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삶의 방향을 바꾸어 버린 레지오 마리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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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지오 단원 선서식을 마치고(오른쪽 앞에 앉아 있는 이가 김금룡). |
레지오 마리애라는 명칭과 기원을 시작으로 회합 순서, 활동 방법과 주의 사항, 관련 교회법과 가톨릭 교회 교리 등을 자세히 수록하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은 이 사도직 단체를 유지, 발전시키는 견고한 중심축이다.
그런데 한국 레지오 마리애는 처음부터 우리말로 완전하게 번역된 교본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전쟁 중이던 피폐한 상황에서 완벽하게 준비하고 시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 검토 부탁 받아
교본은 1955년 3월 15일 현 신부가 김익진에게 부탁하면서 본격적으로 번역되었다. 목포의 대단한 부자 아들로 태어난 김익진은 성 프란치스코처럼 살기로 결심하고 산정동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목포를 떠났다. 영어ㆍ일어ㆍ중국어 등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던 그는 경상도로 가서 교육자, 문필가로 활동하였다.
1년 동안 이 교본의 번역 작업에 매달린 그는 우리나라보다 먼저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한 일본과 타이완 교회의 레지오 마리애 교본을 참조하여 영어 원본을 거의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었다.
1956년 6월에 「레지오 마리애 직무 수첩」을 발간하여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숙원을 풀어 준 것이다<본지 2015년 2월 1일자 1300호 기사 참조>.
이 직무 수첩이 발간될 때까지 초창기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주요 기도문과 직무 등이 일부 번역된 불완전한 교본으로 기본 정신과 활동 방법 등을 익히면서 자신과 이웃을 성화해 나갔다.
그런데 현 하롤드 신부는 이 땅에서 레지오 마리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한국인 신자들이 제대로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사전 검토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김금룡을 조용히 불렀다.
“가이오씨, 나는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라는 신심 단체를 들여오려고 합니다. 처음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정신과 방법을 가지고 있어도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 있습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 단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안내서를 준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비밀로 하고 가이오씨 혼자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한국에서 이 사도직을 수행할 때 어떤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생각되는 점들을 제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현 신부가 김금룡에게 이런 임무를 맡길 수 있었던 것은 김금룡이 비록 세례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신문교우(新門敎友)이지만,
이미 전쟁 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성당 십자가를 자기 집에 감추고 수녀 한 명을 숨겨 줄 만큼 담력이 남다른 데다 짧은 시간에 비해 신앙심이 상상 이상으로 깊어졌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현 신부가 김금룡의 인간성을 더욱더 잘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 성옥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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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날 면화 공장들이 있었던 유달산과 바다가 맞닿은 지역. |
삶의 전환점 된 레지오 마리애
현 신부는 지목구장 서리가 된 후 지목구청에 기거하면서 성옥에게 미사 복사를 시켰다. 성옥은 중학생 때부터 고려대학교로 진학할 때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이 되면 지목구청으로 달려갔다.
현 신부는 가까이는 압해도, 멀리는 흑산도 등 전라남도의 도서 지역에 있는 공소들을 순방할 때도 성옥을 데리고 다녔다.
그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마다 자기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성옥을 통해 그의 아버지 김금룡의 사람됨을 헤아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현 신부가 내려 준 과제에 대한 검토와 학습을 끝낸 김금룡은 현 신부에게 자기가 이해한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에 대해 자세히 보고하였다. 현 신부는 이를 꼼꼼히 메모한 다음에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해결책을 마련하였다.
문제점에 대한 파악과 이에 대한 보완책이 어느 정도 마련되자 현 신부는 김금룡에게 산정동본당 신자들 가운데 이 사도직 단체를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이들을 비밀리에 하나씩 접촉하게 하였다.
이렇게 모인 교우들이 현 신부의 지도를 받아 준비 작업을 거듭한 끝에 쁘레시디움을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이후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4시와 자기 전에 한두 시간씩 기도하고 주님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였지만, 그의 삶을 온통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삶으로 전환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레지오 마리애였다.
이전의 김금룡에게 헐벗고 굶주린 이들은 자기와 무관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는 내 형제자매로 다가왔다.
그는 기복신앙을 철저히 배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가족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고, 자기가 누리는 이상의 부를 탐하지도 않았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다 나누어주지는 못했지만, 레지오 단원이 되고 난 다음부터는 여러 부류의 어려운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묵묵히 실천에 옮겼다.
움막과 판잣집 찾아 나서
레지오 마리애는 환자 방문, 상가 봉사, 선교 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레지오 마리애는 빈첸시오회 아 바오로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영신적인 도움만 줄 뿐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활동은 금하고 있다(교본 제39장, 10. 참조).
비록 초기에는 교본 전부가 번역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김금룡이 이런 규칙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 죽이라도 먹지 못하면 곧 죽을 것 같은 이들과, 약만 먹으면 살아날 것으로 보이는 이들의 간절한 손길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결국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야 했지만, 이럴 때마다 레지오 단원이라는 사실을 결코 드러낸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였지만, 얼마 안 있어 거의 매일이다시피 유달산 자락의 움막이나 판잣집에서 기거하는 굶주리고 아픈 이들을 찾아 격려하고 신앙을 심어 주었다.
다치거나 많이 아픈 노인이나 어린이를 발견하면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 치료해 주고, 심하게 아플 때는 입원시키고 가족들과 교대로 간병까지 하였다.
이처럼 배고프고 아픈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 실천이 점점 잦아진 만큼 자연히 그의 씀씀이도 커져만 갔다.
아직 전쟁의 상흔이 짙게 남아 있어 누구나 살기 어려웠던 그 시절에 아무리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이 훌륭하다고는 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면 이미 가장과 남편, 아버지 역할을 내팽개친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된 1953년 고등학생이었던 외아들은 그가 본격적인 활동에 전적으로 투신하던 1954년 이미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당시에 지방 출신 사립 대학생은 거의 다 갑부 또는 그 지방의 유지 자녀들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 규모에서는 엄청난 돈이 들었기 때문에 가난한 학생들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쉽게 넘볼 수 없는 특권이었다.
그는 갑부도 아니었고, 목포 유지도 아닌 작은 가게 주인에 불과했다. 아들의 학비를 마련하려면 더 많은 노력과 절약이 필요했다.
그런데도 그는 지난날보다 더욱 열심히 장사하기는커녕 가게를 지키는 일을 점점 소홀히 하다가 결국은 장사에서 거의 손을 뗀 것과 다름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물건을 팔아 조금씩 모아두었던 돈을 다 쓰고 나자 장사 밑천마저 헐어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아버지의 전답까지 서서히 남의 손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계속>