세관원의 회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루카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채집, 수록하는 기회에 8, 10절을 가필했을 가능성이 크다.
♠ 복음 요약 : 기쁨의 결단...
종종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새로운 생활을 하도록 촉구 받습니다. 변화와 결단은 한 개인의
다짐만으로는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기쁨, 말씀을 들은 기쁨이 있을 때
자캐오와 같은 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캐오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머지 반은 배상금으로 사용하겠다는 전폭적인 회심과
결단은 그 기쁨의 표현입니다. 자캐오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얻게 되었으며 그로써 새 생활의 결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은 죄를 살피시지 않으시고 자캐오의 새 사람됨을 보시어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르시며 믿음의 행실을 당신의 능력으로 완성하셨습니다.
바로 이분이 당신의 부르심에 우리를 적합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 대화 방향 :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2테살 2,2)참으로 삶의 많은 부분에서 이 말씀이 와 닿습니다. 얼마 전 10여년 만에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처음엔 반갑고 좋았지만, 자리가 새벽까지 이어지면서 좋지 않은 모습들도 보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의 행동 때문에 모임에 나왔던 친구들은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기다려보았습니다. 며칠이 지나 전화가 왔고 그 아이는 그 잘못에 대해서는 아니었지만 많이 창피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에 대해 마음을 닫지 않고 있었던 것에 내심 기뻤답니다. 어찌 보면 우리들은 매일 흔들리다가 멈추는 인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힘든 상황에 처하면 이내 곧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두려움과 걱정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이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을 다들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① 우리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거나 두렵기까지 합니다. 때로는 아주 좋은 피정이나 묵상프로그램에서 좋은 몫을 얻었는데 그 안에서 아주 사소한 일로 화가 난일이 있는지요?
② 아니면 그 반대로, 세상에 나오는 일에 두려움을 느낀 일이 있는지요? 구체적으로 자신의 얘기를 나눠 봅시다...
♠ 참고 문헌 : ▪ 200주년기념 성서주해서 ▪ 보득솔 (카톨릭청년성서모임 묵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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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
2013. 11. 10
루카 20, 27~38
♠ 복음 연구
* 27절 :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가 예수님께 다가와 따진다.
* 28절 : 그런데 그는 치밀하게 율법에 적혀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 29~33절 : 그러면서 그들이 궁리한 끝에 만든 질문을 제시한다.
* 34~37절 : 그들의 속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는 명쾌하게 대답해 주신다.
* 38절 : 삶과 죽음은 인간의 눈에만 보이는 형식이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한 번 주신 생명은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받아 들일 수 있다. 믿음이 잇는 사람만이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다.
♠ 복음 요약 : 사람은 죽음과 죽음 후에 일을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천국은 반드시 존재한다. 최근에 나온 “벼락을 맞았습니다” 저자는 이 시대 우리에게 산 증인이다. 오기순 신부님은 콜베 신부님 추천으로 로마 그레고리안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그분이 쓴 책 “못 잊을 사연들”을 보면, 그분이 신학대학생 시절 기숙사 옆에는 아주 오래된 성 요셉 수녀원이 있었는데, 기숙생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녀원에 신세를 지고 살았습니다.
[ 기숙사 신학생들의 세탁을 무료로 해주고, 학생들이 아플 때는 온갖 정성과 애정을 다해 간호해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수녀원에 착하고 겸손하고 인자한 아순타수녀님이 죽었습니다. 신학생들은 지하실에 안치된 수녀님 옆에서 연도를 했으며 수녀님들도 밤늦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언제든지 평화롭고 행복하고 기쁜 얼굴이었습니다. 죽은 지 3일이 애도 중에 지났고 장례식날 자정이 지날 무렵 모두가 잠들었고 그 시체 옆에서 나란히 장궤하고 기도를 하던 두 수녀가 똑같이 “예수 마리아!” 하고 비명을 질렀다. 죽은 수녀가 깜짝 놀랐다는 듯이 별안간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습니다. 그로부터 수녀원은 난리가 났습니다. 아순타 수녀님이 일어나 보니 옆에 두 수녀님이 쓰러져 있어서 “마리안나 수녀! 이게 웬 일이요, 어서 일어나요.” 하자 정신이 좀 들었던 마리안나 수녀님은 “예수 마리아! 나 죽네, 사람 살려!”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고 까무러치고 말았습니다. 아순타 수녀는 자기가 왜 지하실에 있는지 이상해서 3층에 있는 원장수녀님의 방문을 두들겼습니다. 원장 수녀님도 아순타 수녀님을 보고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원장 수녀님이 졸도했다고 자기가 자던 공동 침실로 달려가서 다른 수녀들을 깨웠습니다.. 비명소리를 듣고 일어난 수녀님들도 아순타 수녀님이 다가오자 놀라서 쓰려졌습니다. 아순타 수녀님은 기숙사에 황급히 전화를 걸었습니다. 사감 신부님은 자는 신학생 몇 명을 깨워 가지고 달려갔습니다. 나도 그 축에 끼었습니다. 사감 신부님이 벨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덜컥 열리며 아순타 수녀님이 머리를 쑥 내밀며 “어서 오셔요. 큰 일 났습니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감 신부님은 뒤로 물러서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아침 10시에 아순타 수녀님의 장례미사를 지내기로 한 신부님이 놀랜 것은 당연하지요. 항상 까불까불 하는 프랑스 학생이 성큼 앞으로 나서며 “뭐요?” 하다가 덜꺽 주저앉으며 “예수 마리아! “소리를 지르며 설설 기어 달아났습니다. 그의 바로 뒤에 서있던 나도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으나, 아주 독한 마음을 먹고 그 수녀 앞에 다가서며 “뭐요?” 했습니다. “왜들 이래요” 하며 수녀님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음성이 아순타 수녀님의 음성 같아서 바싹 다가서며 얼굴을 보니, 틀림없이 아순타 수녀님이었어요.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학생 큰일 났어요, 원장 수녀님도 또 많은 자매들이 침실에 지하실에 복도에 쓰러졌어요.,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중간 생략>........
죽었다가 4일 만에 되살아난 아순타 수녀님은 우리 기숙사에서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어디 갔다 왔을까? 전국을 다녀왔나? 연옥을 다녀왔나? 수녀원에서도 호기심이 발동하여 아순타 수녀님에게 질문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수녀님은 많은 질문을 받고서도 말없이 미소를 띠고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원장 수녀님을 만나러 수녀원에 갔는데 아순타 수녀님이 문 열어주려고 나왔습니다. 수녀님이 응접실로 음료수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때 나는 유도심문으로 그 수녀님이 죽은 후 4일간 어떻게 어디서 지냈는지를 알아 내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수녀님이 따라놓은 글라스를 번쩍 들어 허풍을 떨며 단숨에 허겁지겁 물을 마시면서 “하마터면 목말라 죽을 뻔 했네. 아이 이젠 천국 간 것 같다. 수녀님 고마워요.”하며 수녀님의 얼굴을 살피니 내가 허겁지겁 들이키는 꼴이 우스웠는지, 맛있게 마시는 것이 좋아서 그런지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보고 “천국에 가셨나”하며 의아스러운 눈으로 쳐다봅니다. 나는 “하도 좋아서 그렇지요, 수녀님은 천국에 가보셨나요? 수녀님도 못 가보시고--- 천국은 무척 좋은 곳이라고 하던데요?”하고 응수했습니다. 그 수녀는 말없이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나는 속으로 “옳다, 내 유도신문에 걸려들었다” 생각하며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 우리 사람들의 말로 어떻다고 표현할 수 있나요, 세상에는 천국에 있는 것에 비슷한 것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 수녀는 이 말을 듣자, 눈을 크게 뜨고 “그래요” 하며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어쩌면 그렇게 꼭 집어냈나...” 하는 표정으로 놀래는 기색이었습니다. 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천국 3층까지 올라가봤다고 했는데 이렇다고 사람의 글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했거든요.” 이 말을 듣자 더욱 놀라고 감탄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요, 보기는 했으나 어떻다고 말을 할 수가 없는데, 수녀들은 어떠냐고 자꾸 물어보니 대답할 수는 없고 답답해 죽겠어요.” 자기가 본 것을 말로 표현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지 두 손으로 가슴을 안고 애타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그 얼굴에는 황홀한 그림자가 번져갑니다. 나는 그 수녀님의 표정으로 수녀가 천국도 하느님도 보기는 확실히 봤구나. 그래서 본 것을 어떻다고 표현을 못하는구나 생각하며 시침을 뚝 떼고 “수녀님, 세상이 귀찮아 어서 천국에만 가고 싶어요, 세상에 살면 자꾸 죄만 짓고 세상사는 것이 무서워요”하며 애원하는 표정을 짓자 나를 동정이나 하는 듯이”그래요, 이 세상에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어서 가고만 싶어요, 그래도 내 뜻대로는 안 되요, 하느님이 부르셔야 가지요”하며 그날만 고대하는 듯이 천장을 올려다봅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황홀하기만 합니다. 수녀님을 바라다보는 나 자신도 도취되리만큼 황홀했어요. “수녀님, 수녀님은 멀지 않아 천국에 가실 거예요, 그러나 그때까지 참으시기 무척 어려울 거예요” 수녀는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떡여도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희망이 넘쳐흘렀습니다. 나는 속으로 “이 수녀님이 오래지 않아 진짜로 죽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이란 그 수녀에게 무서운 것도 아니고, 지겨운 것도 아니고,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고, 어서 죽기만을 원하는 죽음이라 생각하며 나도 그렇게 죽었으면 하고 남몰래 욕심을 냈어요. 죽었다가 4일 만에 살아 난 아순타 수녀님과 이런 대화를 나눈 지 꼭 한 주일이 되는 날 아침입니다. 그 수녀원에 미사를 드리러 갔던 신부님이 식당에 들어서며, 아순타 수녀님이 이번에는 진짜로 죽었다고 하면서도 놀래는 기색이나 슬픈 기색이 없이 싱글벙글 웃었습니다. 우리 모두 식사하다 말고 아연 실색해서 말없이 그 신부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신부님은 희색이 만연해서 식당 한 가운데 서서 “내 미사에 영성체를 하고 자기 자리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한 채 하늘을 우러러 보는 자세로 죽었어요. 지금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어요. 우리는 말없이 수녀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나는 강의가 있어도 학교에 가지 않고 다른 신학생들과 함께 수녀원으로 갔습니다. 과연 수녀님들이 둘러싼 한 가운데 신부님의 말대로 아순타 수녀님은 장궤한 자세로 두 손을 합장한 채 머리를 뒤로 제치고 시선을 한곳에 꽂은 채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을 창백하지도 않고 불그레하고 아름답고 기특하기만 했습니다. 그 어떤 수녀님도 슬픔도 두려움도 없이 그 죽은 수녀님을 부러워하며 기도를 하지 않고 넋을 잃은 듯이 바라보고만 있었어요.” 나도 가까이 가서 그 아순타 수녀님을 자세히 봤습니다. 누가 봐도 죽었다고는 할 수 없으리만큼 살아서 하느님께 뜨거운 기도를 올리는 것 같이 보였어요. 나는 바로 일주일전에 저분과 나누던 대화를 생각하니, 확실히 죽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허전하고 죽지 않았으며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놀랍고도 아름다웠던 사연을 회상할 때마다 그 아순타 수녀님의 죽음을 부러워하고 탐을 냅니다. 지금도 그 수녀님을 생각할 때마다 후회 막심합니다. 그 수녀님과 마지막 대화를 나눌 때 “수녀님! 천국에 먼저 가시면 나를 잊지 말고 하느님께 빌어 주세요...” 하는 부탁을 빼놓은 것이 못내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 대화 방향 : 잠시 침묵하며 천국에 대해 묵상하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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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일 (평신도 주일)
2013. 11. 17
루카 21, 5~19
♠ 복음 연구
* 5~6절 : 대 해로데 왕은 바빌론인들이 파괴한 옛 솔로몬의 성전 터 위에 유다인들이 기원전 515년에 재건한 제2의 성전을 기원전 19년에 두 배로 더 웅장하게 확장하기 시작했다. 성전 개축작업이 46년 동안 계속되고 있을 때,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고하셨다. 예수님의 청중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 당시 계속 확장되고 있는 성전의 아름다운 장식에 감격하고 있었다.
* 7~8절 : 제자들은 언제 성전이 파괴되고 뒤따라오는 사건이 일어나며 그 표징이 무엇인지 예수께 물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신 뒤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 거짓 예언자들이 당신의 이름을 도용하고 가까운 시일 안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세상종말이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이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 9~10절 : 예수께서는 세상종말에 앞서서 전쟁과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하셨다.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혼란이 반드시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이르셨는데, 이 당위성은 이 혼란이 세상종말의 완성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속함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혼란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세상종말이 닥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 11절 : 예수님은 세상종말에 앞서 큰 지진, 전염병, 기근이 발생하고 하늘에서는 두려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고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가공할 현상들과 표징들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심판으로 세상종말이 시작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르셨다.
* 12~15절 : 예수께서는 세상종말이 오기전에 제자들이 박해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유다인들에게 박해를 받아 회당에 넘겨지고, 투옥되고, 박해를 받을 것이다. 이러한 박해는 예수께 대한 충성과 그분의 부활을 증언하는 좋은 기회이다. 예수께서는 원수들의 박해를 이겨낼 힘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자기를 변호하는 연습을 하지 말라고 이르셨다. 효과적으로 자기를 변호 할 수 있는 능력인 언변과 지혜를 주실 것이다.
* 16~19절 : 예수님은 몇몇 제자들의 부모와 가족과 친구들의 박해를 막아주지는 않으신다. 제자들은 예수께 대한 믿음을 배척하는 그들의 반대에도 그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증언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박해와 순교를 당하더라도 궁극적 파멸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원수들이 비록 제자들에게 부상을 입히고 목숨을 빼앗는다 하더라도 죽은 뒤의 영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 복음 요약 : 로마제국 점령군에 의해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 멸망에 대한 예고이다. 거짓 그리스도가 출현하고 종말을 선포하며 사람들을 현혹할 것이다. 그리고 전쟁 등으로 세상의 질서가 혼란해질 것이나 두려워 말라고 주님께서 당부하신다. 말씀대로, 실제로 사도들을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되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기회에서든 복음을 선포하고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 건설을 실현하여야 한다. 박해자에게 항변할 지혜와 언변을 주님께서 주실 것이기에 미리 염려할 것 없다. 하느님 나라는 종말, 즉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성될 것이다...
♠ 대화 방향 : ① 신앙생활을 못하게 하는 요소는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심이다. 내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② 돈만 있으면 못 할 것이 없다는 사고방식 때문에 돈과 향락이 우리에게 사이비 ‘구세주’가 되는 것 같다. 나에게는 무엇이 사이비 ‘구세주’일까 생각해 봅시다.
③ 나는 복음을 어느 때 증언하는가? 능력없다고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지 반성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말씀의 등불(가톨릭 신문사) ▪ 말씀의 두레박(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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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왕 대축일 (성서주간)
2013. 11. 24
루카 23, 35-43
♠ 복음 연구
* 35절 : 사람들(하느님의 백성)과 그들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어떤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거기에 서 있었다. 그들은 쳐다보았다. 이들은 성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였던 사람들이었으나 예수님의 재판 때에는 아무런 적극적인 역할도 하지 못하였다.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십자가 아래에 서서, 보고 체험한 것을 깨달을 능력이 없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신앙에 대한 커다란 도전으로서, 끊임없이 새롭게 다가오는 유혹들 가운데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하나의 도전이다. 십자가에 달린 이 사람이 만약 자기 자신을 살리지 못한다면, 구속자, 메시아일 수 있을까?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멸시함으로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자처하였다. 예수님의 힘이 예수님의 무력함 가운데서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모순은 성서에 비추어서만 이해될 수가 있었다.
* 36-38절 : 로마 군인들 또한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갈증을 느끼실 때 신 포도주를 권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환난을 당하실 때에 예수님을 괴롭혔다. 모든 것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이것이 예수님의 “죄목”이었다. 그 유대인의 왕은 자기 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마저도 구할 수가 없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 왕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고, 이방인들에게는 지독한 어리석음이었다. 죄수들이 처형장으로 가는 동안에는 하얀색 명판이 죄수들의 목에 걸리거나 죄수들 앞에 나붙는다. 그 명판이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졌다. 십자가에 걸린 그 죄목들조차도 예수님의 왕 신분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다.
* 39-43절 : 두 죄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그들의 삶의 결과는 너무나 판이하였다. 그 두 사람은 모두 “예수님과 함께”있었지만 한 사람은 오직 겉으로 뿐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내적으로 믿음의 정신 안에서였다. 그 죄수들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을 조롱하는데 합세하였으며, 그는 예수님에게서 성취되고 있던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비난하였던 것이다. 다른 죄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자기가 믿는 하느님의 계획과 하느님의 지혜에 부합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였다. 그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고, 제 힘으로 의화를 이루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동반자로서 그는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길을 자기 자신의 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그 나라를 주신다. 죽으신 후에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시게 될 낙원으로 드실 것이며, 거기에서 그 착한 죄수는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 복음 요약 :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해 자신이 그리스도라면 남을 살린 것처럼 자기도 살려 보라고 조롱하고 빈정거린다. 정말로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그런 왕이라면 이렇게 쉽게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예수님이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마지막 순간에는 하느님이 그를 구원하시지 않겠는가?’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명백한 실패가 그분을 사기꾼으로 몰아가고 있다. ‘유다인의 왕’이라는 십자가의 죄목은 예수님을 극단적으로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허구 속에서 지적한 그 말이 오히려 진실을 말하며, 비참한 현실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왕권을 드러내고 있다. 주님은 참된 왕이시다. 천상천하를 다스리는 왕이시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 가운데 하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기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며 예수님께 구원을 간청한다. 부활하여 재림하실 때에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이 하느님의 통치권이 행사될 그리스도 왕국의 시작으로 보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당신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을 보장하신다.
♠ 대화 방향 : ① 나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나의 참 왕으로 섬기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② 하느님 나라는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 나도 구원에 대한 보장을 받을 수 있을지 묵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영적독서를 위한 루카복음 <성요셉 출판사>
▪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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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일
2013. 12. 1
미태오 24, 37~44
♠ 복음 연구
* 37~39절 : 마태오와 루카는 어록을 옮겨 쓴 것이다. 노아시대와 현재는 매우 비슷하다는 논지를 편다. 미구에 생각하지 않은 시간에 인자는 온다. 인자 내림에 대비하여 깨어 준비해야 한다. 즉 회개의 결단을 내려야 마땅하다.
* 40~42절 : 이중 상징어는 어록을 옮겨 실은 것이다. 마태오와 루카의 형태가 상당히 다른데 어느 것이 어록을 더 잘 보존했는지 가리기 쉽지 않다. 루카의 형태는 “그 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입니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한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입니다.” 어느 형태를 따르든지 뜻만은 같다. 즉 두 사람 가운데서 회개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구원과 멸망의 판단은 하느님, 또는 인자가 내리는 것 같지만 실은 각자 구원과 멸망을 자초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인자는 가자의‘행실대로’판단하시기 때문이다.
* 43~44절 : 도둑을 지키는 집주인의 비유 역시 어록을 옮겨 쓴 것이다. 이 비유는 이른바 위기 비유류에 속한다. 곧 종말 위기가 언제 닥칠지 모르니 늘 대비하고 있으라는 뜻을 지닌 비유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순간이 종말이라고 여기시고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이 되면 인자가 내림하여 하느님 나라를 이룩한다고 보았다. 즉 하느님 나라와 인자 내림을 거의 동시 사건으로 본 까닭에 ‘하느님의 나라가 옵니다.’를‘인자는 옵니다.’로 고쳐 쓸 수 있었다. 또한 1세기 교회에서는 이 비유의 영향을 받아 예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갑자기 온다거나, 또는 예수 주님은 도둑마냥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는 표현을 즐겨 썼다.
♠ 복음 요약 : ‘종말의 때에 관해서 아들조차도 모른다’는 말씀은 그분을 전지하신 성자로 섬기는 신앙인들에게 충격을 안겨 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님의 한계를 명언한 히브 4/5를 보면 “우리의 대제관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죄 외에는 모든 일에 있어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느님 홀로 종말 때를 아신다는 사상은 유대교 묵시문학에도 있다. ‘오직 당신 홀로 종말의 때를 아시나이다.’ (시리아어 바룩 21장 8절) 바오로도 50년경에 집필한 ‘테살로니카 1서’ 에서 비슷한 내용을 말한다. “주님의 날은 밤중의 도둑처럼 옵니다. 사람들이‘태평하다, 안전하다’고 할 때 갑작스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터이니, 그것은 임신한 이에게 닥치는 산고와 같아서 결코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 대화 방향 : ① 어릴 적에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려 본 적이 있는지요. 오늘날 나에게 있어서 산타할아버지는 누구이며, 그를 기다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곰곰이 새겨봅시다.
②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누구에게 희망을 준적이 있는지요? 만일 준적이 있다면 그것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나눠봅시다.
♠ 참고 문헌 : ▪ 200주년기념 성서주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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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체험담 >
생사의 갈림길에 찾아오신 자비의 예수님...
김 파스칼 (종술)
전주 효자4동 성당
+ 찬미 예수님!
죄 많고 어리석은 저에게 제2의 삶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저는 사고가 나기 전까지 하느님은 항상 멀리 계시다는 어리석은 생각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는 신앙생활보다는 일반적이고 세속적인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중미사보다는 특전미사나 새벽미사에 참례하며 직장생활과 사회적 인간관계를 핑계 삼아, 주말이면 동료 직원들이나 친구들과 어울려 골프, 등산, 사진 등 취미생활에 치중하다보니 미사참례도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 주일미사 빠지고 등산하다 실족해 추락 대수술만 네 번이나...
지난 2008년 11월 23일 사고 당일에도 일요일인데 미사참례도 하지 않고 친구들과 새벽 등산을 위해 완주군 운주에 있는 천등산 산행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등산하는 중 실족하여 15m 절벽에서 추락하여 쇄골과 오른쪽 다리, 오른쪽 갈비 전체가 부서지고, 그 와중에 갈비뼈가 폐를 뚫고 들어가는 대형 사고를 당하여 전북대학병원 응급실에서 6시간 만에 깨어났습니다. 그나마 뇌를 다치지 않아 다행으로 여기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전북대병원과 서울 삼성병원에서 7개월 동안 투병생활을 하며 폐를 3분의1이나 잘라내는 수술 등 전신마취를 하고 9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네 번이나 하였습니다. 하지만 몸속에 MRSA(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호흡기 계통과 수술환자의 환부에 침투해 고열과오한, 혈압 저하등의 증상을 일으킨다)라는 세균이 침범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어 삼성병원 중환자실에서 보름 동안 혼자 격리수용된 채 치료를 받았습니다. 치료는 제 몸속에 감염되어 있는 세균을 추출하여 2~3일 동안 배양하면서 항생제를 투입하여 균을 죽이는 방법인데, 세 번 정도 실시하여 효과가 없을 경우에는 생명이 위독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미 몸의 절반이 붉은 반점으로 차오르는 죽음의 판정이 내려지는 시점에 제가 할 일은 하느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리면서 애원하는 일뿐이었습니다.
❊ 죽음 앞두고 병상에서 “예수님께 의탁합니다” 수없이 외쳐...
“ 슬픔과 고통이 계속되는 상황에 저의 가족들은 절망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경을 헤매는 부족한 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어 빛과 소금의 삶으로 저희와 내일을 위해 겸손과 온유와 희생의 꽃불이 되어주시고 세상의 어둠을 쓸어내고 금빛 찬연한 햇살로 길을 열어주시는 하느님! 어둔 밤길 헤매는 가련한 저를 굽어 살피시어 구원의 횃불 밝혀 주십시오.” 라고 매일매일 기도하면서 “예수님 !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하고 침대 옆에 있는 자비의 예수님 사진을 바라보며 울부짖었습니다. 세균 실험은 계속 되었는데 결과는 불길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1,2차 실험 결과 세균이 죽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고 마지막 3차 실험 결과를 지켜보자는 말을 듣는 순간 앞이 캄캄하였습니다. 저와 자비의 예수님 둘만 있는 중환자실 독방에서 저는 24시간 내내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를 수없이 외쳤습니다. 지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옆에 있는 자비의 예수님 형상이 움직이면서 제 곁으로 걸어와 제 몸을 스쳐갔습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날 밤 2시경에 담당 주치의가 달려와 “선생님 세균이 죽었습니다. 이젠 살았습니다.” 라고 말해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저는 자비의 예수님이 꿈에 제 몸속으로 들어오신 후에 새 생명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제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것은 모든 사람들의 기도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가족과 지인을 위해 10여년이 넘게 묵주9일기도, 매일미사, 미사 봉헌, 성체 조배등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제가 죽음 판정을 받을 때 아내는 “하느님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성당에서 반장이라도 한 번 못하고 죽는다면 하느님 대전에 무얼 가지고 가야하나요 ?” 하며 예수님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가족의 눈물어린 기도 속에 네 살난 손자의 간절한 소망“우리 할아버지 살려주세요.”하는 기도는 온 가족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매주 주일 병원과 집을 방문하여 영성체를 해주시고 꺼질 듯한 촛불을 지켜주시던 선종하신 김치삼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고 많은 시간 염려해주신 김진화 신부님, 가정을 방문하여 안수해 주시고 용기를 심어주신 F.B(성서 형제회) 윤양호 지도 신부님, 쾌유를 비는 수도원의 안칠라 원장님과 수녀님들의 9일기도는 죽어가는 저에게 생명의 힘이었습니다.
이젠 덤으로 사는 인생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 진실한 신앙인으로 살아 갈 것을 결심하고 사고 이후 저의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건강한 몸으로 직장생활 하면서 잘 나가던 시절에는 세례를 받고도 성당에서 봉사활동 및 제 단체 참여도 하지 않았으며 ,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주일미사도 가끔 빠지면서 저에게 내려진 모든 축복들이 하느님의 은총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 성경듣기. 읽기. 필사와 성지순례로 새 신앙생활
퇴원 후 몸과 팔과 다리를 깁스한 상태에서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하여 혼자생활하면서 장성 글라라 수도원에서 보내준 녹음테이프를 활용하여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 성경듣기를 하고, 성경읽기도 완독을 하였습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단계에 도달할 때 성경쓰기를 하여 2년6개월 만에 성경노트 20권에 달하는 완필을 해 주교님 안수와 사인을 받았습니다. 또한 성지 125곳을 선정하여 월 1-2회 정도 가족과 함께 성지순례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제주도 성지 네 곳을 순례하였으며 지금까지 강원도 평창 생태마을 외 30여 곳을 다녀왔고 앞으로도 계속 다닐 예정입니다. 그리고 성서 형제회 (F.B.), 효자4동 성당 초창기 임시운영위원회, 제1대 사목회장 , 대건회, 형제회. 레지오 활동 등 봉사활동에 적극참여 하고 있으며, 지금은 본당 꾸리아 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신학원 성서연수과 2년차 수강을 하고 있는데, 하느님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고 맛볼 수 있도록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자비의 예수님 사랑으로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몸,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주님을 찾았더니 내게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시편 34.5)를 마음에 새기며,예수 마리아의 아나윔(겸손·가난·순명) 정신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성경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도록 기도의 삶을 살 것을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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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3년 9월 1일 ~ 31일 수입 지출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