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레이건
레이건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2년쯤 남겨놓은 1977년, 아내 낸시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가슴을 절개해 종양만 제거해도
될 수준이었다. 낸시는 자청해서 유방을 아예 도려냈다. 종양만 들어낼 경우 방사선 치료를 병행해야 하고, 그래선 퍼스트레이디
충실히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 이디스 윌슨 이래 낸시 레이건처럼 남편에 악착스럽도록 헌신한
퍼스트레이드도 없다.
파산한 구두 외판원이자 알콜중독자의 아들 레이건은 눈밭에 쓰러져 숨진 아버지를 목격했다. 낸시는 생모가 이혼하면서 버림받
아 6년이
나 친척들 손에 자랐다. 어릴 적 불행이 둘의 성격에 끼친 영향은 판이했다. 레이건은 누구와 맞서거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상
황을 피했다. 낸시는 성정이 불안하고 투쟁적이었다.항상 웃는, 속 편한 남자와 나는 한 사람이나 다름없다'고했다.
모든 것을 남편을 위해 판단하고 행동했던 퍼스트레이디 낸시의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언론은 그녀가 거만하고 사치스럽다며
비아냥댔다. 그러던 시선이 동정과 존경으로 바뀌었다. 1994년 레이건이 치매에 걸렸음을 밝히고 "나는 이제 인생황혼으로 가는 여
행을 시작한다"고 선언하면서다. 치매만큼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잔인한 질병도 드물다. 가족 말고 누구도 어찌 해줄 방법이 없
고, 가족도 인내로 견디는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이가 조금씩 해체돼 가는 것을 지켜보기가 정말 힘들다."
" 오래 사랑해 온 사람과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이 슬프다." 낸시는 남편과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는 상황을 가리켜 "길고 긴 이별"
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한 침대를 쓰고 있다. 우리 사랑은 이전에도 지금도 각별하다."고 행복해 했다. 그 인내와 사
랑으로 10년을 꿋꿋이 버텨냈다.
낸시는 결혼 50년을 맞아 사랑의 비결을 말했다. "결혼생활은 50대 50이 아니다. 항상 둘 중 하나는 더 많이 주고 양보한다. 우리 둘
도 50년간 양보해 왔다." 두 사람 다 배우로서는 정상 근처도 밟아보지 못했지만 부부애에 있어선 누구도 밟지 못할 고지에 올랐다.
낸시는 레이건이 있어서 존재했고 레이건 역시 낸시가 있어 존재했다. 미국 대통령의 비참한 말년까지 아름다운 황혼여행으로 탈바꿈
시킨 것도 마르지 않는 아내의 사랑이었다.
첫댓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등록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